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사건 직후 극적으로 생환해 눈물로 사건 당시를 설명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성 김 6자회담 특사가 내정됐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8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언론은 1882년 한-미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가 탄생했다며 반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사를 보면, 역사의 기이하고도 서글픈 인연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부친은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정보요원이었습니다. 전 주일공사 김재권씨(본명 김기환)입니다. 그가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불명예스럽게도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입니다.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당시 주일공사 직에 있던 그는 납치사건의 일본 내 총지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7년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밝힌 김대중 납치 실행범 명단을 보면 △최고책임자 이후락(중앙정보부장) △한국 내 지휘 감독 김치열(중정차장), 이철희(중정차장보) △일본 내 총지휘 김재권(주일공사) △실행그룹 윤진원(공작 1단장), 윤영로(주일 대사관 참사관), 김동운(1등 서기관), 유춘국(2등 서기관), 홍성채(1등 서기관), 백철현(1등 서기관), 유영복(요코하마 총영사관 부영사) 등이 등장합니다.
1993년 9월 한국의 민주당 진상조사위와 일본 측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도 납치사건 관련자 12명 명단에, 김재권 당시 주일공사는 ‘총책지령’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행적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회고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워커힐 총지배인으로 있던 김재권씨를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간 사람이 김형욱 정보부장이고, 납치사건의 전모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회고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김형욱씨는 김재권씨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는 김재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박정희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지 않으면 납치사건을 공개하겠다’고 편지를 보내라. 김재권이 편지를 보냈고, 돈을 받은 후 김재권은 나를 찾지 않았다. 그는 주인을 할퀴고 가는 고양이 같은 위인이다.”
김형욱씨는 왜 김재권씨에 대해 이처럼 혹평을 했을까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미 CIA의 한국과 일본 책임자는, 훗날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그래그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 CIA와 그래그는 납치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납치사실을 알게 된 건 김재권씨의 배신 때문이란 게 김형욱씨 판단입니다.
즉 김대중 납치 살해계획이 실패하자 김재권씨는 곧바로 그래그에게 공작 전모를 실토하고선 제 살 길을 찾았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납치공작 총책을 맡았던 사람이, 공작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기대어 탈출구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결국 김형욱씨 회고에 따르면, 김재권씨는 납치사건 총책도 했다가, 작전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밀고도 했다가, 나중엔 그 공작을 갖고 한국과 거래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가까지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니, 혹평을 들을 만도 합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총책이자 성 김 대사 부친인 김재권씨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박정희 군사독재가 반대파 야당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국가기관을 앞세워 저지른 극악무도한 정치테러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실은 2007년, 중앙정보부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서도 확인됐습니다. 다만 납치의 최종 목표가 살해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이 사건의 종착지는 ‘김대중 암살’ 혹은 ‘김대중 실종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자들 견해입니다.
새삼 이 사건을 돌아보는 이유는, 새로 부임하는 주한 미국대사의 가족사를 들춰내 당사자에게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역사의 기이한 인연이 놀랍고 한국의 처지가 왠지 초라해 보여, 이면사를 소개할 따름입니다. 그의 부친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역사 앞에 고해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작고(1994년 6월)한 상황에서 굳이 부자를 연관 지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감정적으로야 ‘미국이 한국을 뭐로 보고 그런 인사를 보내느냐’고 불편해 하며 우리 정부에 아그레망 거부라도 촉구할 수 있겠지요. 만일 과거 미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사람의 아들이 한국으로 귀화했다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한다면 아그레망은커녕 미국 입국이나 가능했겠느냐며 불쾌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현재 미국 국적의 미국인인 그에게 한국 국적이었던 부친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더구나 박근혜 의원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숱한 살인과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한국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습니다. 과거사를 놓고 어떤 자격, 무슨 낯으로,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의 부친의 과거 행적에 대해 씁쓸한 것은 한국민들의 감정일 뿐이고, 미국과 그가 문제의 납치사건에 대해 얽매일 이유도 없겠지요.
다만 우리 언론이나 국민들이 성 김 대사의 부임을 보는 시각이 줏대 있고 지혜롭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초 한국계 대사” 따위의 막연한 혈연적-감성적 보도는 순진한 접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부친이 누구든 무슨 일을 했든, 그는 이제 미국인입니다. 철저히 미합중국 연방정부 훈령에 따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러 올 뿐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대립될 때 무조건 미국 이익을 위해 일 할 미국 외교관일 뿐입니다.
