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선생이 92세인 1984년에 쓴 글씨 8폭과 염재(念齋)송태회(宋泰會)선생의 그림2폭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3. 29. 07:50
반응형

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선생이 92세인 1984년에 쓴 글씨 8폭과  염재(念齋)송태회(宋泰會)선생의 그림2폭
합10폭 병풍.
<크기> 31.5 x 126.0cm 

<참고>지운(遲耘)김철수(金錣洙)
1893년(고종 30)∼1986년. 공산주의운동가. 전라북도 부안 출신. 이명은 동재(銅再)·초봉(初峯)·창률(昌律)·창근(昌根). 동경에 유학중이던 1915년 가을 반제(反帝) 운동단체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는 등 청년시절부터 반일적인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1920년 가을 일제를 몰아낸 다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최팔용(崔八鏞), 이봉수(李鳳洙)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으로 1930년에 붙잡혀 8년8개월 수감한 그는 194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가 해방을 맞아서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했다. 당시 항소를 하자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김철수는 허백련, 오지호 등 지역의 예술인과도 교류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와 남한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 부안 백산면 대수리 한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토담집은 그의 생애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논밭, 뒤로는 소나무숲이 이어진 토담집은 김철수가 1968년 손수 지은 것이다. 그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지었다.

 

송태회(宋泰會)
1872년(고종 9)∼1941년. 일제강점기 기자·학교 설립자·항일운동가·서예가. 자 평숙(平叔). 호 염재(念齋)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생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시에 합격하고, 1900년(광무 4)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년(광무 5)부터 중국에서 유학하였고, 1908년(융희 2)에는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918년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에게 사사 받았고, 사군자와 서예를 잘하였다. 그의 그림첩인 《염재송태회서첩(念齋宋泰會書帖)》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