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콜럼버스의 항해
'미국의 역사'하면 가장 먼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떠올리게 된다. 포르투갈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인도탐험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1492년 8월3일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왕의 허락으로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으로 항해를 시작한다. 콜럼버스가 탄 배는 100톤 규모의 산타마리아호였고 50톤 규모의 핀타호에는 그의 형인 마르틴 핀슨이 그리고 나머지 한 척인 40톤 규모의 니나호에는 동생인 비센테 핀슨이 선장을 맡았다. 오랜 항해 끝에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육지에 도착하였는데 콜럼버스가 인도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착각한 그 곳은 바하마군도(오늘날의 서인도제도)의 한 섬이었다. 이틀후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두 번째로 발견한 섬이 오늘날의 쿠바였으며 세 번째로 발견한 섬이 아이티였다. 이렇게 서인도제도를 탐사한 칼럼버스는 1493년 3월 포루투갈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1504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멕시코만 남단을 두루 탐험하였지만 그곳이 인도의 서쪽이라고 계속 믿고있었다.
그러던 중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1499년부터 2년동안 중남미일대를 두루 탐험하고 돌아와서 '신세계'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썼는데 그는 그 보고서를 통하여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그때까지 콜럼버스가 인도를 발견한 것으로만 믿고있던 전유럽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결국 그 신대륙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로 불리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무렵에 아메리카대륙에서는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이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메리카에는 정복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는 그러한 정복자들의 식민지로 변하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16세기 초기에 시작된 식민활동의 주역은 스페인인 들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만들어 놓은 유럽인의 첫 식민지 산토도밍고를 기지로 삼아 먼저 1509년에는 푸에르토리코를 정복하였고 5년 뒤인 1514년에는 쿠바를 정복하여 그곳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 결과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50여만 명의 원주민들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듯 스페인들은 서인도제도 일대를 그들의 식민활동의 무대로 삼아 북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하게 된다.
2.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스페인의 귀족인 헤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년 4월에 500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 상륙하여 1521년 5월에 아즈텍 왕국을 공격하여 쉽게 멸망시켰으며 스페인에서 돼지를 사육하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사람이 페루 정복의 꿈을 안고 스페인 왕 카를르 5세를 찾아갔다가 고작 180명의 병사와 30여필의 말을 얻었지만 그는 1533년 안데스 산중의 대제국인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같은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은 유럽 전역에서 스페인의 국위를 드높였을 뿐 아니라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내리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복자들이 아즈텍 왕국과 잉카제국에서 약탈한 보물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그칠 줄 모르는 정복욕을 갖게 했으며 그 결과 북으로는 현재의 북아메리카 남부까지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동안 프랑스는 4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위그노 전쟁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종교전쟁이 끝나면서 1584년에 북아메리카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그 결과 1604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식민지 로이얼항이 건설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센트로렌스강을 따라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연이어 5대호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들어갔다. 1609년에 이르러서는 북부의 퀘벡에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남부에서는 미시시피강 어귀의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영국은 1497년 이탈리아인인 존 캐봇을 파견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하는 등 식민지 건설에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대신 '바다의 매'라고 불리는 영국 해적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귀환하는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전리품들을 얻어냈다. 이 해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 드레이크였다. 그는 평상시에도 스페인 요새를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리엔 지협에 상륙하여 페루로부터 보물들을 약탈하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해적들을 지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스페인은 1588년 132척의 군함으로 조직된 이른바 '무적함대'를 영국에 보내어 보복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의 반격이 매우 강경한데다 설상가상으로 폭풍우까지 만나 스페인 함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그후 영국은 그러한 약탈사업외에 스페인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7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아녹섬에 여자17명을 포함한 150여명의 이민을 시도했으나 4년 뒤 식량을 실은 배가 그곳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그곳에는 거주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3.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건설
영국인들의 초기 식민지건설의 실패는 그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재산이나 열의만으로는 식민지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16세기 초 일확천금을 노리던 식민활동과는 달리 가족중심의 영구적인 정착촌을 건설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1606년에는 영국왕 제임스1세로부터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특허장을 받아내고 런던회사와 프리머스 회사가 설립되었다.
런던회사는 북위 41도에서 34도 사이의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지역 개발을 허가 받고 1606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수잔 콘스탄트호를 포함한 3척의 배에 143명의 남자들을 싣고 런던을 떠났다. 이들은 오랜 항해 끝에 1607년 4월 오늘날의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근처의 체사피크만으로 진입하여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굶주림이 계속되었고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질병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 결과 반년 남짓한 기간 동안 첫 이주민들의 반 이상이 사망했다. 더구나 회사에서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금이나 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는 존 스미스선장의 지도력으로 서서히 극복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들의 장식품이나 담요로 인디안 들과 식량으로 바꾸기도 하였고 공동으로 가옥을 건설하는 등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609년 영국으로부터 10여명의 처녀들이 팔려왔다. 남자들만 있던 제임스타운에 가정이 생기자 생활이 더욱 자발적으로 일구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그들의 고생은 처참하기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그렇게 어렵기만 하던 영국 식민지인 들에게 뜻밖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식민지 개척자 중의 한사람이던 존 롤프가 앤틸리즈군도로부터 수입한 담배가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담배재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671년에는 1파운드당 12달러로 팔릴 정도로 담배 수요가 급증하여 2만 파운드의 담배가 영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어렵기만 하던 제임스타운에서도 도로변까지 담배를 심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담배농사로 인하여 버지니아 식민지 촌의 경제적 토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담배농사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노동력이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런던회사는 이민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아메리카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50에이커의 토지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이른바 '인두권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영국에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도 아메리카에 와서 자영농이 될 수가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사유재산과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를 바탕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가려는 식민지 건설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인두권 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손은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1619년 네덜란드 선박이 20여명의 노예를 싣고 와 버지니아의 한 담배농장에 일을 시키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규모 흑인노예 매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영국 식민지는 영국인들의 노력과 흑인들의 노동력이 바탕이 되어 점차 번창하게 되었으나 이주민들이 늘어나게 되자 영국정부는 강압적으로 식민지인들을 다루게 되었고 이주자들은 회사와 영국정부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노동환경과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자치적인 의회를 구성하게 된다.
