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민 목사 (Joeseph Kim)
< 김 태 민 목사 (Joeseph Kim)는 영국에서 역사 공부를 했으며, 미국 오레곤주립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폴러신학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근방의 Fenton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김 태민 목사 (Joeseph Kim)의 아버지 김 동 식 선생은 는 건축사이고 예주 건축 설계소 대표이며, 김 태민 목사 (Joeseph Kim)의 어머니 추 국 자 여사는 음악을 전공했고 하늘이 주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들어가는 말
2003년으로 미국에 대규모 한인 이민이 도착한지 100년이 된다. 그 동안 한인들이 미국에 뿌리 내리기까지의 과정들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때다. 이제 한인 사회는 지금까지의 성장 위주에서 성숙 위주로 변화할 때다. 비록 한인 이민들이 언어적 문화적 장벽으로 아직도 미국 사회 주류가 아닌 주변에 있지만 그들은 큰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넌 개척자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귀한 상속자들이다. 이 글을 통해 나는 한국이민으로 미국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선택받은 일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글을 통해 한인 미주 이민사가 미국 역사의 귀중한 한부분이며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임한 놀라운 사건임을 알리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Korean-American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차온다.
첫 접촉
미국에 공식적으로 방문한 첫 한인들은 1883년 9월 조선제국을 대표하여 Arthur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러 방문한 도미 사절단이다. 1년 전인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제물포에서 맺고 양국간의 우호를 돈독케 하기 위해 민영익의 인솔로 방미한 사절단은 미국 각지를 돌며 서구문물을 직접 체험했다. 특히 사절단원 중 제일 어린 유길준은 방문 기간이 지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Massachusetts주 Dammer Academy에 수학하며 서구 문물을 익힌다. 미국은 조선에게 서양의 어떤 나라보다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조선에 전수하는 역할을 한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 사회 전체를 개혁하여 서구화를 앞당기려는 급진 개혁파의 거사인 갑신정변이 3일 천하와 함께 중국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재필, 윤치호, 변 수 등이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들은 개화가 뒤진 조국 조선 제국을 근대화하여 선진 제국들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직시하고 행동하는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들의 뜻은 사대주의의 틀을 그대로 지키며 조선을 그들의 영향하에 계속 두려는 중국의 무력 간섭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비록 뜻은 좌절되었지만 다시 때를 기약하며 태평양을 건너는 그들이 미국 땅에 정착한 최초의 한민족이었다. 이들이 한달 여의 항해를 끝내고 배 갑판에 서서 San Francisco 항구를 바라볼 때의 감회가 어땠을까?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들께서 미국으로 오시면서 비행기 창 밖을 통해 비친 모습들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가? 아마 비슷한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한민족의 첫 미국 진출은 이렇게 큰 뜻을 품은 자들을 통해 시작됐다. 그저 그들 한 몸 편하게 살고자 미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한번 사는 인생 역사 속에서 큰 발자취를 남기고자하는 비범한 뜻을 가진 자들이 한민족 미국 이주의 첫 개척자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미주 동포는 이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대규모 이주
서재필 등 갑신정변 관련자들의 미국 이주는 망명의 형식을 띤 개인 위주의 이주였다. 한인들이 공식적으로 미국에 이민자들로 온 것은 1903년 1월이 첫 시작이다. 그 후 1905년까지 7,000 여명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와 미주에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이들 첫 이민자들은 모두 하와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로 오게된다. 한인 미주 이민의 첫 씨앗이라고 할 이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은 그 당시 미국과 한국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 진행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상황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가 미국에 합병되면서 미국 전역에 만연한 중국인 혐오 감정의 영향에서 하와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82년에 통과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중국 노동자들을 고용하기가 힘들어 졌고 중국인 노동자들도 모두 미국 본토 대도시들로 떠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후 하와이의 농장주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찾다 일본인 노동자들로 대체한다. 하지만 일본이 국제사회에 새로운 강자로 떠오름에 따라 미국과 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위치에 서면서 미국내 일본인들을 경계의 시선으로 보게된다. 일본 정부가 대규모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파견해 언젠가 하와이를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하와이에서도 일본인들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하와이의 일본인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과는 달리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끊임없는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이에 농장주들은 또다시 새로운 대체 노동력을 알아보게 되고 여러 나라 출신들을 한꺼번에 고용하게 된다. 한국, 필리핀, 포르투칼 등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한다.
이들 농장주들은 하와이 농장주 연합을 만들어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을 접촉한다. 알렌 공사는 조선의 고종황제와의 친분을 활용해 고종 황제에게 한국 노동이민을 허락할 것을 설득한다. 이에 고종황제는 국가 정책으로 미국 이민을 장려하며 조정에 수민원이라는 관청을 설립해 이민자들을 위한 여권 발행 등 국가 차원에서 미국 이민을 추진한다. 하와이 농장주 연합도 드레슬러(Dreschler)를 대표로 선임하여 조선에 파견해 이민자들의 미국 이민 준비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한다. 드레슬러는 인천에 드레슬러 은행을 창립하여 이민자들이 필요한 재정을 지원한다. 당시 미국법은 미국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미국인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하와이 농장주들은 자신들이 직접 한인 이민자들의 여행 경비를 대어줄 수 없어 드레슬러라는 개인이 한국에 은행을 세우고 그 은행에 투자하고 드레슬러 은행은 한인 이민자들의 여행 경비를 융자하는 형식으로 한인 이민자들을 유치하려 하였다.
이렇게 하와이 농장주들이 한국 노동 이민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미국공사 Allen은 왜 한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을까? 본국의 훈령에 의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소신의 결과였다. Allen은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닌 선교사 출신 외교관이었다. 미국 공사로 임명받기 전 그는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로 있어서 한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을 누구보다 경계하고 있었다.
한인 이민사의 권위 Wayne Patterson교수에 의하면 Allen 공사가 일본의 조선침략을 막는 길은 미국의 개입이고 이를 위해서는 당시 미국 정부가 조선과 일본에 취하고 있던 불간섭 중립 정책을 시정할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과 미국간의 경제적 교류 확대가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하와이 농장주들이 한인 노동 이민을 위한 협조를 요청해 오자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양국간 경제교류 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고종황제를 직접 설득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하였다.
여기에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조원시(미국명 George Jones)의 적극적인 홍보로 첫 공식 한인 미국 이민이 1902년12월 시작된다. 이들 첫 이민자들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인천 내리 감리교회 출신인걸 보면 조원시 선교사의 적극적 활약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제국의 상황
조선은 18세기말 개혁을 시도한 군주 정조의 사망 이후 큰 혼란에 빠져든다. 정조와 경쟁관계에 있던 양반 세력들이 실권을 쥐고 유약하고 나이 어린 왕들이 등극하게 한다. 어린 왕들은 명목상 왕이었을 뿐 정조의 개혁을 반대하던 양반들이 외척 세력이 되어 실권을 쥐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 결과 조정의 힘의 균형이 깨진다. 이전까지는 조정이 여러 세력들로 나뉘어져 있어 서로를 견제하였다. 하지만 이제 왕의 외척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한 세력에게로 힘이 쏠린다. 이전에는 정적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부정을 자제했으나 힘의 균형이 깨어지자 더 이상 부정한 관리들을 감시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권력을 잡은 자들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무제한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비판할 반대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전한 비판과 견제는 이제 불가능했다.
특히 지방의 관리들은 그들의 관하에 사는 백성들에게 과대한 징세를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식구가 6명인 가족에게 10명이 사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하여 세금을 징수한다. 6인의 세금은 국가에 내고 서류 상으로만 존재하는 나머지 4인 몫의 세금은 관리들이 착복하는 관행이 있었다. '황구첨정'이라 불리운 이 부정한 관행은 당시의 조선 사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혼란했나 하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혼란이 무려 10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100여년 동안 이웃 일본은 서구 열강에 개항하여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세계적 조류인 산업화에 발빠른 동참을 한다. 하지만 조선은 쇄국으로 일관하며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지 못한다. 비록 대원군이 어린 고종의 섭정으로 권력을 잡고 100년간 부패한 권력을 유지해온 양반들을 견제하고 왕권의 위엄을 세우려 노력하나 그도 쇄국논리는 벗어나지 못해 조선은 세계화의 조류에서 계속 밀려나기 시작한다.
1876년 산업화 된 일본의 위협으로 강제 수교조약이 이뤄지며 조선은 드디어 서구 열강에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계속된 관리들의 부패와 흉년에 농촌 경제는 피폐해 있었고 서구 열강의 진출로 500년간 조선을 지배해 온 유교 이데올로기가 무너져 내리는 사상의 혼란을 맞는다. 조선의 백성들은 민족자존을 위해 서구 열강의 진출에 봉기하지만(동학혁명) 한편으로는 산업화된 서구의 문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특히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자 유교의 질서가 무너진 후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있던 백성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서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나라 서구(미국)에 호의를 갖기 시작한다.
산업화라는 거대한 역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은 그 대가로 열강의 간섭을 받게되고 곧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몰락한 농촌 경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한다. 그리고 이들, 즉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들이 더 큰 기회를 쫓아 조선을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한다. 미국 이민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다. 500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왕조가 기울기 시작하자 그에 따른 혼란으로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게되고 혼란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외국으로, 특히 만주로 연해주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된다. 비슷한 때에 미국 이민도 시작된다. 미국 이민은 19세기말, 20세기초에 발생한 한민족의 대규모 해외 이주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한 부분이다.
