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정부는 눈에 안 보이는데 먼저 돈을 써야한다. 2010-11-04 18:03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11. 5.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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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눈에 안 보이는데 먼저 돈을 써야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도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거리의 광고판도 아름답고 보도블록도 오색찬란하고 건축물도 모두 하나하나 현란한 디자인에 한강에는 멋진 분수가 곳곳에 하늘 높이 물을 뿜으며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하천에 조경시설을 하였으며, 청계천은 하류의 물을 퍼 올려 다시 흘려보내며, 한강에는 인공으로 섬을 만들어 그 위에 거대한 건물을 올렸고, 잠수교는 차도를 보도로 만들고, 그 옆의 반포대교에는 한강물을 퍼 올려 교량 상판 아래로 비를 뿌리는 듯한 인공분수를 만들었다. 게다가 차도와 보도에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하고, 하천 둔치 곳곳에 각종 위락시설을 만들었으며, 또 서울의 보도는 구간마다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색깔과 재질로 만들어 도시전체가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매우 불안전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왜 일까?

하천둔치에 만들어 놓은 시설물들이나 교량상의 카페시설은 홍수시 하천이나 교량 본연의 기능을 저하시킬까 우려되고, 또한 이용 시민의 안전이 걱정되며, 다양한 보도의 색깔과 재질은 변화무쌍한 질감 등으로 인해 보행자가 넘어지기 쉽고, 차도상의 자전거 도로는 차량소통을 방해하고 아울러 자전거 통행인에게 위험을 줄까 걱정되며, 도로변의 건물 디자인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외관에 부착된 시설들은 어쩐지 불안한 감을 더해 주기도 한다.

이번 늦가을 장맛비에 광화문 네거리가 한때 개울처럼 물이 꽉 차서 자동차가 마치 배처럼 다닌 일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재해로 인식해야 한다.

청계천에는 양안에 하수관거가 있는데, 이 하수관거는 평상시에는 하수가 흐르다가 우기에는 일정량 이상의 하수가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월류되어 청계천 본류로 넘어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청계천개수 때 청계천의 미관을 생각해서 화강석으로 막아놓은 것이 아마 이번 홍수 때 열리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제 이런 사고는 서곡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더욱더 상상하기 어려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포대교의 분수나 교량상에 설치한 카페는 교량 붕괴의 위험이 있고, 한강 인공 섬은 유수소통을 방해하여 한강을 범람시킬 우려가 있으며, 만일 떠내려가면 교량을 붕괴시킬 우려가 있다. 이번 장마 때 시내 곳곳이 침수가 된 것은 그 동안 보이지 않는 하수도에 투자를 소홀히 하여 땅 속의 하수도가 엉망이란 얘기다. 그때마다 당국은 언제나 몇 십 년만의 홍수니 하며 인재를 천재지변으로 돌리고 장마가 끝나면 모두 다 잊어버리고 만다.

지방의 도시시설은 모두 서울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어 건물과 보도 차도는 물론 하천까지도 모두 서울의 것을 따라한다. 따라서 앞으로 전국이 서울과 같은 형태로 개발될 것으로 예상이 되어 더욱더 걱정이 된다.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소 잃고도 외양간을 안 고치는 사람“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안 고치면 이제 남은 모든 소를 다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운영자는 국민에게 보이려는 전시행정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도시의 기본적 시설을 위한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괘적하고 안전한 도시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데에 우선 투자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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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제가 지난 며칠 간 커버사진으로 쓰고 있는 사진들은 지난해 말 지병으로 작고하신 고 최세영 박사님이 생전에 빈(Vienna)을 여행하며 찍으신 사진들로 빈(Vienna)에 출장 갈 일이 있으면 시간 내서 가보려고 한 곳들입니다.

고 최세영 박사님은 서울출생으로 경동고를 나오고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나오고 기술고시에 붙어 공병장교로 군 복무를 했으며 서울시 기술직 공무원을 하면서 서울시와 샌프란시스코의 자매결연을 성사시키고 첫 서울시 샌프란시스코 주재관으로 파견 나온 바 있습니다.

당시 팔로알토 근처 쿠퍼티노에 살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성공적으로 시켰고, 주재관 임기종료 시에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사직하고 이곳의 토목 관련 컨설팅회사에 열정적으로 일하였습니다. 자식교육을 마치자 다시 한국에 돌아가 삼성엔지니어링 전무로 한국의 현업일선에 복귀하였습니다. 그 후 선진엔지니어링 사장 등을 거치며 의욕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게는 형처럼 한국진출에 대한 애정이 어린 조언도 하여주고 한국과의 긴 빈 공백을 메워주려는 자상한 손길도 주었습니다. 저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의욕이 없어 여러 제의와 권유를 뒤로하였지만, 부모·형제도 못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동네 대선배로, 동종업 분야의 큰 선배로, 멘토 역할로 사셨던 분으로 기억하고자 합니다.

가난한 서울의 달동네 출신이, 공부 하나로 이룬 고 최세영 박사님의 행적은 마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를 연상시킵니다. 개천에서 용 났던 모습으로 사셨던 삶이 많이 그리워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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