4 영국 식민지의 확장
런던회사가 이주민들을 버지니아로 보낼 무렵인 1607년에 플리머스회사도 현재 뉴잉글랜드지역인 메인주로 이주민들을 보냈으나 혹독한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그 지역에 대한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필그림'이라고 불리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개척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영국의 국교를 부정하고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는 종파로 영국 국교로부터 종교적 탄압을 피해 1609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신대륙 아메리카는 희망의 터전이었다.
필그림교도 102명이 1620년 9월에 메이프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지방을 향해 떠나 오랜 항해 끝에 11월 가까스로 뉴잉글랜드지방 플리머스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배에서 회의를 열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질서와 안녕을 위하여 몇 가지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고 이를 지키기로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이 서약은 극히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아메리카 최초의 자치헌법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기만 하였지만 플리머스 식민지는 필그림 교도들에 의해서 점차 건설되어 갔다.
보스턴지역에서는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고 반대하다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1630년 매사추세츠 찰스타운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얼마후 보스턴지역까지 생활권을 확대하며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르며 다른 종교인들이나 비종교인들을 자신들과 엄격히 구분하여 비민주적 사회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제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매사추세츠를 떠나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1635년에 윌리암스 목사가 청교도들로부터 추방되자 윌리암스 목사와 그 추종자들은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는데 그 곳이 로드아일랜드 식민지이다.
토마스 후커와 그의 추종자들도 윌리암스와 마찬가지로 청교도들의 신권위주의적인 체제를 반대하여 코네티컷강 계곡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1637년 하트퍼드를 건설하여 코네티컷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이 1639년에 채택한 '코네티컷 기본법'은 근대민주주의 최초의 성문헌법이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코네티컷 식민지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는 근간이 되었다.
1682년에는 퀘이커교도인 윌리암 펜에 의하여 펜실베니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퀘이커교는 청교도들의 개혁사상을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종파로서 그들 또한 영국국교로부터 종교적 탄압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것이다. 윌리암 펜은 각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권리를 인정하므로서 수도 필라델피아는 '우애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민족이 모여 정답게 사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5. 식민지인들의 반영운동
영국정부는 버지니아를 스페인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캐롤라이나를 건설하고 대서양 연안지대의 식민지를 확고히 장악하기 위하여 1653년에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일으켜 번화의 도시 뉴욕을 빼앗았다.
갖은 고생 끝에 건설된 영국령 식민지에서 정착민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하기는 해도 그들 나름의 자치적인 의회를 구성하여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650년부터 영국정부의 대식민지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늘어나는 식민지와 이주민들을 영국처럼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통제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정책변화는 식민지인들과 영국정부간에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1651년에 발표된 항해조례는 영국정부에서 지정한 품목들은 영국이나 영국식민지에서만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식민지인들의 경제활동을 제약하였고 이에 따라 식민지인들의 반영감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쌍방간의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1667년 마침내 버지니아에서 식민지 최초의 '베이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당시 버지니아 지사인 윌리암 버클리가 담배의 과잉생산으로 값이 폭락하고 잦은 인디안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위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체 강압일변도로 통치를 함으로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버지니아 식민지인들은 나다이엘 베이컨을 중심으로 자체방위군을 조직하여 인디안의 공격에 대비하던 중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반란사건으로 버지니아의 수도 제임스 타운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영국정부는 식민지인들의 반란사건을 겪은 후 식민지의회를 해산시키고 세금을 지사 마음대로 징수하게 하는 등 더욱 강경책을 시행하게 된다. 급기야 영국정부는 1691년에 새로운 특허장을 내려 매사추세츠를 회사식민지에서 왕령식민지로 바꾸고 나머지 12개 식민지도 차례로 왕령식민지로 바꾸어 갔다. 초기 식민지의회는 지사에 의해 임명된 상원과 식민지 각 지역의 대표들로 구성된 하원으로 이루어 졌으나 의회가 과세권 및 예산 지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사는 자신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왕을 대변하는 지사와 식민지를 대변하는 의회 사이에는 자주 마찰을 빚게 되었다. 본국에서 파견된 지사들은 오로지 본국의 지시에 따라 통치하면서 식민지의회에 대해 거부권행사를 서슴치 않았다.