미국 이민의 차이점
이 당시 만주, 연해주로 이주한 백성들은 모두 개인 차원에서 이주한다. 당국의 반대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를 원했다. 한마디로 불법이민과도 같았다. 이들의 숫자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 하지만 상당히 큰 규모였다. (약 50만으로 추산)
여기에 비해 미국 이민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먼저 개인 위주의 불법 이민이 아니었다. 미국 당국과 조선 정부가 정식 외교적 절차를 통해 승인한 이민이었다. 조선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들고 합법적 신분으로 미국 땅에 진출한 점이 이 당시 다른 나라로의 이민과 다른 점이다. 조선 제국도 '개국진취'라는 목표로 서구에 우리 백성들을 보내어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역의 기틀을 삼는다는 진보적인 자세로 미국이민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에서 하와이로 노동 이민 온 초기 이민자들은 한민족 해외 이주의 새로운 획을 긋는 개척자들이다.
초기 이민자들의 구성
하와이로 이민 온 초기 이민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자라다 도시로 올라와 살며 선교사들을 만나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미 고향을 떠나서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으로의 이주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들이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 않아 미국으로의 이민은 그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이주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들의 나라라는 사실이 미국 이주의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어느 한 지역사람들이 이민자들의 다수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이점은 다른 나라 이민자들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이 당시 중국의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남쪽 지역인 광동 지방 출신이었다. 일본 이민자들도 고베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출신이었다.
왜 중단되었나?
이렇게 큰 뜻을 갖고 추진된 미국 이민이지만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본정부의 압력에 의해 1905년 한국인들의 하와이 노동 이민은 중단됐다. 한국인들 보다 먼저 하와이에 진출한 일본 이민자들은 처우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를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인등 새로운 노동자들이 진출하자 그들의 이런 노동쟁의의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이주하려 하였다. 하지만 미국 본토, 특히 California 주는 일본인 혐오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California 주 정부는 연방정부에 1882년에 통과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과 같은 일본인 배척법을 제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같은 시기 일본 정부는 산업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외교적 지위를 얻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일본인 혐오법이 통과되면 그들의 국가적 위신이 낮아지고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이 힘들어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인 혐오법 통과 저지에 일본 정부는 나서게 되었고 이를 위해 일본인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하는 것 보다 하와이에 계속 체류하게 하는 것이 혐오법 통과 저지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를 위해서는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간접 지원할 필요를 느낀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세력이 약화되어야만 일본인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고 그 결과 그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하지 않고 하와이에 남아있어 혐오법이 저지되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정부는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하와이로 노동이민 보내는 것을 1905년 중단시킨다. 한일 합방은 1910년 되었지만 이미 이때부터 일본정부는 조선정부를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야심을 채우기 위해 해외에 이주한 일본인들을 용의주도하게 지원하였고 그 결과 한국 이민이 중단되는 피해를 입었다. 1903-1905 3년간 7,000여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입국했다.
사진 신부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2시간씩 뜨거운 뙤약볕 아래 일해야 하는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이들 중 80% 가량이 미혼 남성이었다. 초기 한인 이민사회는 이러한 심각한 성적 불균형을 해소해야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 사진 신부 제도였다. 이들 미혼 남성들이 자신들의 사진을 한국에 보내어 한국에서 신부들을 중매하여 데려오는 방식이었다. 하와이 농장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진 신부의 입국에 협력하였다. 사진 신부들이 도착하면 배 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합법적으로 미국에 입국하였다. 하지만 신랑들이 사진 속의 모습보다 많이 늙어 신부들이 당황하는 일이 있었다.
초기 한인 이민 사회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든 것은 이들 사진 신부들의 공로가 결정적이었다. 사진 신부들이 없었더라면 초기 한인 사회가 가족 중심의 공동체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신부들의 헌신으로 한인 사회의 성적 불균형이 해소되고 가족이 형성되어 심리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이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800년대 중반 대륙 횡단열차 건설 노동자로 온 중국 이민자들도 대부분 미혼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어 초기 한국 이민사회와 같은 심각한 성적 불균형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본토에서 여성들을 인신매매 해 데려와 홍등가를 만들어 성적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당시의 China Town은 매춘과 아편이 성행하는 범죄 소굴로 전락했다.
여기에 비해 한국 이민사회는 사진 신부들에 의해 가족 중심의 사회로 정착할 수 있었다. 미지의 땅 하와이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민 온 남자들도 위대한 개척자들이지만 사진 한 장 보고 태평양을 건너온 사진 신부들, 하루 종일 남편과 함께 노동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가사를 돌보며 자녀를 양육한, 이들이 이민 백년의 위대한 영웅들이 아닐까?
한인 사회의 구심점: 독립운동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워 한인 사회가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등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던 항일 독립운동에 미주 교포들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노동 해 번 귀한 수입의 일부를 때어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이렇게 조국 독립을 향한 마음은 하나가 되었지만 독립을 쟁취하는 방법에는 지도자 별로 차이가 있었다.
먼저 박용만을 중심으로 한 무력 투쟁 방법이다. 박용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력으로 일본을 무너트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독립의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 승리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박용만은 Nebraska 주에서 노동하던 한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소년병들을 모집하여 Nebraska 대학 Hastings 캠퍼스에서 주말에 실제 군사훈련을 시키며 그가 생각하던 무력 항쟁을 통한 독립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박용만은 곧 만주로 이주하여 그곳의 독립군들과 합류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다. 구한말 신식 군인으로 복무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퇴역군인들이 박용만을 도왔으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몰아낸다는 것은 당시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또 다른 독립운동 세력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조직으로 박용만처럼 군사 무력 항쟁이 아닌 국제여론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 생각하였다. 즉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잘 활용하여 국제여론이 일본에 등을 돌리게 하여 한국을 독립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나라의 정부에 활발한 로비활동을 전개할 필요를 느끼고 이승만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어 한 정부의 수반 자격으로 반일 로비를 편다.
박용만, 이승만 외에 또 다른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은 박용만처럼 군사 작전이나 이승만처럼 외교적 노력보다 한국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개혁을 통한 선진 사회를 이룩함으로 독립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독립국가에 앞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춘 독립국민이 더 시급하다 생각하였다. 먼저 우리 민족이 독립국가를 운영 할 수 있는 성숙하고 질서 있는 시민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군사적 외교적 승리보다 더 확실한 독립운동이라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도산은 미국의 한인사회부터 개혁할 필요를 느끼고 흥사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개혁운동을 실시한다. 당시 한인들이 미국인들의 눈에 정직하지 못하고 비위생적이란 인상이 있어 먼저 이를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도산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여 화장실 청소를 해 주는 등 손수 성숙한 인간의 모범을 보이며 동포들을 섬겼다. 이에 동포들이 감화되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으로 도산을 따르며 그의 뜻에 동참했다. 또한 미국 독지가들도 도산에 감화되어 거액을 기부하였다.
도산은 미주 한인사회의 개혁이 본국 사회의 개혁을 위한 시발점으로 보았다. 한인 이민 사회가 본국 사회 개혁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당장 본국에서 시작할 수 없는 사회 개혁을 한인 이민자들을 통해 먼저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미주 한인사회는 주류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회로 거듭나고 더 나아가 본국의 사회도 독립국가로서 설 수 있는 질서 있고 성숙한 시민사회로 거듭나게 하는 큰 비젼을 위해 살았다. 도산은 미국사회의 장점인 민주주의와 성숙한 시민 의식을 미주 한인 사회와 본국에 소개하기 원했다.
이승만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발빠른 대응으로 독립 한국의 첫 대통령이 되는 영예를 누린다. 그의 현실인식과 정치적 처세술은 그가 평소에 원하던 권력을 쥐게는 하였으나 한 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발전을 위한 비젼 제시는 못 하였다.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는 태도로 대통력직을 수행하다 종국에는 4.19 민중 혁명을 통해 실각한 독재자의 오명을 쓴다. 그리고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며 한국 대통령으로서의 야심을 키워가던 하와이에서 쓸쓸히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한다.
이와 비교하여 안창호는 정치적인 변화에 앞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 나아야 진정한 독립이 가능하다 보았다. 그는 한국인 모두를 사랑하며 그들이 진심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길 바랬다. 그의 의식 개혁의 비젼도 이러한 동포들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에 근거한다. 그래서 이승만을 한 시대의 정치 지도자로 부른다면 도산 안창호는 시대를 초월한 민족 모두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도산의 이러한 비젼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질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 민족의 의식 개혁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만큼 도산은 큰 인내를 필요로 했다. 타락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고 탄식하시던 예수님처럼 도산도 동포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비젼이 오해받거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얼마나 탄식하였을까? 의식 개혁을 통한 성숙한 시민사회의 꿈은 도산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모이는 곳의 분위기가 이전 세대들의 모임보다 더 질서있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에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한국 축구팀을 응원했다. 그들 대부분이 젊은 세대다. 그 많은 사람이 모였으나 무질서한 혼란이나 불상사 없이 질서 정연했고, 모였다 헤어진 자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해 한 세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시민의식의 성숙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이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가장 기뻐했을 사람이 아마 도산이 아닐까? 그가 생전에 부르짖던 성숙한 인간, 성숙한 사회가 비록 더디지만 이제 영글고 있음을 본다. 그 위대한 꿈이 미주 이민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약 한 세기 전에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자.
