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와플] 아직도 부정부패가 교묘하게 만연한 사회 - 양상훈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12. 2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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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군대 안 보낸다는 기업인 이야기   

한 해를 보내며 생각해보니 어느 이야기 하나가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에 걸려 있다. "아들보고 군대 가지 말라고 했다. 다른 나라 국적 얻을 수 있으면 그러라고 했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이 필자 앞에서 한 얘기다. 밝고 곧은 성격의 그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분노를 품게 된 사연은 그때로부터 11개월 전에 시작됐다. 그는 사업이 잘돼 공장을 확장해 이전하려고 했다. 해당 도(道)에 문의했더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도지사가 직접 "OK" 했다. 해당 구청에 서류를 넣었고 이제 공장을 새로 지어 이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공장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자신을 보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직원들이 "이미 다른 보험에 들고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만나보니 이 사람이 느닷없이 "공장 이전하는 일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고 답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공장 이전이 꼬이기 시작했다. 구청의 실무 담당자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일을 진척시키지 않았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도청에 알리겠다"고 그 담당자를 위협도 해보았다. 그때마다 담당자는 "해볼 테면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규정대로 하고 있으니 탈 날 게 없고 결국 손해는 네가 볼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에 찾아왔던 그 보험 일을 한다는 사람에게 돈을 줬어야 했다. 실무 담당자는 단 한번도 책잡힐 말을 하지 않았다. 직접 돈을 받지 않고 넌지시 암시하는 방법을 썼다. 증거가 없어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 기업 사장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 공무원의 사고방식이었다. '너는 왜 혼자만 돈을 벌려고 하느냐. 다들 돈 내고 허가받고 그렇게 같이 사는 건데 너만 왜 룰을 어기려고 하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공무원이 나에 대해 '나쁜 놈'이라고 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고 한 푼도 탈세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나쁜 놈이냐. 남들처럼 못하는 나는 바보 같은 놈이냐"고 물었다. 

 

그는 "결국 11개월 만에 손을 들었다. 공장 이전을 포기했다. 나도 몇 억원 정도 주고 무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통이 터져서 그만뒀다"고 했다. 그는 공장 이전을 포기하면서 아예 공장 문을 닫았다. "지치고 질렸다"고 했다. 생산은 하도급을 주고 마케팅만 하기로 했다. 생산 라인 직원들을 해고했다. 정든 직원들과 헤어진 그날 혼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아침에 깨 보니 술집 주인 집이었다. 만취 상태에서 너무 울어서 술집 주인이 데려갔다고 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필자를 쳐다보며 "아들에게 군대 가지 말라고 하겠다. 외국 국적도 취득할 수 있으면 하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는 제품을 일본에도 수출해왔다. "일본과 처음 거래할 때 까다롭게 굴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다. 막상 일을 해보니 너무나 편했다. 규칙만 지키면 됐다. 언젠가부터 일본에 살 집을 짓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는 공장 이전을 포기하면서 집을 지을 일본 지방까지 결정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기업 아닌 중소기업이 공무원을 상대하려면 따라야 하는 룰이 있다. 난 중소기업이지만 그 룰을 못 지키겠다. 나도 돈 주고 할 수 있지만 이 빌어먹을 조그만 양심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고 했다. 

 

동석했던 다른 기업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장을 말리느라 "그래도 우리 사회는 나아지고 있다" "이제 문제만 없으면 경찰서나 소방서에 돈 안 줘도 괜찮지 않으냐" "중국서 사업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국세청 간부 부인의 그림을 세무조사 받는 기업들이 사 주고, 재건축 현장에서 공무원이 돈 받고 문제 해결을 원스톱 서비스한다고 하고, 건설회사들은 문제 해결용 미녀 부대를 운영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도는 게 우리 사회다. 검사가 기업인 카드로 돈을 물 쓰듯 쓰고, 검찰 수사관 두 명이 2년 동안 한 술집에서만 1억4000만원어치 향응을 받기도 했다. 

 

동석한 기업인 한 사람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규정 위반을 겁내는 사람, 명예를 아끼는 사람은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이런 사회에선 이들이 약자이자 바보다. 선진사회는 이 바보들과 약자들이 이길 수 있는 사회"라고 했다. 그날 모였던 사람들은 "우리 생애에 그런 선진 사회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 양상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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