이처럼 식민지인들의 영국정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아메리카대륙 지배권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4차례에 걸친 이 전쟁에서 영국은 1760년 프랑스령 몬트리올을 함락시킴으로써 승리하였고 그 결과 1763년에 체결된 파리조약에 의해서 영국은 캐나다로부터 플로리다에 이르는 미시시피강 동쪽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영국은 1763년 파리조약으로 대서양 연안지대의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 동안 인디언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치안을 잘 유지해 오던 프랑스와는 달리 인디언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오타와 족의 추장 폰티악을 중심으로 하는 인디언들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고 이들과 동맹관계를 맺기까지 수많은 전투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6. 보스턴 학살사건
영국은 1763년 파리조약으로 대서양 연안지대의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 동안 인디언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치안을 잘 유지해 오던 프랑스와는 달리 인디언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오타와 족의 추장 폰티악을 중심으로 하는 인디언들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고 이들과 동맹관계를 맺기까지 수많은 전투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영국정부는 제국의 급격한 팽창과 오랜 전쟁으로 국가 채무가 크게 늘어나자 1764년 식민지인들에게 '설탕법'을 제정하여 과세를 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러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세수입을 늘리기 위해 1765년에 '인지세법'을 추가로 제정한다. 인지세법은 아메리카에서 사용되는 모든 서류에 영국정부의 인지를 첨부하는 것으로 서류종류에 따라 페니로부터 파운드에 이르는 금액으로 그렇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정신적 구속감과 일방적 과세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특히 인지세법은 기존의 포고령이나 설탕법과는 달리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도처에서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매사추세츠의 새뮤얼 애덤스를 중심으로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과격한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식민지 전역으로 확대되어 북부의 뉴햄프셔로부터 남부의 버지니아까지 데모와 폭동이 수없이 일어났다. 각 식민지는 마침내 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회를 소집하였고 회의에 참석한 9개 식민지대표들은 페트릭 헨리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는 원칙을 채택하였다. 식민지인들은 국회의원은 자기 선거구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그 선거구에서 직접 대표를 보내지 않은 영국의회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인지세법반대투쟁은 13개 신민지 전역에 파급되어 영국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번지게 되자 영국의회는 1766년 인지세법을 폐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과세 원칙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고 '영국정부만이 식민지인들에게 적용되는 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법'을 제정하여 공표 하였다. 그리하여 인지세법이 폐지되고 난 다음해인 1767년에 영국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수입해 가는 원자재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식민지측에서는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으나 영국정부는 더욱 강력하게 법을 집행하게 되고 이러한 조세저항에 대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강압적으로 대응하였으며 결국은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보스턴 학살사건은 영국상품 불매운동과 항의소동으로 보스턴이 무질서상태가 되자 1770년 영국군이 보스턴에 진주하여 강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서 발생하였다. 군중들이 이동 중이던 영국군들에게 야유와 함께 눈덩이를 던지자 흥분한 영국군들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4명의 시민이 사망한 것이다.
7. 격화되는 반영투쟁
인지세법과 타운센드법에 이어 또다시 반영투쟁을 격화시킨 것은 1773년 제월에 제정된 '차세법' 이었다. 이것은 영국의회가 경영 부실로 파산 상태에 있던 동인도회사를 살리기 위하여 창고에 쌓여 있는 차를 아메리카 식민지에 독점적으로 팔 수 있도록 허가한 법률이었다. 이로 인하여 식민지 상인들은 차 수입의 권한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차세법'은 수출입이 활발하던 보스턴 지역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크게 반발하였다. 동인도회사의 제1선인 다트머스호가 보스턴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을 무렵, 보스턴 시내 올드사우스 공회당에서는 '차세법 반대'를 위한 대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새무얼 애덤스를 비롯한 150여 명의 청년들은 집회후 파티를 열었는데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정박중인 다트머스호로 달려가 배에 실려있는 1만 8천 파운드에 달하는 차를 바다로 내던졌다. 이른바 '보스턴 차 파티' 사건이다.
이 사건이 영국에 알려지자 영국정부는 분노하였다. 영국의회의 입법권에 대한 폭력적 도전과 사유재산권에 대한 공공연한 침해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즉시 식민지를 응징하기 위해 1774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일련의 법률들을 제정하였다.
첫 번째 1774년 3월에 제정된 '보스턴 항구법'이었다. 이것은 동인도회사에 대한 손해를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매사추세츠 정부법'을 제정하여 '첫째, 식민지의회의 상원의원을 하원에서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영국왕이 직접 임명하도록 한다. 둘째, 왕이 임명한 지사가 법원의 판사를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도록 하며, 읍민회의도 지사의 요청에 의해서만 소집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영국정부는 세 번째로 '식민지인들에 의해 고발당한 병사나 관리는 매사추세츠가 아닌 다른 식민지나 영국 본토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고 규정한 '재판운영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그들은 '군대 민박법'을 제정하여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은 그들의 숙식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강제로 건물과 식량을 징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법의 제정은 급진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보수파도 여기에 합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인들은 이 법이 매사추세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체 식민지에 파급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였다. 1774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영국의 보복조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제 1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1775년 3월에 버지니아 협의회에서 페트릭 헨리는 "이제 식민지에는 자유를 택하느냐 죽음을 택하느냐 하는 양자 택일의 길밖에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보스턴에서는 급진파들이 영국군의 보급품을 압수하고 세관을 점령하였다. 뉴욕에서는 위협을 느낀 영국군이 군함으로 피신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식민지 도처에서 무기고 습격과 폭력이 빈번해졌다.