그 당시 미국의 상황: 혁신주의
최초의 한인 이민이 하와이로 간 1900년대 초 미국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65년 남북전쟁에서 산업화된 북군의 승리 결과로 미국은 노예해방과 함께 급속한 산업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급속한 산업화는 짧은 시간에 거대자본을 탄생시켰고 이제 미국의 경제는 몇몇 대기업인에게 장악 당한다. 동시에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북부 도시들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주한 흑인들과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을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이 도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한다.
한 세대에 가까운 계층간의 위화감과 혼란이 있은 후 1890년대부터 활발한 사회운동이 전개된다. 사회를 시장 논리에만 맞기는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정부가 기업들을 감찰하고 규제해서라도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사고가 유행한다. 혁신주의자들은 빈곤이 개인의 노력부족 때문 보다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의해 초래된다 믿었다. 그리고 정부의 기능을 이러한 불공정을 시정할 효과적인 도구로 보았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어 선거를 통해 주류 정치무대에 등장해 미국은 바야흐로 혁신적인 사회 개혁을 실시하는 앞선 사회가 된다. Wisconsin주의 상원의원을 지낸 Robert "Fighting Bob" LaFollette이 이러한 혁신주의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또한 혁신주의는 미국역사상 위대한 대통령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Woodrow Wilson대통령을 배출하여 1900년대 초 미국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 후유증을 최소화해 유럽과는 달리 공산주의세력이 활발한 활동을 못하게 된다.
혁신적 정치인들을 통해 부패한 거대 자본과 정치인들이 제약을 받게된다. 급속한 산업화로 초래된 자본주의의 약점을 정치를 개혁해 극복하고자한 이 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대 자본에 의해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진취적 법안의 통과로 큰 발전을 이룬다. 아동노동 금지, 최소 임금, 공공건물의 위생시설 확충, 노동환경 개선 등의 변화가 이때 성취되거나 성취의 발판이 마련된다.
이 새로 통과된 법안중 한인 노동 이민자들의 미국 정착에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고용노동 금지법이다. 혁신주의시대 이전에는 노동자들이 고용노동제(contract labor)에 의해서 고용노동기간(보통 최소 3년)에는 더 좋은 환경의 일터가 있어도 옮길 수 없었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족쇄와 같던 이 법안이 금지되자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한인들을 포함한 많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더 좋은 일터를 찾아 떠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밭에서 그들의 청춘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생활에 익숙해진 후 호놀룰루나 대륙의 대도시들로 이주하여 자영업을 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혁신주의 운동가들은 한인 이민자들을 염두에 두고 돕기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평소에 생각하던 인간존중, 약자보호 등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했을 뿐이다. 한국이민자들은 당시 미국 사회의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이전에 이민 온 다른 인종들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 없듯 혁신주의도 많은 개혁법안 이면에 부정적인 면도 내포하고 있다. 그 두드러진 예가 지나친 애국심의 고취이다. 혁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미국에 사는 수많은 민족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미국화 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미국에 오는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버리고 미국화 될 것을 강요하는 용광로 이론(melting pot theory)이 실제로 반이민 정서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그 당시 한인 이민 2세들이 건전한 뿌리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라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가치관의 혼란을 갖고 살게된다.
한인사회는 중국이나 일본 community 같이 스스로 town을 형성할 만큼 숫자가 많지 않았다. 타민족 2세들은 그들의 town에서 자라며 그들의 문화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당시 한인 2세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 결과 타민족들보다 더 빨리 한국어와 문화를 잊어버리고 미국화 되었다. 미국에 사는 각 민족들의 고유의 문화를 무시하고 무조건 주류 미국문화에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한인 이민사회가 저항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사고방식은 미국화 되어 가지만 실질적으로 인종차별의 장벽 때문에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해 방황하는 2세들과 조국에 두고 온 형제들을 생각하며 조국광복에 힘쓰는 한인 1세들과의 갈등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한인 가정이 타민족 가정보다 더 큰 세대 차와 문화차이로 갈등했다 할 수 있다.
용광로 이론으로 당시 한인 2세들은 Korean-American이 아닌 미국인이라고 교육받았으나 사회 현실은 그들이 백인들과 똑같은 평등한 대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은 엄연한 현실이어서 우리 2세들이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의 한국 뿌리는 버린 사람들로 여겨지며 주류 사회에서는 유색인종으로 받아야 하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1965년 Kennedy 개정 이민법 통과 이후 이민 온 새 이민자들의 2세들은 이들 초기 이민자들의 2세들처럼 제도적인 인종차별은 받지 않았다. 이 때까지는 King 목사와 같은 인권 운동가들의 희생 덕분에 많은 인종 차별적 법안들이 인종 평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법안들로 대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이민 2세들이 다인종 미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며 겪는 갈등은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초기 이민 2세들이 겪어왔던 아픔과 갈등을 미주 한인 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 간직하자.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통해 현재의 갈등을 극복 할 지혜를 찾자. 이들의 희생을 디딤돌로 삼아 한 단계 더 성숙한 한인 사회를 이루자. 초기 이민자들의 후손들과 1960년대 이후 이주한 이민자들과의 연계가 이루어져야 한국 이민 사회가 이 땅에서 역사적 뿌리와 정통성을 갖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강용흘: 미국의 지성, 미국의 양심
이 당시를 살았던 한인 이민자 중에 미국사회에 두드러진 공헌을 하며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이를 한 명 꼽으라면 강용흘(Yonghill Kang)이다. 1900년대 초 함경도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식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인다. 한일합방 직후 어린 나이지만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느끼고 신문화 교육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12살의 나이에 무일푼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다. 하지만 서울의 대부분의 교육기관들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감시에 있어 그가 기대하던 자유로운 서구식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 선교사들과 연관된 고등학교를 다닌다.
졸업 후 귀국한 강용흘은 3.1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되어 고문을 받는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만주와 연해주로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꿈을 펼치고자하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미국선교사를 찾아가 설득하여 귀국하는 미국 선교사 일행으로 드디어 태평양을 건너 꿈에도 그리던 미국에 온다. 이때가 1920년대. New York에 정착한 그는 China Town 주변에 숙소를 정하고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여러 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한다. 그리고 Canada Nova Scotia 지역의 Dalhoise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아 2년 공부하고 Boston 대학( Boston University)로 전학하여 과학사 학위를 받는다. 졸업 후 Harvard 대학원에 진학하여 영어교육 석사를 취득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양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 소개하여 주류 사회로부터 동양문화 전문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논문이 시사 계간지인 New Republic, Nation등에 실리기 시작한다. 또 명문 여자대학인 Wellesley College 출신의 Francis Keely와 결혼한다.
1931년 그와 교류하던 미국 문인들의 강력한 권유로 그의 자전적 소설로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과 그가 미국으로 오기까지 이야기를 적은 Grass Roof를 출간하고 이 소설은 곧 best seller가 된다. 소설 "대지"를 쓴 당시의 세계적 여류 작가인 Pearl Buck 여사가 Grass Roof의 추천사를 썼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인정받는 작가였나 하는 것을 증명한다. 이민 1세가 가질 수 있는 영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국 문단에서 인정하는 최초의 동양인 작가가 되었다. 또 당시에는 드문 동양문제 전문가로 100여편의 논문을 발간했다. 그의 이러한 실력이 인정받아 1929년 출판된 대영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tanica 14th edition)에 필진으로 참여한다. 동양인 최초의 구겐하임 연구원(Guggenheim Fellow)이 되어 Guggenheim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그의 best seller Grass Roof의 속편인 East Goes West: Making of an oriental yankee를 출판하여 다시 한번 best seller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 당시에는 인종차별적 법안에 의해 미국에 태어나지 않은 동양인 이민 1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에 강용흘은 1939년부터 3번에 걸쳐 동양인 이민자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미국 의회에 법안 상정을 추진한다. 비록 당시에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강용흘의 노력은 주류 사회의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1952년의 개정 이민법(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Act)에 따라 동양인 이민자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강용흘의 노력이 열매맺는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자 강용흘은 미국 전쟁본부(War Department) 에서 근무한다. 미군에게 적국의 언어인 일본어를 가르치는 부서의 총수로 또한 경제전투국(Board of Economic Warfare) 연구원으로 한국, 미국의 공동의적인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여함으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 동시에 충성하게 된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1946년 강용흘은 남한을 임시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한다. 하지만 미군정이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무시하는 것, 반공선동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친일독재 세력을 지원하는 것에 큰 실망을 한다. 특히 이승만 추종세력에 의해 자행되는 민중학살과 테러, 이를 묵인하는 미군정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이승만 독재지원과 월남전 참전을 포함한 미국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미국은 McCarthy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극우 반공 선동정치가 횡행하던 때라 강용흘의 대담한 극우 반공정책 비판은 미국 사회에서 유명 작가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쌓아온 그의 기득권을 잃는 위기를 불러온다. 실제로 강용흘은 미국 정보계통에서 좌익사상을 가진 불온한 인물로 분류되어 많은 어려움을 당하지만 끝까지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유명 작가로서 그의 문학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소신을 지킨 용기 있는 미국 지식인의 표상이다. 한국처럼 당시 미국도 냉전의 결과로 불어온 극우 선동정치의 광풍에도 그는 광야의 외로운 소나무처럼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조선 선비의 기상이 미국으로 건너와 꽃핀 것이 아닐까?