외교적 친근감까지는 모르겠으되, 단순히 한국계 출신이라고 반기고 좋아하는 것은 줏대 없는 아전인수나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그늘이 잔뜩 몰린 한 지점에 그는 서 있습니다.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넘어갈려니 찜찜한 문턱에 그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최초 한국계 대사” 운운의 소갈머리없는 보도나 태도는, 우리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素花2010.05.09 06:37 |
KT공작의 내용은 김대중에 대한 '유괴, 납치, 살해'일 것이다. 73년 여름,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김재권을 만났다. 일본에서의 안부를 묻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는 납치, 유괴, 살인이 가능하다." 당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를 배웅하던 중 호텔복도에서 우연히 그레그 주한 미국공사를 만나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불과 몇일 후, 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설마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김재권은 사건 현장 어딘가에서 떨고 있었을지 모른다. 여자같은 그가 사람을 유괴해서 납치, 살인까지 하려고 했으니...
당시, 미국 CIA 한국, 일본 책임자 그레그공사와 KCIA 주일공사 김재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김대중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그레그는 서울에 있었다.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사건이 일어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그가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김대중 납치 소식을 듣고 다급히 찾은 것은 다름아닌 김재권이었다. 김대중 살해계획이 실패하자, 유약한 김재권이 실토를 하면서 제 살길을 찾은 것이다.
그레그로서는 자신에게 찾아온 무능하고 난처한 입장에서 탈피하는 결정적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김재권은 조직을 배신한 것이다. 이와함께 이후락은 모든 것을 잃었다. 후일, 주한 미국대사로 승진한 그레그가 김재권에게 얼마나 고마워 했을지는, 지금 미국 국무부에서 북핵 특사가 된 성김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사로 임명된 그레그는 성김을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과에 근무하도록 하였다. 성김은 김재권의 첩이 낳은 자식이다.
한편,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으로서는 죽는 날까지 한가지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하비브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한 그 시점에, 어떻게 박대통령에게 미국대사는 KT공작의 구체적 사실을 적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 사실이라 함은 도쿄의 호텔에서 김대중이 KCIA 요원들에게 납치 되었고, 현재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김대중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김재권은 늘 말했다. "이후락부장은 정말 두뇌가 컴퓨터같은 사람"이라고.. 그런 이후락이 죽는 순간까지 풀지 못한 것은 김재권의 배신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김재권을 믿었고, 김재권은 모두를 속였다.
김재권, 무어라 말을 해야 하나?
김재권은 이십대부터 축첩을 하고 이중생활을 하며 살았다. 본부인은 결국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본부인과의 사이에 자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는 무관하게 살고 있다. 김재권이 56년 KNA 납북사건으로 북한에서 송환되어 오던 날, 사생아를 안은 첩이 마중을 나가는 웃지못할 상황도 있었지만 공무원 축첩 금지시대에도 수단이 좋았는지 영관 군인으로 별탈 없이 살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서울대를 졸업한 것으로 알지만,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사실이 없다. 파란만장했던 생을 접고, 김재권은 94년 6월 미국에서 사망했다. 납치 대가라고 해야 할 그의 재산은 첩이 낳은 자식들인 성김(한국명 김성용1960년)과 그의 형 김준용(1954년)이 자신들의 명의로 만들었다.
성김은, 북핵특사라는 염치없는 자리 미국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 만약, 한국이 미국 대통령 암살범이나 9.11 테러범의 자식을 북핵특사로 임명한다면, 미국이 우리에게 그 사람 부적격자라고 하지 않겠나?
미국만 나라가 아니다. 한국도 엄연히 한 국가다. 미국이, 한국 대통령 납치범의 자식을 북핵특사로 임명한 것은 지금이라도 철회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미국이나, 한국정부도 내막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긴 일이다.
사진은 김대중 납치사건 책임자 김기완(일명 김재권)이다.
[보도자료]한.미, 6자회담 재개 여건조성 노력키로(종합)
연합뉴스|입력 2010.09.04 06:15|수정 2010.09.04 11:13
위성락 "현재로서는 6자회담 일러..北 책임있는 태도 선행돼야"
(워싱턴=연합뉴스) 황재훈 특파원 = 한국과 미국은 3일 북한에 대한 제재와 대화라는 `투트랙' 접근법을 유지하는 가운데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에 노력키로 했다.
미국을 방문중인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이날 제임스 스타인버그 국무부 부장관,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성 김 북핵특사 등과 잇따라 면담하고 북한문제를 협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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