그런 가운데 1775년 4월 초 영국의 게이지장군에게 '보스턴 교외에 있는 콩코드에 민병대 화약고가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4월 18일 700명으로 구성된 영국군 습격 부대는 스미스 대령의 지휘 아래 콩코드를 향해 출동하였다. 스미스는 야간 기습작전을 개시하여 화약고를 지키고 있던 40여 명의 민병대를 공격하여 8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것이 바로 아메리카 혁명의 시작이었다
8. 독립선언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1775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2차 대륙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대륙군 창설에 관한 규정을 정하고 버지니아의 대농장주 조지 워싱턴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신대륙에서 영국의 군인으로서 프랑스군과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공을 세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대륙군의 작전본부를 설치하고 영국군과 대치하는 한편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애덤스 두 사람을 프랑스로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프랑스는 경쟁국인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기와 각종 보급품들을 지원하고 상품교역에 이용되던 선박으로 급조된 대륙해군에게 해군기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런 가운데 1775년 말까지도 대륙회의는 싸움의 목적을 명쾌히 설정하지 못하였다. 사실상 영국본토와의 관계를 끊고 있으면서도 독립선포 문제에 대해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776년 1월에 열린 대륙회의에서 처음으로 독립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고 6월의 대륙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에게 독립선언서 작성을 위한 초안을 의뢰하였다. 제퍼슨이 작성한 초안에 애덤스와 프랭클린이 약간의 수정을 가한 위원회 안이 6월28일 회의에 제출되었다. 그 후 7월 2일에 헨리 리의 제안을 토의하여 독립의 선언을 가결하고, 이어 재차 수정을 거쳐 마침내 7월4일에 정식으로 영국에 대한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서는 식민지들이 왜 싸우며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중요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끊고 세계의 모든 국가 사이에서 자연법과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정한 판단은 우리로 하여금 독립을 요청하는 여러 원인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모든 인류는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조물주는 인간에게 몇 가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주었으며, 그 권리 가운데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였을 때는 그 정부를 변혁 내지 파멸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자신들의 확실한 의사를 내외에 표명한 식민지들에게 남은 문제는 영국으로부터 어떻게 독립을 쟁취하느냐 하는 일이었다. 식민지들은 사실상 그 때까지 단 한번도 통일을 이룩해 본 역사가 없었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통제기구도 없었다. 군대를 모집하고 병사들을 훈련 관리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어렵게 모집한 병사들도 복무기간이 몇 개월밖에 안 되는 단기복무였고 그것도 자기 고장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또한 몇 주간 싸우다가 추수 때가 되면 귀가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군대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식민지인 중에서 왕당파들이 영국군에 가담함으로써 식민지들은 대내외적으로 전쟁을 치러야만 하였다.
9. 독립전쟁의 발발
대륙회의의 아메리카 독립선언으로 인하여 영국이 하우장군과 클린턴 경을 파병함으로서 독립전쟁은 시작되었다. 하우장군은 3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략적 요충지인 허드슨 강변의 스테이튼섬에 상륙하였으며 아메리카 독립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도 허드슨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워싱턴 요새와 리 요새를 오늘날 조지 워싱턴다리가 걸려있는 자리에 구축하였다. 진지를 구축한 하우장군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등 우세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쟁이 커다란 희생없이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었으므로 즉각 전투에 돌입하지 않고 대륙회의에 사람을 보내어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대륙회의도 평화를 원하고 있었으나 먼저 영국이 아메리카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하우 장군에게는 이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으므로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하우장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아메리카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뉴저지로 퇴각하였으며 병사 대부분이 징집기간 만료로 돌아가야 했고 왕당파들이 아메리카군이 패전했다고 선전하는 바람에 사기조차 땅에 떨어졌다. 이때 토머시 페인이 사기를 부추켜 일으키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제야 말로 군인정신을 시험할 때가 왔다. 전세가 유리할 때에만 싸우겠다는 군인이나 말로만 애국자라 떠드는 사람은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조국에 대한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도망갈 것이다. 이같이 어려운 때에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그 자리를 지키는 자만이 참다운 사랑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때 워싱턴에게는 겨우 4천여명의 병력밖에 남지 않았다. 워싱턴은 하우 장군의 추격을 피해 델라웨어강을 건너 펜실베니아로 후퇴하였으며 대륙회의도 펜실베니아를 떠나 볼티모어로 이동하였다. 영국은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하여 캐나다로부터 존 바고인으로 하여금 1개 군단을 거느리고 남하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 작전은 원시림과 고지를 통과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동안 보급이 끊어진 어려운 상황에서 아메리카군의 포위 공격으로 1777년 10월17일 5천여명의 바고인군은 항복하고 말았다.