1972년 Florida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때까지 그는 농장을 운영하며 살았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인지라 농장 일도 어느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열심이었다고 한다. 냉전이라는 뒤틀린 역사의 현실에서 부와 명예가 보장된 극우 선동정치권의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며 산 강용흘, 그의 평생의 과업이었던 상호 이해와 존중을 통한 동양과 서양의 화합은 한국과 미국 양 문화에 익숙한 1.5세,2세 Korean American 차세대들에 의해 계승되어져야 할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박천섭: 믿음을 따라 산 인생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인 2세가 누구인지 정확한 자료가 없어 확실치 않지만 1895년 San Francisco에서 태어난 박천섭(영어이름 Julian Park)이라 여겨진다.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계간지 Korean Culture 이민 100주년 기념 2002년 가을호에 박천섭의 아들 Arthur Park이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하며 기고한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천섭의 아버지 박정석은 1894년부터 미국에 머무르다 이듬해 아들 박천섭을 San Francisco에서 낳는다. 1896년 그는 조선 제국 신식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조선으로 귀국하며 후에 고종 황제의 친위대장까지 지낸다. 하지만 귀국 시 아들 천섭을 데려가지 않고 친지의 손에 맡기고 간다. 천섭은 친지의 손에 의해 San Francisco China Town에서 키워지며 중국학교에 보내진다. 그러나 중국어를 못하는 천섭은 중국 친구들을 못 사귀다 친절한 백인 유지의 도움으로 가사 일을 돌보며 학교에 가도록 주선된다.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식군대가 해산되어 천섭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이 다시 미국에 들어와 가족이 함께 지낼 기회가 온다. 하지만 배가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동안 천섭의 아버지는 급사한다. 아직도 사망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천섭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항일 운동을 지도할 인물로 보여 일제가 독살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태어나고 처음으로 가족과 합류하여 함께 살려던 천섭의 꿈은 깨어진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친지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천섭은 성장하면서 교육에 뜻을 품고 동부로 이주한다 Chicago에서 일을 하다 한 선교사 부인의 후원으로 Ohio 주에 있는 Baldwin Wallace College에 입학해 인문학을 전공한다. 당시는 세계 제 1차 대전 중이라 반 독일 감정이 팽배해 있던 때였다.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이 총장실로 몰려들어 총장을 끌고 마을로 나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국 국기에 입맞출 것을 강요하였다. 총장이 독일 이민 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천섭은 총장을 위로하기 위해 총장실을 찾았다. 그 때 총장은 뒷짐을 지고 창 밖을 내다보며 찬송가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를 콧노래로 부르며 그의 아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며칠 후 총장은 파면되었지만 천섭의 가슴에 신앙의 불씨를 심어 놓았다.
대학을 졸업한 천섭은 New York으로 이주하여 YMCA 에서 일하며 Columbia 대학원에서 공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입학 일주일 전 5가 장로교회(Fifth Avenue Presbyterian Church) 예배에 참석하던 중 John Henry Jowett 목사의 설교를 통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받는다. 예배 중 목사로의 사명을 확인한 천섭은 Columbia 대학을 포기하고 대신 Princeton 신학교와 대학에 동시 입학한다. 그 동안 한국의 어머님과도 계속 편지로 왕래하던 천섭은 어느 날 숙소로 돌아와 보니 낯선 동양인 하나가 와 있는 것을 본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동생이었다. 천섭의 동생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Michigan 주 Detroit 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었다.
천섭은 Princeton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며 동시에 Princeton 대학에서는 세계적인 석학 Henry Van Dyke 밑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러한 배경이 천섭의 설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방학동안 천섭은 목사가 없는 마을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의 설교는 성경 이야기와 시 그리고 그의 삶의 깊은 통찰력이 어우러져 많은 영혼들을 전도했다. 1923년 목사 안수를 받고 Pennsylvania 주 Duncanville에서 목회를 한다. 부임하자 마을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별세하여 천섭은 교장 선생님까지 겸임한다. 그리고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백인 여인 Mildred Tate와 결혼한다. 신부 가족이 반대했지만 곧 화해하고 천섭은 가정을 갖는다. 천섭의 부인 Mildred는 매우 현숙한 여인으로 사랑으로 집안을 이끈다. 천섭의 한국인 제수로부터 한국음식 만드는 법을 배워 1년에 한번씩 한국음식을 만들어 친지들을 초대했다.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여파로 천섭은 목회 외에 또 다른 수입이 필요하게 되어 Equitable 보험회사에 취직한다. 곧 그의 성실성이 인정받아 주위 4개 county를 관장하는 district manager로 승진한다.
1940년 천섭은 동생과 함께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셔온다. 천섭의 동생은 stained glass designer로 미국 의회 기도실의 stained glass를 제작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천섭은 당시의 많은 유색 인종처럼 인종 편견을 겪었으나 그 모든 것들을 무시했다. 한번은 천섭이 어느 모임에 연설자로 초대받아 갔다. 천섭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한 백인 남자는 천섭이 영어를 못하는 줄 알고 천섭을 놀려댔다. 천섭은 이에 대꾸도 안 했다. 곧 천섭이 소개되고 그의 연설이 시작됐다. 연설을 마치고 식탁으로 돌아와 보니 조금 전 천섭을 놀리던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천섭이 shopping 하고 있을 때, 한 백인 신사가 다가와 말했다 "박 목사님 제가 FBI 요원으로 있을 때 목사님을 뒷조사하고 감시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모든 미국사람들이 목사님만큼 훌륭한 시민들이라면 이 나라는 더욱 좋은 나라가 될 겁니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가 천섭이 사는 Duncanville에서도 열렸다. 그리고 천섭은 그곳의 시민들을 대표하는 king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는다.
1979년 천섭의 아들이 한국을 방문 중 구한말 신식 군인들의 사진에서 극적으로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한다. 천섭의 아들이 이 사진을 갖고 천섭을 찾았을 때 천섭은 녹내장으로 장님이 되어 있었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사진 속 모습을 설명하자 그 사진을 손에 쥐고 있던 천섭의 눈에선 감회에 찬 눈물이 떨어졌다.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아들을 통해 듣는 천섭의 심정이 어땠을까? 눈물을 닦고 천섭은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산 노래를 아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천섭은 1981년 8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의 현숙했던 아내 Mildred는 100세를 살고 2002년 하나님과 천섭의 곁으로 갔다. 천섭은 평생을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다. 그는 신앙으로 삶의 아픔을 이긴 위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조용하지만 확신에 찼던 그의 인생을 통해 예수 안의 승리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우리도 이민 생활을 하다 지칠 때 위에서 본 강용흘이나 박천섭과 같은 이민 생활의 선배들이 살아온 길을 보며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민교회의 설립
하와이 한인 이민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시작되었다.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보내도록 고종 황제를 설득한 사람이 당시 미국 공사이며 장로교 선교사였던 Allen이었다. Gaelic호를 타고 떠난 첫 하와이 이민단에는 인천 내리교회 성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인 선교사로 내리교회를 담임하던 조원시 선교사(George Jones)의 적극적 권유가 내리교회 교인들의 미국 이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첫 이민단에 내리교회에서 파송한 홍승하 전도사가 있어 미국에 도착하기 전 이미 배 안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므로 이민 교회는 미국에 도착하기 전 망망대해에서 이미 시작했다 볼 수 있다. 마치 미국 독립이전, 미국 대통령과 정부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미국 건국의 이상과 정치 사상이 존재한 것처럼 이민 교회가 실재로 미국 땅에서 시작되기 이전 이미 이민 교회의 예배는 시작돠고 있었다. 1903년에서 1918년까지 약 8000여명의 하와이 한인 이민자중 2800여명이 이민 교회 교인이라는 통계 조사가 알려주듯 하와이 이민 사회는 당시 조선 사회보다 교회의 영향력이 강했다.
하와이에 도착후 한인 교인들은, 안창수, 우병길을 중심으로 당시 하와이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리고 있던 미 감리교 선교국과 접촉하여 정식으로 교회를 시작한다. 그 결과 John Wadman 감리사의 인도로 1903년11월10일 한인 감리교 전도회로 첫 예배를 갖는다. 그리고 1905년 7월9일 정식 감리교회로 승격하고 민찬호 목사를 2대 담임목사로 맞아들인다. 하와이의 한인들이 하와이 전역에 분산되 살게되어 여러 한인 교회가 세워지고 1905년 12월 감리교 연회 주관으로 한인 목사들을 임명하게 된다. 이 때 임명된 한인 목사들은 김영식,김이제,민찬호,임정수,신판석,현순,이경직,홍치범,최진태 등이다. 이로서 한인 이민사회와 한인 교회간의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1905년 까지 약 2000명의 한인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이주 하였다. 이들중 다수가 당시 미 서부 최대의 도시 San Francisco로 이주했다. 이들은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인 친목회로 모이다가 후에 상항 한인 감리교회를 시작한다. 이 교회의 창립일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정확한 날짜를 알기는 힘드나 오랜 세월 한인 이민사회를 연구해온 김형찬 교수가 편집한 "Korean Diaspora"의 한인 교회 부분에는 1904년9월22일 첫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905년 10월8일 문경호 목사가 1대 담임 목회자로 부임한 것으로 되어있다. 1906년 7월15일 방화정 목사가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한다. 또한 동남부의 Vanderbilt대학으로 유학길에 상항에 들른 양주삼이 유학을 잠시 미루고 교회를 도우며 교민들을 섬긴다. 특히 교회에서 “대도”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상항지역 교민들의 계몽에 힘쓴다.
