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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해고 통지서
종이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계약서를 비롯한 문서를 돌이나 쇠붙이·진흙판·천 같은 다양한 재료에 새겼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종이 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전하지만 유물은 없고 고려 말 해남윤씨 문중의 노비 증여계약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다. 조선 땐 민사소송에서 문서 증거를 무조건 우선시하는 '종문권시행(從文券施行)'이라는 재판 원칙이 지켜졌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난리가 나면 가재도구는 둬도 땅문서·집문서는 꼭 챙겼다.
▶ 1971년 등장한 이메일은 문서를 작성하고 교환하는 일상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인터넷의 전신(前身)인 미국 국방부 아르파넷(ARPANET) 프로젝트에 참여한 프로그래머 톰린슨이 'QWERTY'라는 의미 없는 메시지를 3.5m 떨어진 다른 컴퓨터에 전송했다. 1989년 월드와이드웹(WWW) 개발로 인터넷망이 구축되고 1990년대 후반 무료 이메일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이메일 이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09/20/2009092000796_0.jpg)
▶ 우리도 1997년부터 이메일 사용자가 급증해 작년 인터넷 사용자 3619만명의 83%가 이메일을 이용한다. 작년 전자상거래 액수는 630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 법은 당사자 동의나 특약이 없으면 전자문서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재판에서 '종이로 작성된 문서'를 뜻하는 서면(書面)을 증거로 삼지만 전자문서는 제외한다. 조작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 이메일도 서면으로서 효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어제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왔다. 미국에 연수 간 대기업 직원이 4차례나 연수 재연장 신청을 하자 기업측이 이메일로 해고 통지를 한 것이 정당했다고 봤다. 법원은 "해고는 서면으로 통지해야 효력이 있다"는 근로기준법 27조에 따라 그동안 이메일은 '서면'이 아니라고 봐왔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7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한 경우도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 대법원은 1989년 문서가 원본인 경우만 문서위조죄를 인정하던 판례를 변경해 복사본을 위조한 경우도 처벌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복사기가 들어온 지 10~20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이번 이메일 판결도 1심이긴 하지만 이메일이 의사소통과 법률행위 수단으로 비중이 커진 지난 10~20년의 변화를 담아낸 것이다. 앞으로도 메신저, 트위터 같은 기술 발전에 따른 세태 변화를 법원이 어떻게 따라잡을지 궁금하다. 판결은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해석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김홍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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