바고인의 항복은 유럽의 정세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년전 파리조약으로 영국에 굴복한 일이 있던 프랑스는 영국을 약화시킬 기회를 노리던 중 아메리카 독립군들을 지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1779년 2월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으며 1779년 6월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프랑스에 이어 유럽의 다른나라들도 호의를 보여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차관을 제공하였으며 러시아는 중립동맹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길러지고 영국의 입장이 어려위지자 하우 장군을 런던으로 소환하고 클린턴 경이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동맹군의 지원으로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아메리카군과 서인도제도로부터 지원 온 프랑스의 그라스제독의 대함대는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을 공격하여 1781년 10월19일 함락시켰다. 요크타운의 함락은 영국의 국력으로 보아 그다지 대단한 패배는 아니었지만 영국의 여론은 이 전쟁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10. 독립의 쟁취
독립전쟁동안 아메리카의 무장상선은 영국무역에 많은 손해를 입히고 있었다. 1777년 1년 동안에 나포된 영국상선이 무려 450척에 이르렀고 어느 개인 선주는 3백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물자를 약탈당하였다. 이 같은 상황변화를 계기로 영국정부가 "평화"를 고려하기 시작할 즈음, 대륙회의도 그 평화가 명예로운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 있었다. 그리하여 1799년부터 존 애덤스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표들이 영국과의 협상 테이블로 보내졌다.
아메리카 대표들은 "독립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한 평화협상은 할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에 영국왕은 1782년 12월5일에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아메리카의 독립선언을 승인하였다.
마침내, 1783년 9월에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평화조약은 아메리카에게 매우 유리하게 체결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국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승인한다.
2. 아메리카의 영토는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스페인령인 플로리다를 국경선으로 인정한다.
3. 아메리카 합중국은 영국상인에 대한 채무를 상환한다. 4. 아메리카 합중국은 10만 명에 달하는 왕당파의 몰수재산을 보상한다.
평화조약은 조인되었고, 아메리카 합중국은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세계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783년 파리 평화조약을 끝으로 아메리카인들은 대외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곧 아메리카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독립전쟁 중반기부터 전쟁수행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농민과 수공업자 등의 대중들이 전쟁에서 흘린 피의 대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만약 우리가 아니었던들 아메리카는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독립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메리카 사회는 대중들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아메리카의 혁명은 대외적인 독립혁명과 대내적인 사회혁명이라는 두개의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혁명 전에는 영국정부가 인정치 않는 교파는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 종교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독립전쟁이후 1785년 버지니아 의회에서 "신앙자유법"이 제정된 후에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채택되어 마침내 아메리카에서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었고 다양한 신앙생활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경제는 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산물과 목재, 수산물은 수출하고 공업제품은 수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특혜관계를 청산하고 세계시장에서 자력으로 경제대국들과 경쟁을 해야만 했다. 동맹국인 프랑스도 아메리카를 단지 영국을 견제키 위한 위성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 속에서 살아 남는 길은 오직 강력한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쪽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11. 연방헌법 제정과 연방정부의 출범
1783년 파리평화조약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메리카사람들은 통일된 국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1787년 5월25일에서 9월17일에 걸쳐 필라델피아의 정부청사에서 제헌회의를 열고 신헌법을 마련하였다. 처음 제헌회의가 열렸을 때 13주 가운데 로드아일랜드 대표가 불참하고 12주의 대표 55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워싱턴은 회의 벽두의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만약 우리가 대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우리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안건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훗날 우리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차 현명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더 좋게 손질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가의 기반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일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각고 끝에 마련한 신 헌법은 반드시 13개주 중 9개주 이상의 비준을 받아야만 그 효력이 발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헌법 비준 과정에서, 연방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연방헌법의 결함으로 지적되어 제임스 매디슨의 주도하에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권리장전이 원래의 헌법에 덧붙여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수정헌법'이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연방은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금지하고 국교제도를 도입하지 못한다.
▶둘째, 연방은 국민의 언론, 출판, 집회, 청원의 자유를 축소시키지 못한다.
▶셋째, 국민은 무기를 휴대하고 무기를 들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넷째, 국민은 부당하게 수색이나 체포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섯째, 어떠한 사람도 법의 정당한 절차 없이는 생명, 자유, 재산을 빼앗기지 않는다.
▶여섯째, 어떠한 사유재산도 정당한 보상없이 공익을 위해 강제로 사용될 수 없다.
▶일곱째, 고소를 당한 사람은 공정한 배심원들에 의해 신속하고도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여덟째, 지나치게 많은 보석금이나 벌금을 부과하거나 잔인하고 전례가 없는 가혹한 처벌을 하지 못한다.
▶아홉째, 헌법구조에 대한 원칙을 고수한다.
▶열번째, 헌법에 의해 연방정부에 구체적으로 위임되지 않은 권한은 각 주나 그 주민에게 속한다.
연방헌법은 정치적 창건기에 활약한 모든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최대의 업적으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연방헌법은 그 이전의 모든 정치학자가 실현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사실- 즉, 개인 각자가 지상의 주권을 가지는 각 주를 구성단위로 하여 연합통일체를 조직하는 일 -을 가능케 하였다.
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1789년 1월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연방회의가 구성되었으며 각 주에서 선출된 선거인들은 뉴욕에 모여 조지 워싱턴을 연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789년 4월30일 워싱턴은 월가가 굽어보이는 연방 홀의 발코니에서 연방정부의 초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였다.