1911년8월5일에는 3대 담임으로 이대위 목사가 취임한다. 이대위 목사는 1903년 미국으로 유학와 도산 안창호와 함께 상항 한인 친목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를 한인 최초로 졸업하고 태평양 신학교(Pacific School of Religion)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13년 남가주 Riverside지역의 농장에서 노동하던 한인 노동자 11명이 인종차별적인 현지의 백인 노동자들에 의해 배척받는 일이 벌어진다. 일본 영사관은 한인 노동자들을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사태에 개입하려 했으나 한인 노동자들은 일본인으로 취급받는 것을 거부하여 일본 영사관의 개입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접한 이대위 목사는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William Jennings Bryan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 정부가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일본 국민이 아닌 한국인으로 따로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받아 들여진다. 한국인들은 미국땅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아닌 한국인으로 인정받는, 비록 아직 독립된 한국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한국인을 일본인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백성으로 존재함을 인정받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배후에는 우리 교민들의 문제를 미국 정부와 직접 교섭해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와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대위 목사라는 교회 지도자가 있었다. 이 한가지 사건만 보아도 교회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04년 나성에 최초의 한인 감리교회인 로벗슨 한인 감리교회가 Mrs. Shorman과 감리교 선교국의 지원으로 세워진다. 1906년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 장로교회인 나성 한인 장로교회가 장로교 선교국의 도움으로 나성에 세워진다. 그 후 New York에서는 감리교 선교국의 도움으로 New York한인 교회가 개척되고 Chicago에서는 제일 연합 감리교회가 개척된다. 이들 초기 한인 교회들은 예배처소와 기숙사 건물을 겸비해 예배 장소로 뿐만 아니라 지역을 처음 찾아오는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정착할 때 까지 묵어갈 수 있게해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민 교회의 분열
당시 이민 사회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한명을 꼽으라면 단연 이승만이다. 그는 구한말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옥고를 치르고 도미하여 Harvard, Princeton등 명문대학에서 공부한 인테리였다.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유일한 길은 강대국간의 역학 관계를 활용한 외교에 달려있다 믿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강대국에 로비활동을 벌여 강대국들이 일본에게 조선 식민통치를 그치도록 압력을 넣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 미주의 한인들의 도움이 절실하고 특히 미주 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한인 교회가 중요하다 믿었다. 원래 감리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그였지만 이민 교회는 그에게 신앙생활의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민교회를 중심으로 그가 생각하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출석하던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특성상 미국인 감독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현실에 저항하며 한인 교회는 한인의 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을 이해 못하는 미국인 감독의 지도 하에 있는 것이 그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을 하기에 방해가 된다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는 8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를 떠나 초교파 교회인 하와이 한인 기독교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1919년까지 한인 기독교회는 정식으로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의 목양이 없이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의 아지트와 같은 역할을 한다. 1919년 민찬호 목사가 한인 기독교회 담임으로 부임한다. 그는 이승만의 추종자중 한사람으로 충실히 이승만의 뜻을 실현한다. 특정 교단에 속해 있지 않아 민찬호 목사는 자유롭게 한인 기독교회의 이름으로 10여명의 이승만 추종자들에 목사 안수를 준다. 하지만 이들은 정식 신학교육과 목회자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들이라 이민 교회 목회자들의 심각한 질적 저하를 가져온다. 이들의 목사 안수로 이민 교회는 이승만이 추구하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 할 수 있게 되지만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인재 양성이라는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면 이민 교회를 통해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독립 운동과 더 나아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승만의 개인 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것은 아닐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의 지혜에 맞긴다. 분명한 것은 이런 풍조가 교회 본연의 사명인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이승만의 영향하에 있는 교회들은 교회라기 보다는 이승만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지회의 종교 분과와 같은 역할을 감당 하였다. 교회가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할 때 교회는 세상의 어떤 모임보다 더 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929년 10년간 한인 기독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던 민찬호 목사는 교회 재정인 건축헌금 $15,000을 착복했다는 혐의로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의 후임으로 부임힌 이용직 목사는 교회 본연의 사명인 예배와 선교 공동체를 추구 했으나 그의 방침을 따르는 교인들과 반대하는 교인들ㄹ오 분열 되기에 이른다. 양측이 교회 건물 사용권을 놓고 법적 투쟁을 전개하고 이용직 목사는 반대파 교인들로부터 신변 위협을 받는다. 결국 이목사의 신변 보호를 위해 매주일 경찰의 입회하에 예배를 드려야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다.( 이 장면은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지. 이래서 첫 단추를 잘---)
두고온 조국의 해방은 모든 한인 이민자들의 관심과 소원이었다. 하지만 이민 교회가 어떤 식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이견이 있었고 이 이견 때문에 초기 이민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교회는 어느 상황에서도 2000년 교회사를 통해 증명되는 사실, 즉 교회는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민 교회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노력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조국의 독립은 인간적 노력이나 한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의해 이루어 졌다. 당시 이민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러한 사실 보다는 이승만 한 개인을 너무 의지 하여서 교회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지 못한 우를 범했다.
교회는 시대를 초월해 변치 않는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은 제한된 한 시대의 사건이다. 복음전파라는 무한한 교회의 가치보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한 시대의 유한한 가치를 더 중요시한 우를 초기 이민 교회는 범한 것은 아닐까? 다시한번 강조 하지만 조국의 독립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그치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그들이 독립운동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그래서 이민 교회는 이 하나님께 더 부르짖고, 교회의 본분을 더 충실히 이행했어야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할때만 존재 가치가 있다. 초기 이민 교회는 그 본연의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독자 여러분들의 지혜에 맞기겠다. 초기 이민 교회들이 독립 운동등 너무 본국 지향적인 분위기를 자제하고 미국의 사정에 더 관심을 갖고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2세들이 100%한국인임과 동시에 100%미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자랄 수 있도록 이민 교회가 노력했다면, 더 나아가 우리 2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자랄수 있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당시 우리 2세들은 대다수가 성장한 후 이민 교회를 떠났다. 교회의 에너지를 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썼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금 한인 이민 교회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 하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연륜일 뿐 실질적으로는 60년대 이후 이민 온 새로운 이민자들에 의해 이민 교회가 형성되고 많은 초기 이민 교회들은 당시 2세 3세들 에게로 신앙의 맥이 이어 지는데 실패했다. 이것이 한인 이민 100년사중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다.
지금의 이민 교회들은 선조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본국 지향적 정서를 자제해야 한다. 대신 이민 교회의 차세대들을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양육하여 미국의 영적 질병을 치유하고 복음으로 미국을 다시 깨워 미국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미국으로 보내주시고 이민 교회들을 허락하신 뜻을 실현하는 길이다.
반이민 법안들
미국은 이민자들로 시작된 나라이다. 그러나 많은 이민 그룹이 다 같은 시기에 이민 온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미국에 이주해와 살던 인디언들을 그 후에 온 영국계 백인들이 무력으로 정복하며 미국에 정착해 갔다. 그 후에 이민 온 이민자들은 독일이나 북유럽등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유럽 개신교 나라에서 와서 먼저 온 영국계 이민자들과 큰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184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천주교전통을 가진 아일랜드에서 대흉년이 들어 대규모 미국 이민이 시작된다. 그 전 까지 미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 졌으나 개신교 문화권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백인들끼리 큰 마찰이 없었으나. 이제는 천주교 배경을 가진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급격한 유입으로 새로운 갈등에 직면한다. 그 후 천주교 나라인 이태리와 폴랜드에서도 대규모 미국 이민이 시작된다. 1800년대 말에는 동방 종교의 배경을 가진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과 러시아등 동유럽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된다.
개신교적 문화의 전통위에 동질성을 갖고 살던 미국사회도 이제 물밀듯이 몰려오는 이교도 이민자들로 인해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민자들에 대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 미국인들이 선택한 방식은 낮선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민자들을 규제하고 궁극적으로는 금지 시키는 것이었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많은 반 이민법안들이 입안된다. 그 여파로 유럽의 개신교권의 나라 외에서 이민 오는 이민은 대폭 줄어들고 특히 동양에서의 이민은 실질적으로 중단된다. 여기 동양 이민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법안들을 소개해본다.
1907년 이민법은 외국인들이 하와이나 멕시코 캐나다를 경유한 미 대륙 입국을 금지 시켰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미 대륙으로 정식 입국하는 합법적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1917년 이민법은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에게 영어 시험을 실시해 영어로 읽고 쓸 수 없는 외국인들의 미국 임국을 금지했다. 그리고 동양인 이민자들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도록 하였다. 1924년 이민법은 더 강력한 이민 규제를 가능케 했다. 이 법안은 각나라별 이민비자 쿼타를 정해 미대륙에 거주하는 그나라출신 숫자의 2%에게만 이민 비자를 발급하게 했다. 하지만 유럽의 개신교 나라들은 이 쿼타제도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 법안은 동양인 이민자들에게 특히 불리했다.1890년 인구조사를 통해 이민비자 쿼타를 정했는데 이 인구 조사시 미대륙에 사는 동양인들은 극소수였다. 그래서 이 법안을 동양인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법안으로 한인 이민사회는 한인 이민자 가정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진신부들의 입국이 중단된다. 1905년 일제의 간섭에 의해 하와ㄹ이 노동 이민이 중단된 이후 유일한 합법적 미국이민의 방법이었던 사진 신부의 입국마저 금지됨으로서 당분간 한인들이 미국에 이민 오는 길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동양인 이민자들에게 가혹했던 지역은 지리적으로 동양과 가까운 서부해안의 주들이었다. 특히 California주가 동양인 이민 배척을 주도하고 있었다. 연방정부에서 동양인 이민자들의 이민을 규제하는 동안 이들은 주정부 차원에서 동양인 이민자들을 배척했다. 특히 헨리-웹 이방인 토지법(Henry-Webb Alien Land Law)은 동양인 이민자들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했다. 이 법안은 이웃한 애리조나, 오레곤, 워싱턴 주에도 영향을 미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일본 이민자들이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법안은 끈질긴 법정 투쟁 끝에 1948년에야 위헌 판결을 받게 된다.