이처럼 연방정부가 출범하자 연방헌법의 인준을 끝까지 반대하던 노스캐롤라이나는 대통령 취임 후인 1789년 11월에, 그리고 제헌회의에 대표조차 파견하지 않았던 로드아일랜드가 1790년 5월에 어렵게 비준을 마침으로써 아메리카 독립혁명이 평화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2. 영토확장으로 대륙국가 형성
워싱턴 행정부는 국가적 기틀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구조직을 보완개편하고 제도의 정비를 꾀했으며 국무성, 국방성, 재무성, 법무성 등을 설치하여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경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재무장관 해밀턴과 국무장관 제퍼슨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발생한 연방파와 공화파간의 당쟁으로 인하여 고민하던 워싱턴 대통령은 재선 임기를 마친 1796년 은퇴를 발표하였다. 워싱턴은 그 당시 헌법에 임기를 제한하는 조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고 은퇴함으로서 이후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이 재선을 마치고 물러나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1796년 대통령선거에서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공화파의 제퍼슨은 180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퍼슨 행정부는 서부개척에 병행한 대외통상의 확대로 경제적 자립기반을 다져 나가는 데 주력하였다. 제퍼슨은 해군을 파견, 해적을 소탕하여 해외통상을 장려하였으며 1803년에는 '루이지애나'로 불리는 미시시피강 서쪽으로부터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중부지방을 프랑스 나폴레옹으로부터 1,500만달러에 매입하였다. 이는 현재 미국영토의 30%에 해당한다. 이로써 그 동안 미시시피강을 경계로 묶여 있던 합중국 영토에 서부개척의 활로를 열어 주었다.
1828년 평민출신의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때부터 미국은 정치제도와 정당 구조상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엽관제의 출현을 비롯하여 민선관리의 수적 팽창, 대통령 후보 전국지명대회 및 대통령 특별고문제도 등이 생겨났으며 양당제도가 그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느 특정지역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독점하던 시대와는 다른 대중정치시대가 도래하였다. '엽관제'는 선거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꿈을 꿀 수도 없던 공직을 평민들이 차지할 수 있게 됨으로서 대중민주주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이후 활발하게 진행된 서부개척은 당시 멕시코영토인 텍사스지역까지 이르러 1835년에는 3만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멕시코 정부가 과도한 미국인 이주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하게 되자 1836년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멕시코정부는 이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미국인들과의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서 텍사스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텍사스공화국은 미합중국에 합병을 청원하여 1844년 미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텍사스의 미 합병승인은 멕시코를 자극하게 되어 1846년 미국을 공격하자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력이 약한 멕시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리해 졌는데 설상가상으로 멕시코령인 캘리포니아에서 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멕시코는 미국과 1848년 '과달루페히달고 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이 조약에 의하여 미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광활한 미 서부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미합중국으로서의 영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13. 남북전쟁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1848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2만명 정도에 불과해 주로 승격될 수는 없었 다. 하지만 새크라맨토로부터 동북쪽으로 80킬로 가량 떨어져 있는 [아메리칸리버]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듬해인 1849년에는 10만여명에 육박해 1850년 캘리포니아는 미연방에 31번째 주로 가입하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필요치 않았던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자유주와 노예주 비율은 16대 15가 되었다. 이것 은 그동안 상공업을 위주로 발전해 온 북부의 자유주와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농업을 위주로 발전해 온 남부 의 노예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해 온 지역적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게 되었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북부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하여 미시시피, 플로리다, 루지애 나, 앨라배마, 조지아 등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에 [남부연합]을 조직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남부연합은 남부지역의 모든 연방정부의 재산과 요새를 공략하여 몰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1861년 3월4일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링컨대통령은 취임직후 남부연합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요새]에 지원군을 보내 대항했으나 결국 4월13일 남부연합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 전투를 시발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섬터요새에서 첫 무력충돌후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 텍사스주 등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입하여 모두 11개 주가 되었다. 이후 남부연합은 로버트 리장군을 사령관으로 북부군을 공략하여 불런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등 초기에 우세하였으나 앤티담 전투를 계기로 북부군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승기를 잡자 1863년 1월1일을 기해 연방의 모든 노예들에게 "이날 즉시, 그리고 이후 영원히 자유를 부여한다." 라고 선언하였다.
1863년 7월1일부터 3일간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하므로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 게 되었다. 게티즈버그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링컨은 게티즈버그의 격전지를 국립묘지로 지정한 후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라는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였다.
게티즈버그 전투후 계속된 패전으로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 연합군은 전투력을 상실하여 1865년 4월2일 리 장군은 수 도 리치먼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포위되어 4월9일 북부의 총사령관 그랜트장군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이로서 남부연합은 해체되었으며 4년간의 남북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북전쟁 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 서부개척은 광부, 목축업자, 농민들의 대이주에 따른 인구증가 및 국토개발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고 189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프런티어]가 소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에 추진된 정부의 친기업정책 및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공업화되면서 등장한 대기업가들의 활동으로 미국은 이제 유럽 열강들도 만만 히 볼 수 없는 산업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14. 대 서부의 개척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프런티어 라인은 서쪽으로 네브래스카, 캔자스, 텍사스 부근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캘리포니아, 오리건 지역도 그 동부의 일부만이 개척되었을 뿐 로키 산맥이 걸쳐 있는 대서부는 미개척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서 부도 남북전쟁이 끝나고 극성스런 시대적 요구에 의해 서서히 정복되기 시작하였다.