이러한 반이민 분위기가 1952년 이민법으로 완화된다. McCarren상원의원과 Walter상원의원이 상정해서 McCarren-Walter 법안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안은 이민과 시민권 취득에 인종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포함한다. 1924년 이민법에서 제정한 이민쿼타는 그대로 유지해 동양에서 이민 오는 것은 계속 불가능했으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동양인 이민자들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인종차별을 극복한 한인이민자들
이러한 미국 내의 반이민정서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사회에서 뿌리 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16년 60명의 한인들이 캘리포니아의 만테카에서 1300 acre의 땅을 공동으로 임대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동양인의 토지 소유는 금지되어 있었어도 임대는 할 수 있어서 한인들이 힘을 합쳐 대규모 농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SUGAR BEET을 생산했다. 미국 대륙의 한인 인구는 완만한 추세지만 꾸준히 늘어 1920년 인구조사에서는 미대륙에 1224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같은 해 California주 Reedley에서는 과일 통조림을 제조하는 Kim Brothers 가 설립되어 한인 최초로 미 대륙에서 대규모 기업이 탄생한다.
1926년 Peter Hyun이 LA에서 동양식품 제조회사(Oriental Food Product Corp.)를 창설하고 콩나물과 버섯을 주로 공급하며 LA 지방의 식품업계에 뛰어든다. 같은 해 Hawaii에서는 7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주정부 공무원으로 주류사회 진출의 발판을 놓는다. 1927년 현영대가 Stanford의과대학을 졸업하고 California 주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 의사기 된다. 그 후 김영선이 harvard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개업한다. 정양필, 안재창, 조오흥등이 힘을 모아 1922년 설립한 chop suey 생산회사인 Chung An Company가 $300,000.oo의 자본을 가진 큰 회사로 성장한다.
1930년 한인들이 북가주지역에서 성공적 쌀농사로 성공한다. 감선준이 Dunnigan지역에서 600 acre의 땅에서 쌀농사를 하고 강대근이 Colusa지역에서 300acre, 박을석이 Maxwell 지역에서 400 acre, 지재수가 Arbuckle지역에서 700 acre 그리고 정몽농이 Merced지역에서 600 acre 의 농지에서 성공적인 쌀농사를 지어 미국사회의 반이민 정성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사회에 성공한 이민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같은 해 강용흘이 그의 자전적 소설 “Grass Roof"를 출간하여 미국사회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best seller작가가 된다. 1930년의 전국 인구조사통계에 의하면 미국 대륙에 거주하는 한인수는 1860명으로 늘어난다.
1933년12월24일 Chicago대학에서 동양학회 열려 11개국을 대표하는 학생들이 참가한다. 이 때 Michigan대학에 재학 중이던 Mary Kim이 이 대회에 참가해 한국의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일부인 것처럼 인식되었으나 일본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문화를 알림으로 한국인들의 자주성을 미 주류사회에 알렸다. 다음해인 1934년 8월4일 Hawaii에서 열린 범태평양 여성대회에도 Bernice Kim, Sally Kim 그리고 Mary Kim이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아닌 자주국가(sovereign antion) 국민으로서 활동한다. 같은 해 8월7일 미국여인 Agnes Davies가 Drew대학 재학 시 만난 한국 유학생과 결혼하기위해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경정을 한 그녀는 20여년이 지난 1953년 자서전 나는 한국인과 결혼했다 “I Married a Korea"을
을 출간하여 화재가 된다.
1940년 한길수등이 중심이 되어 연방인구조사에 한국이민자들이 국적 난에 일본인이라 하지 않고 한국인이라 기록하자는 운동을 펼친다.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 한국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외국인 인구조사 담당자 (Director of Alien Registration)이던 Earl Harrison은 한국인들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특별조치를 취한다. 한국이 독립되기 전에 이미 미국의 한인들은 일본 국민이 아닌 독립국가 한국의 국민들로 미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중요한 결정이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살해된 사람 중엔 한인도 한명 있었다. 이에 한인들이 서로 단결하여 나라(미국)를 위해 헌신하며 주방위군에 많은 한인 젊은이들이 입대하도록 독려하기로 하였다. 또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이있어 신변안전을 위해 하국인임을 나타내는 뱃지를 착용하도록 권장했다. 1942년 California주 주방위군은 한인들로 구성된 Unit을 창설하고 그 해 3월1일 3.1절을 기념해 이 한인 unit들이 LA 시가행진을 벌였다. 1943년 한 해 동안 하와이 한인들이 구입한 전쟁채권이 $26,265.35 되었다. 같은 해 12월4일 미국 연방정부는 한인들을 적국 구민 list에서 해제 시키는 군사명령45를 하달한다. 그리고 2차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3월10일 하와이 한인들은 전후 복구위원회를 조직하여 700톤의 구호품을 한국에 보낸다. 8월30일 미 본토애도 비슷한 모임들이 조직되어 1955까지 한국을 지원한다.
1946년 한인 2세 Sammy Lee가 전 미국 다이빙대회 우승을 한다. 1956년 6월13일 Herbert Choy가 하와이 검찰총장에 임명된다. 하와이 이민 50여년 만에 한인이 주정부 고위 공직자로 임명되는 경사였다. 1958년 Stanford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이 최우수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졸업식 학생대표 답사자(Valedictorian) 로 선정된다. 이가 한인 백학준이다. 1960년 한인 Alfred Song이 LA 외곽 Monterey Park에서 시의원에 당선되어 한인 최초로 선출직 공직자가 된다. 또한 전국 장학생 선발( National Merit SchlarshipProgram)에 Penelope Choy가 선정되는 영광을 안는다. 1962년 도산 안창호의 아들 Philip Ahn이200여 편의 영회와 TV에 출연한 공로를 인정받아 LA 인근 Panorama City의 명예시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시의원 Alfred Song이 California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된다. 1964년에는 한인 작가 Richard Kim의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순교자가 best seller 가 된다. 또한 Alfred Song 주 하원의원이 재선된다.
이 시대가 반이민 정서로 인해 동양에서 합법적인 이민이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이민자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차별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 이민의 선배들은 차별을 극복하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2세들을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시킨다.
1965년 이민법: 미국이민의 분수령
1952년 이민법이 동양계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했어도 미국사회의 반이민 정서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아직도 동양에서의 이민은 불가능했다. 1952년 이민법 통과 후 당시 Truman 대통령은 이민 귀화연구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미국 이민정책을 재고하게 하였다. 다음해인 1953년 이 위원회는 이민정책의 대폭 수정을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쿼타 폐지, 이민 심사 시 이민 신청자의 국내 사정 감안, 이민자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감안해서 결정을 내릴 것을 제의하였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Lehman 상원의원과 Kennedy상원의원이 새로운 개정 이민법을 추진했으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해 당시는 유보되었다.
하지만 Kennedy상원의원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이민 문제의 진보적 논의를 제안했고 1963년 의회 연설에서 쿼타 폐지를 포함한 개정 이민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같은 날 미 하원에서는 Cellar의원이 이러한 Kennedy대통령의 뜻을 담은 새 이민 법안이 소개되고 다음 날은 상원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Hart의원에 의해 소개되었다. Cellar-Hart법안으로 불리었던 이 법안은 꾸준히 지지를 넓혀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Kennedy대통령이 암살을 당하자 이 법안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승계한 Johnson대통령은 전임 Kennedy대통령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할 것을 약속하고 모든 차별을 금지할 인권법과 이민법의 통과를 추진한다. 인종분리를 계속 합법화 하려는 남부 보수 세력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역사의 대세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1965년 9월15일 개정이민법이 미 하원에서 찬성 318표 반대 95표 기권 19표로 통과된다. 일주일 후인 9월22일 상원에서도 찬성 76, 반대18, 기권6 으로 통과된다. 1965년 10월3일 Johnson대통령이 이 역사적인 법안에 서명함으로서 1965년 개정 이민법이 유효해진다. 개정이민법은 이민자의 출신국가에 따라 쿼타에 의해 이민 비자를 받던 종래의 방식과는 달리 이민 비자가 순위별로 나뉘고 신청자 개인의 순위와 이민 신청자가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기초해서 주어진 평등정신을 바탕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 까지는 미국 사회에서 평등을 위해 투쟁해온 진보적, 양심세력의 노력이 컸다. 킹목사 중심의 인권운동이 흑인들의 법적 권리를 향상 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미국 사회는 평등의 정신이 주도하게 되고 그 평등의 원칙에 따라 나라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민법도 평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정이민법이 통과되게 되었다. 현재 대다수의 한인 이민자들은 이 개정 이민법 덕분에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었다. 한인들이 한 때 중지되었던 미국이민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평등과 관용으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의 변화된 분위기에 의해 가능했고 그 변화는 인권운동을 추진한 양심세력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한인 이민자들은 King목사로 대표되는 당시 미국의 양심세력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개정 이민법 전후의 한인 이민
개정 이민법 통과가 되기 전 외국인의 합법적인 미국 정착이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고 있었다. 1950년대 소련이 유인 우주선 Sputnik을 발사하여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을 앞서자 미국은 외국의 고급 두뇌를 유치하여서라도 소련에 뒤진 우주 계발 경쟁에서 승리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외국인일지라도 고급 두뇌들에게는 미국 정착을 특별하게 허용하는 선례를 남긴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부터는 국내의 부족한 의료진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에서 의료 인력을 유치해오기 시작한다. 많은 미국 의사들이 대도시를 떠나 시외곽 지역 병원들로 이주하자 대도시의 병원들이 외국에서 부족한 의료 인력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이 때 많은 의료 인력들이 한국에서 이주한다. 1965년에서 73년까지 6000여명의 의사, 간호사, 약사, 치과의사들이 미국 대도시 병원으로 새 기회를 찾아 이주한다. 이들은 이민자들과는 달리 영주권을 받지 않고 몇 년 동안 제한적 거주허가만 받아 왔지만 미국이 월남전 참전으로 많은 미국 의사들이 군의관으로 전선에 배치돼 의료 인력이 계속 부족현상을 격자 이들 외국 의료 인력에게 영주권을 주며 미국에서 정착케 하였다. 1965년 개정 이민법 통과로 이들이 한국의 형제, 친지들을 초대할 수 있게 되어 이들을 통해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한다.
개정이민법 이후의 한국이민: 경제적 관점
1965년 개정이민법 통과로 미국에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60여년전 이민 선배들은 대부분 하와이 한 곳으로 이주한 것과는 달리 이번 한인이민자들은 미국 본토의 대도시들로 분산 이주한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이 미국에 와서는 언어장벽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공과 경험을 살릴 수 없었다. 대신 노동현장에서 부부가 함께 육체노동을 해서 자본을 모으거나 한국에서 처분한 재산을 갖고 와서 사업 밑천을 삼았다. 한인 이민자 대부분이 식품점(grocery) 나 청과상등의 소매업에 그리고 후에는 세탁소등을 운영하며 미국에서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업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업종에 종사한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언어 장벽으로 미국 주류사회에서 그들이 한국에서 해오던 전문직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고 유창한 영어가 필요 없는 하지만 오랜 노동 시간과 근면성이 요구되는 노동 집약적 사업이 비교적 시작하기 쉬운 사업이었다. 또 당시까지 이 업종에 종사한 던 유대인이나 이태리 사람들이 은퇴하면서 그들의 자녀들이 부모들의 사업을 이어받지 않고 주류 사회로 들어가던 때에 마침 한국 이민자들이 와서 그들의 사업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인 이민지들의 유입으로 죽어가던 대도시 상가들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한인들이 사업을 시작ㄹ한 후 주변의 부동산가치가 폭등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사업들은 가족 단위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이라 종업원 고용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이며 짧은 시간에 많은 현찰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현찰을 다루기 때문에 늘 강도의 위협 하에 있었다. 많은 한인 소매상들이 권총강도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강도의 폭력에 희생되는 비극도 자주 발생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 사회는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신규 한인 이민자들의 증가로 대도시에 한인 타운을 형성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 식당은 물론 한인 부동산 업자를 통해 부동산을 구입하고 한인 자동차 판매상을 통해 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한인 타운에 살면 영어가 없이도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 도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이민자들에게 외국 생활의 충격을 완화하는 효과를 주었지만 생활의 모든 면에 같은 한인들끼리만 연결되어 있어 미국 주류사회와는 고립되는, 한국을 미국에 그대로 옮겨온 것과 같은 경우였다. 그래서 미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고 미국 주류사회의 소식을 몰라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 안에 작은 한국이라는 바다 속에 한인 타운이라는 작은 섬에 고립되어 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1986년 여름 Philadelphia한인회에서 한인 타운의 길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한글로 붙이는 시도를 한다. 시의회의 승인을 얻었으나 지역 백인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한다. 그들은 한글 표지판을 뜯어내거나 부수고 그 위에 미국 국기를 씌우며 격렬히 반발해 한인회의 시도가 무산된다. 주민 공청회에서 이들은 그렇게 한글을 쓰고 싶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Go back to Korea")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이 사건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미국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멀고 험한 길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만은 부분 미국 사회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한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교훈을 주었다.
개정 이민법 이후의 한인 이민: 문화적 관점
이처럼 한인들이 한인 타운을 중심으로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서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문화에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미국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때에 많은 한인들이 흑인 마을에서 장사했다. 한국식 문화에 젖어 장사를 하니 이에 많은 오해들이 생겼다. 예를 들어 미국 손님들은 한인 상인들이 불친절하다고 불평했다. 실제로 한인들은 미국 손님들에게 잘 웃지 않았다. 이것은 유교적 문화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대하는 생활방식에 익숙한 탓이었다. 한인들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손님들에게 거스름돈을 줄때도 다른 곳을 쳐다보고 “Thanks You"하는 것이 이들 미국 손님들에게는 모욕이었다. 또 한국 문화는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인 여성 상인이 흑인 남자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줄때 그들의 송에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바닥에 돈을 내려놓고 가져가라 하는 행위가 그들이 흑인이라 무시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한인 들이 장사하는 지역이 흑인 우범지역이라 다른 경쟁업소가 없어 한인들의 가게를 계속 이용했다. 서로 간의 대화도 언어장벽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긴장이 대규모 시위로 악화되기까지 했다. 1990년 Brooklyn지역 한인소유 청과상들을 지역 흑인주민들이 불매운동을 벌이며 주류 언론이 관심을 갖고 보도한다.
한인가정
미국 이민 생활이 오랜 시간 노동을 해야 해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기 힘들었다. 학교의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상담하려해도 시간이 없고 몸이 피곤하고 언어의 문제가 있어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본의 아니게 무관심해졌다.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영어를 배우고 미국화 되어 가는데 부모들은 한국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강요해 자녀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느끼는 심각한 문화차이로 갈등한다. 여기에 한국에서와는 달리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린다. 부부가 함께 나가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엄마가 살림을 하는 생활로 어머니들의 역할이 증대되나 그 변화된 환경을 아버지들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변화된 환경에서 전통적인 아내의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 이민 생활의 정착을 힘들게 했다. 이렇게 이민 생활의 문화적 심리적 갈등이 가정폭력, 이혼 청소년 탈선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가정문제에 대안이 교회와 사회봉사 단체였다.
이민교회
한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인 이민 교회도 한국의 교회를 미국으로 이식한 것과 같았다. 한국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성향의 일부로 한인 교회를 찾았다 할 수 있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보다 같은 처지에 잇는 한인 이민자들을 만나 친교하고 이민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교회에 출석했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영적 지도력이라기보다는 미국 생활에 정착하는데 실질적 도움이었다. 그래서 이민 교회 목회자들이 말씀준비와 기도보다 교인들이 이민 올 때 공항 pick up에서 아파트 구해주는 일, 직장 알선 하는 일등 목회 본질과는 다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러니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끌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대로 이끄는 경우가 많아졌다. 교회의 영적인 부분보다 사회적인 부분이 더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과 멀어짐을 뜻했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어린 영혼들이었다.
한인 2세들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부분 교회를 떠난다. 이들이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은 교회의 신앙 교육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결론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이들이 어렸을 때 교회는 영어를 구사하는 교육전도사를 초빙해 이들의 교육을 맡긴다. 하지만 많은 한인 교회들이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교회가 분열되면 예산이 적어지고 본의 아니게 줄어진 예산에 맞게 구조 조정을 하려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 교육전도사를 예산 문제로 내보내야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서로 싸움한 것이 없고 어른들끼리 싸움하여 교회가 분열 되었는데 그 피해는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한인 2세들은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아는 어느 2세는 어려서부터 한인교회를 다녔지만 한 전도사에게서 1년 이상 배워본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어느 1.5세 자매는 한국어와 영어를 다 잘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목사님으로부터 유년부 아이들을 맞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오랜 기간 성실하게 교회를 섬겨왔다. 하지만 그 교회는 그 자매 나이의 사람들을 영적으로 인도할 사역자를 청빙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했지 다른 영적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다. 이 자매는 여러 해 동안 교회에ㅐ 충성해 왔으나 결국 탈진하고 말았다. 이 자매는 목사님과 교회가 자기를 이용만 했지 지신을 양육하지는 않았다고 허탈해 했다. 한인 사회는 이들 2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일 때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은 아직도 많은 한인교회들이 너무도 본국 지향적이다. 담임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영어와 미국 문화에는 무지해도 두고 온 고향의 풀냄새를 연상케 하는, 1세들에게만 appeal하고 2세들의 아픔에는 무지한 사람을 청빙하는 것을 본다. 한인 이민 교회의 담임 목사는 아직도 1세들만을 위한 목사이고 2세들의 영혼은 영어를 하는 2세 신학생에게 맡기는 baby-sitting식 2세 교육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건전한 이민 교회의 미래는 1세와 2세, 한국과 미국의 문화와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그래서 1세와 2세교인을 동시에 목회할 수 있는 1.5세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도력이 이양되느냐에 달려있다.