1860년경에는 약 25만명의 인디언들이 서부의 평원과 산간 벽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일부의 백인들만이 정착하고 있었는데 남북전쟁 중에 양군에서 탈영해 온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쟁이 끝난 후의 서부인구는 무시 못할 정도로 증가 되었다.
하지만 대서부의 개척에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에 몰려온 광부들이었다. 이들 광부는 1848 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의 금을 캘리포니아에서 캐냈다. 또한 1858년에 콜로라도의 파이크스 피크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10만여 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어 덴버와 같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골드러시'가 끝난 후 대부분의 광부들은 농부로서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부의 텍사스로부터 캐나다에 이르는 대평원에서는 전후 20여 년에 걸쳐 소의 방목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소 값은 동부 시장에서 마리당 40달러를 호가하였으나 텍사스에서는 3~4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몰이를 전문으로 하는 카우보이들이 목축업자들에게 몰려왔고 그들도 나중에는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광부와 목축업자들에 이어 대서부에 옮겨온 사람들은 1862년에 제정된 자작농지법에 의한 농민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국유지에 5년간 거주하며 개척에 종사하면 160에이커의 토지를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1870년대 말부터 서부의 대평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0여년 동안에 대평원을 거대한 농경지대로 바꿔 놓았다.
백인들의 서부개척 과정에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인디언에 대하여 미 연방정부 는 전쟁 전부터 일정한 거류지를 결정하여 백인들과 격리시켰고 인디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필요할 때에는 반강제적으로 조약을 맺고 그 땅을 점유하곤 하였다.
1862년에 미네소타주의 수우족이 반란을 일으켜 수백명의 백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미정부는 수우족 전체를 다코 타지방으로 추방하였는데 1874년 사우스다코다의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많은 백인들이 몰려들었고 수우족은 자신들의 지역을 침범한 백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으며 1876년 6월에는 수우족을 토벌하려던 카스터 중령의 기병 7연 대 264명이 수우족에게 전멸 당하기도 하였다.
인디언들의 조직적인 반항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최후를 장식한 것은 애리조나에 근거를 둔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용감하고 잔인했던 아파치족도 미육군의 위세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1886년 오클라호마의 지정 거류지로 되돌아갔다. 아파치족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인디언과 백인과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
미 연방정부는 1887년에 도오즈 개별토지소유법을 제정하여 인디언들이 농업으로써 자신들의 생활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891년에는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고 1894년에는 모든 인디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15. 산업국가로의 발전
남북전쟁후 미국의 공업화는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북부는 미국의 풍부한 자원과 유럽으로부터 밀려들어온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친기업적인 정책에 힘입어 미국을 산업국가로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철도산업이었다. 철도는 전후 미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크게 공헌하였다.
대륙횡단 철도의 필요성은 이미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부터 논의되어 남북전쟁중인 1862년에 의회가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의 설립을 인가하면서 그 건설이 시작되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는 네브라스카의 오마하로부터 서쪽으로 공사를 진행시켰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는 캘리포니아의 세트라멘토로부터 동쪽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미 대륙의 동서를 잇는 철도공사는 많은 난관을 뚫고 마침내 1869년 4월10일 유타의 프로몬토리에서 역사적인 접속이 이루어졌다.
이후로 미국의 철도망은 전국적으로 거미줄같이 퍼져나가 1900년에는 총길이가 32만Km에 이르렀다. 이 길이는 당시 유럽 전체의 철도길이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전세계 철도의 4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철도망의 팽창은 철도건설과 관련된 모든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상품 수송 능력을 배가시킴으로써 기업의 발전은 물론 농업과 축산업까지도 산업화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농민들이 다른 시장을 겨냥하여 대규모 생산을 하게 되어 농경기계의 발전속에 그 규모가 점차 커져 산업화되어 갔다. 축산업에도 산업화 현상이 나 타났다. 수송수단의 발전으로 중서부의 대평원의 목장에서 키운 소들이 오마하, 캔자스시티 또는 시카고의 도살장으로 보내졌으며 냉동설비를 갖춘 철도편으로 동북부시장으로 보내졌다. 증기선박과 냉동기술의 발전으로 곡식은 물론 쇠고기같이 상하기 쉬운 물품도 유럽시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며 통조림 공업의 발달로 과일과 채소 시장이 확대되었다.
증기기관에 거의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기술발전은 전신과 해저 전선이었다. 전신은 미국 내에서의 빠른 통신을 가능하게 하였고, 1876년에 대서양에 부설한 해저 전선은 국제 통신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같은 수송과 통신의 변화는 미국 의 산업을 세계 상품시장으로 확장시켜 놓았다.