1980년대와 레이건 혁명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레이건 California 주지사가 현직 민주당 카터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집권한다. 미국의 역대 정권들은 1930년대 대공황당시 집권한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로부터 이어져오던 미국 정부의 통치 철학을 따라 왔다. 정부는 국민 모두의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책임을 지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철학에 의해서 미국 정부는 많은 연방 예산을 동원하여 정부 주도의 빈곤층,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혜택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이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혁명적인 발상을 한다. 그는 정부가 빈곤층을 돕기 위해 과다한 세금을 납세자에게 부담하고 있으며 그 결과 미국의 경제는 타격받고 있다 하였다. 경제학자 Arthur Laffler의 공급자측 경제(supply-side economics)이론을 바탕으로 정부는 적극적인 감세정책으로 국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국민들이 저축과 투자를 증대하고 소비를 증가시켜 경제가 활력을 찾도록 하지는 주장이었다. 또 산업 규제, 환경 기준을 완화해 친기업적인 환경을 만들어 미국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하게 한다는 정책을 펴나갔다. 제조업체들은 싼 임금을 찾아 제3세계로 공장을 이전해 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빈곤층의 아픔을 외면했다. 그동안 정부 복지 예산을 통해 지원을 받던 빈곤층들은 정부에 의지하여 살아가기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난으로부터 일어서라는 동기부여를 준다며 복지예산 감소에 따른 빈곤층의 충격을 완화할 아무 후속 조치가 없이 복지예산 감소를 단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 변화들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와 실업률이 10.8%로 증가한다. 가난한 흑인들은 실업률이 전국 평균의 2배에 달하는 20%를 넘으며 미국은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일어난다. 세금 감소에 의한 연방예산 감소로 연방 적자는 전임 카터 정권의 3배가 되는 1000억불에 달하지만 이것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행정부는 그들의 또 다른 통치 이념인 강한 군사력의 미국을 이루기 위해 대규모 핵미사일 개발을 포함한 군비증강을 밀어붙인다. 국방비를 한꺼번에 41%나 증액하는 평화 시 사상 최고의 군사비 증액으로 연방예산은 더 적자를 보게 된다. 그 결과 이 군수산업에 관계된 고도 기술 분야(Hi-Tech Industry)의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된다. 또한 항공, 컴퓨터, 영화, 오락 등의 외국 기술과의 경쟁 없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분야의 산업들은 큰 혜택을 보게 된다.
이러한 분야에 관계된 젊은 전문직 젊은층들은 갑자기 축척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그들의 육신적 쾌락을 위해 흥청 망창 쓰는 등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심화된다. 그와 동시에 무료 직업 기술 훈련 등의 정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빈곤층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큰 박탈감을 갖고 살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어난 무숙자수의 증가와 그와 동시에 나타난 상류층의의 향락풍조 심화 등은 미국 사회가 유래 없이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레이건 행정부는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지속해온 빈곤층 복지 정책은 오히려 빈곤층을 정부의 혜택에 의존케 해 스스로 가난을 헤치고 일어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주장했다. 그래서 오히려 정부에서 혜택을 중단하는 것이 빈곤층들이 자극을 받아 열심히 노동해 가난을 이기는 계기로 삼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빈곤층들의 의식 전환이나 미국사회와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정부의 복지 예산 삭감만 서둘러서 결과적으로 빈곤층이 레이건 혁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연방정부의 무관심에 빈곤층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정신적 충격과 공황도 감수해야 했다. 많은 백인 부유층이 교외 지역으로 이주하고 대도시는 가난한 흑인들과 새로 유입된 중남미출신 이민자들로 대체된다. 미국은 이제 2개의 서로 다른 사회로 극명하기 대조를 보이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1984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이러한 미국의 문제를 거론하며 레이건 정부의 실정을 비난한다. 여기 그 연설문의 일부를 개제한다.
“대통령께서 자랑하시는 이 찬란한 도시에는 대통령께서 보지 않으시는 또 다른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융자금을 못값고, 학생들이 교육혜택을 못 받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하는 상황이 이 찬란한 도시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지역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극빈자들이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보지 않는 얼굴들에는, 가지 않는 지역에는 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언덕위의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두도시 이야기라고 불려져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백만장자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우리가 사용할 능력도 없는 미사일을 개발하느라 소진한 연방적자 예산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먹이려 정부에 도움을 구했다가 거절당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통령께서는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하고 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중산층과 이제 중산층의 대열에 합류하려 땀 흘리는 자들에게 충분한줄 아시나 봅니다. 물가가 안정됐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공급자 이론이 적중한 결과는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물가 안정은 1932년 대공황이후 최악의 불경기에 편승해 주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55,000건의 파산과 2년 동안의 대규모 실업, 땅을 빼앗긴 20만 명의 농부와 농장주들 그리고 역사상 유래가 없는 무숙자 숫자의 증가결과로 미국이라는 부유한 나라의 물가 안정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가지 더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연방적자입니다.”
LA폭동
레이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된 부시도 전임자 레이건의 정책들을 그대로 계승해 나갔다. 빈 부차는 더 심화되었고 백인들의 탈도시화는 계속되었다. 이제 미국의 대도시는 빈곤층 흑인들과 중남미출신 노동자들로 교체되고 있었다. 그러한 대도시의 정치력은 여전히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LA지역 Canoga Park의 경우 지역에 중남미계 가난한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그 지역에 살던 소수의 백인들이 정부에 강력한 로비를해 그 지역의 백인들 거주 지역을 분리하여 West Hill이라는 새 도시로 독립시켰다. 그 결과 부동산 가치가 하루아침에 2배가 늘어나는 현상을 낳았다.
하지만 빈곤층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대변할 정치력이 없었다. 특히 불법체류자가 많은 히스패닉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그에 상당한 혜택을 받지 못해 불만에 싸여 있었다. 이러한 빈곤층의 좌절이 갱조직의 확대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에 좌절한 빈곤층, 흑인, 히스패닉 젊은이들이 자기들 마을에서 갱을 조직하여 마약이나 총기 밀매 같은 범죄를 저지르며 미국사회는 더욱 절망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들이 폭발한 것이 바로 LA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한인 이민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로 기억되어 한인 이민사에서도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폭동의 발단은 속도위반을 어기고 도주하던 한 흑인 운전자를 백인 경찰들이 난폭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TV에 보도되면서 시작 되었다. 이 4명의 백인 경관들은 기소되었으나 재판에서 흑인은 한명도 포함되지 않은 배심원단에 의해 1992년4월29일 무죄 선언되자 이에 흥분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약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역사상 이 폭동이 첫 폭동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도 미국 대도시들이 폭동을 겪었고 특히 LA의 흑인 거주지역인 Watts에서 폭동이 있었으나 이번 폭동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먼저 이 폭동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폭동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 사회는 흑백간의 갈등이 인종갈등의 전부가 아니다. 이제 중남미 이민자들인 히스패닉들도 미국의 빈곤층의 일부가 되어 흑인들과 함께 평소에 쌓였던 분노를 거리로 뛰쳐나와 약탈하며 폭발시킨다. 특히 이들 가난한 히스패닉들이 LA Koreatown가까이 살고 있어 Koreatown이 약탈당한다. 그리고 흑인 마을에서 장사하던 한인들도 약탈을 당한다.
약 2000개의 한인 업소가 약탈을 당했으며3억5000만 불의 재산 피해를 낸다. 이 피해는 폭동 전채 피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로 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한인들이었음을 나타낸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이 폭동이 한인 업주들의 인종차별적 대우에 분노한 흑인들의 폭력으로 보도했다. 이것은 진실을 가리는 비양심적 행위이다. LA폭동은 미국사회가 앉고 있던 경제 불균형의 아픔이 곪아 터진 비극적 사건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던 빈곤층의 분노가 이미 미국 사회에 휘발유처럼 퍼져있었다. 여기에 흑인 운전자 Rodney King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이 무죄 판결 받은 것이 성냥 한 조각 불붙여 휘발유에 버려진 것과 같았다.
한인들은 이러한 미국 사회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미국 사회 속에 작은 한국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주류 사회와 담을 쌓고 살다보니 미국 사회의 심각한 변화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그 무관심의 대가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다. 폭동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에 우리 한인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인가 하는 것이 나타났다. 평소에 우리의 입장을 주류 사회에 전달하지 못하다보니 주류 언론은 편향된 시각으로 한인들이 폭동의 주 원인인 것처럼 보도 하였다. 이러한 주류 사회의 편견에 맞서 진실을 알리는데 당시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은 너무 무능 하였다. 한인 단체장들 중에 영어로 주류언론 기자들과 인터뷰할 수 있는 인물이 극소수였다. 하지만 평소에 한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한인2세 변호사 Angela Oh는 ABC-TV의 시사 대담 방송인 Night Line에 출현하여 유창한 영어로 한인 사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폭동은 우리에게 너무 큰 아픔인과 동시에 귀중한 교훈이다. 지금부터라도 한인들의 지나친 본국 지향적인 자세를 자제하고 미국 주류사회로 관심을 돌려 중요 사안마다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고 우리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그에 응당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
Grand Canyon Conference:미래를 위한 투자
폭동 이후 변화된 한인 사회의 필요에 부응할 미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모임이 2002년11월 열렸다. 미전국에 잇는 1.5세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 30여명을 Grand Canyon으로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격려하고 미래의 비전을 함께 나누는 시간 이었다. 어깨동무 사역원에서 참가자들의 비행기표를 포함 경비 일체를 제공한 이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이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이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동감하며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 미국과 한국 또한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펴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귀한 시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비전을 품은 많은 Korean-American 젊은이들이 이민 사회 어느 모퉁이에선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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