한편, 유럽으로부터 몰려든 이민자들이 미국의 산업화에 밑바탕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으로 유입된 이민자수는 2600만명이 넘었다. 이민자의 대부분이 부양가족이 없는 근로연령층이었다. 이들은 열심 히 일하여 자신들의 장래를 개척하려는 사람들로서 당시 급속한 산업화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값싸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급속한 산업발전은 미국을 크게 변모시켜 국가경제는 팽창하였고 국민생활도 날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산업화의 이면 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상실을 외면한 체 대기업들은 오로지 기업의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들의 로비 에 의해 정치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러자 사회 일각에서 급속히 변모된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려는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6. 1차 세계대전과 미국
미국인들이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대두된 사회개혁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 유럽에서는 영토와 이권의 팽창에 의한 제국주의 시대가 열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이루어진 3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이루어진 3국 협상세력간에 사소한 문제에도 첨예한 대립을 보여 전쟁마저 불사할 위기를 빚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던 하우스 대령을 유럽으로 보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정세를 살펴본 하우스 대령은 윌슨 대통령에게 "독일이 칼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 체 프랑스는 혁명에 몰입해 있고, 영국의 런던은 사교계의 행사에 도취되어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하우스 대령이 윌슨에게 편지를 보낼 때까지도 유럽에는 세계 전쟁이 발발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14년 6월29일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나드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정부는 독일정부로부터 무조건 지원의 약속을 받고 그 해 7월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어 독일도 8월13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의 미국은 윌슨 행정부의 중립정책으로 오히려 상당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연합국들의 전수 물자구입이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독일의 잠수함들이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전투구역 을 항해하는 연합국들의 여객선들을 격침시켜 미국인들의 희생이 생겨나게 되자 미국이 더 이상 방관할 수 만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읠슨 대통령은 1917년 4월에 열린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민들에게 "미국이 이 전쟁에 참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협받고 있는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미국이 참전하였을 때 정규군은 22만, 주방위군은 45만명에 불과하였지만 징병제를 실시 한 결과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육군과 해군을 합쳐 약 500만 정도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주로 서부전선 일대로 투입된 미 육군의 전투성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 해군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인하여 전수물자 공급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던 연합군의 수송선 사방에 구축함을 배치하여 독일 잠수함들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연합군측의 해상작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독일이 러시와와 단독강화를 시도하자 윌슨은 연합국의 결속을 다짐하기 위하여 1918년 1월8일에 전후 평화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담은 '14개 원칙'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칙은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리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수립하려는 기본지침으로 여 기에는 공개 외교, 해양의 자유, 자유무역, 군비축소,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국가간의 국경선 조정, 국제 연맹의 창설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원칙이 공식 발표되자 연합국들은 대대적인 환영의 뜻을 표시했으며 그 해 10월에 독일이 미국에 휴 전을 제의함으로서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7. 전후 번영과 위기
1차대전후 전쟁을 통한 기술의 발전은 미국에 번영의 길을 열어 줬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노동자, 이민자, 흑인 그리고 범죄문제로 번영과 위기를 동시에 겪게 된다.
전후 미국의 기업가들은 생산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치밀한 원가계산과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 생산성과 능률성을 높여 산업의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1920년에 웨스팅하우스 방송국이 대통령 선거전을 중계함으로써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가 193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전체 가정의 40% 수준까지 보급되었다. 1927년에는 Charles A. Lindbergh가 뉴욕과 파리 간 단독비행 에 성공함으로써 항공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23년과 1929년 사이에 미국은 전세계 국가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여 같은 기간에 제조업에서의 전기소비는 70%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자동차의 보급이었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돈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에 불과하던 자동차는 1929년에 가구당 1대꼴로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1920년대 초에 이르러 포드자동차회사는 미 국 자동차의 60%와 세계자동차 생산고의 반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 미국 내의 급진주의 세력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1919년 시애틀에서 일어난 파업을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대부분의 노동운동은 합법적이었으며 비교적 온 건했다. 그러나 극렬한 선동가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폭력을 휘둘렀고, 파괴를 서슴치 않았다. 지도적인 기업가나 정치가들을 해칠 목적으로 열면 폭발하는 소포를 사용하기도 하여 이른바 [빨갱이 소동(Red Scare)]을 야기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수년동안 전개된 과격한 노동운동 속에서 가장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흑인들이었다. 1차대전 동안 다수 의 흑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죽순처럼 생겨난 공장의 일자리를 찾아 북부의 산업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퇴역 군인들의 귀향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흑인들은 일시에 해고되었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백인들은 흑인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노했다. 1919년 남부의 흑인들에 대한 린치는 극성을 부려 70여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도시에서도 혼란과 폭력이 난무해 시카 고에서 발생한 인종폭동으로 백인 15명과 흑인 23명이 사망하였으며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켜 3개월 동안 120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남북전쟁 직후 북부의 재건사업정책에 반발하여 남부의 반대자들이 조직하였던 K.K.K.(Ku Klux Klan)단을 1915년에 남부인들은 다시 현대판 K.K.K. 단으로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반항적으로 되어 가 고 있는 흑인들을 협박하는 일]을 주로 하였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미국생활에서 순수하지 못한 외국적인 여러 영향력들]을 몰아내려고 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1924년에 이르러 그들은 수백만명의 회원을 모으고 막대한 자 금을 무기로 하여 각 주의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K.K.K. 조직원들은 백색제복을 착용한 체 흰두건을 쓰고 불십자가를 휘두르며 흑인과 외국인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둘러 댔다.
이러한 전반적인 이민배척 분위기로 이민자들이 밀집된 대도시에서 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는 술의 제조와 판매를 전국적으로 금지한 [금주법]이 1919년 제정되었다. 그러나 금주행위는 법으로 단속이 불가능하였으며 오히려 시카고의 Al Capone와 같은 엄청난 범죄조직을 대도시에 구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 대공황과 뉴딜정책
1919년 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비교적 안정된 번영의 길을 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