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여행스케치

애국지사 이대위 (Daniel Lee)선생과 유일한 혈육 손자 이단 (Don Lee) /2010.02.02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11. 6.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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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전 Land Banking (투자자를 모아 투자가치가 있는 땅을 대신 사주는 사업투자자모임을 중국 미국 친구가 초대를 했습니다 투자설명회는 자신의 절친한 중국친구가 host 되어  친구집에서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미 미국 이곳 저곳에 택지를 사는 재미가 붙은지라 관심을 가지고 참가를 했습니다사실 급한 볼일이 있어 몇시간 늦어진다는 양해를 했는데도 흔쾌히 환영을합니다.

 

이스트 베이쪽에 있는 Don Lee의 집입니다. 

 

덤발톤 브리지를 건너 이스트 배이에 있는 그집에 찾아갔더니 부동산 투자모임에서자주 보았던 얼굴들이 여럿 눈에 띕니다초대한 중국인 친구가 집주인인 자신의 친구를 소개를 합니다이름이 Don Lee라는 군요 자신의 절반이 한국인라는 군요.

 

기것 20명정도 모은것 같은데 투자유치는 못한 모양입니다.

 

택사스에 근거를  Land Banking 회사에 컴미션을 받고 투자자를 모으는 일을 하는모양입니다저는 이미 Pro 경지에 이르러 투자회사를 통하지 않고 좋은 땅들을 좋은 가격에 사는 지라  예리한 질문에 절절 맵니다.

 

Don 과 Linda 사이에 아이는 없고 강아지 2마리만 있더군요.

 

결국  투자설명회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하지만 집주인인 Don Lee 절반이 한국인이라는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결국 점심식사까지 하며 Don Lee  하나의친구로 만들수 밖에는 없는 사연이 시작되었습니다더욱이 나이도 비슷하더군요.



Don Lee와 함께

 

Daniel Lee 할아버지 라는 군요그러면서 자신은 읽은 수는 없지만 주섬 주섬 한인신문과 한국책들을 꺼내보입니다할아버지가 감리교회목사여서 감리교회에서 아주소상하게 이친구의 할아버지 사연을 소개하였더군요.

 

이대위 선생과 Don Lee가 판박이 입니다.

 

이대위 (Daniel Lee) 선생, 1878년에 평양 근처에서 출생하고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1903 25살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와서 도산 안창호 선생등과 친목회를 조직합니다.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운동도 시작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을 만든 이대위 선생

 

이어 1906년말에는 한인감리교회를 만들어 한인을 위한 여러가지일을 본격적으로시작합니다그러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등과 함께 30살의 나이인 1908년에 오리건주에 있는 포클랜드 아카데미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곤 1908 한인 최초로 UC 버클리 사회학과에 입학을 합니다 길긴 하지만8년뒤 1916 38살의 나이에 학사 졸업을 합니다.  1911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 입학도 하고 감리교 집사도 됩니다 대도라는 감리교회 한글 주보도 만들고 1912년에는 한인감리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됩니다.


1918년 4월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0월10일에는 미국 남감리교회 감독 엘더 목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1915년에는 한글주보 발행을 위해 인터타입 한글식지기라는 한글 활자도 발명을 합니다한 아주 의미있는 일은 일본이 장악하던 주권을 잃은 한인들의 외교권을 행사했다는 겁니다.

 

미국으로 망명하는 독립지사들과 유학생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이민국수속을 대행하며 망명정부의 대사관 내지는 영사관의 업무를 수행한 거지요그당시 유학생들의 신원보증과 재정보증을 서고 건강보증까지 했다는 군요.

 

재미 한인들을 대변하려던 주미일본공사에 대항하여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내 한인의 지위도 보장받았다는 군요결국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1928 6월 49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묘지에 묻힐때까지 일본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미국내 한인들은 이대위 선생의 신세를 젔다는 이야기 입니다.

 

실제 확인된 서류만 하여도 김규식등 500여 유학생과 70여명의 사진결혼 신부들의 영사업무를 보았습니다.

 

신문보도 내용중엔 1995년 한국정부로 부터 독립훈장 애국장을 받았다는 내용과2005 10 17 한국 국립묘지 이장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묘지에서 이대위 애국지사의 천장행사가 진행되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지금은 대전의 애국지사 묘지로 이장했다는 군요.

 

이대위 선생과 이대안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을 3 두셨다는 군요그중 한분이  이름과 같은 Sam Lee라는 분인데 중국계 부인과 사이에 바로 Don Lee 낳았답니다. Don Lee 2살때 이혼을 하고 어렵게 살았다는군요.

 

감리교회사에 나오는 주보내용을 통해서 부인 이대안 여사의 성함과 Don Lee 아버지인 사무엘 (Sam Lee) 이름이 등장합니다하지만 다른  아드님의 내용이나 이대위 선생의 가족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출생신고서상으로 후일 한인사회가 이대위 선생의 한국천장을 위한 파묘서류에 후손동의가 필요하여 유일한 후손인 Don Lee 수소문 하였답니다아쉽게도 Don Lee 이대위 선생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군요 아쉽게도 Don Lee 대만계 부인 Linda사이엔 자식이 없습니다.

 

Don Lee,  친구는 자신의 할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부모나 친척에 대한 한치의 기억도 없다는 군요.

 

먹고 살기위해 16살의 나이에 18살이라고 속이고  육군에 입대해야 했던 Don Lee. 친구는 50줄의 나이에도 어느 택사스 시골 Land Banking 회사의 브로커로 저와 만나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인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중국계 미국인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Don Lee의 부인 Linda와 함께

 

저와 나이가 동갑인 부인 Linda 젊은 시절 대만에서 여성 바디빌더로 날렸노라고남편인 Don Lee 사연에 빠져있는 제게 경쟁적으로 자신의 젊은시절 아름다웠던 바디빌더의 모습을 빛바랜 앨범을 들추어 보이며 자랑을 합니다.

 

지금 저는 담담하게 Don Lee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하지만 사실은 가슴이 미어지듯 통곡하는 심정으로 Don Lee 이야기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잘산다는 미국에서 조차 대가 끊기고.

 

  유일한 손자는 자신의 조부가 한국민족을 위해 어떤일을 한분이었는지 조차 너절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Linda의 젊은 시절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80년대 대만에서 잘 나가던 육체미의 여인 이었군요.

 

 

 

발췌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5774&page=14&s=&o=&k= "


망국의 설움 달랜 국민회


미주 초기 이민자들은 망국의 설움을 안고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애국단체인 공립협회가 나중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면서 을사보호조약 폐기운동, 국권회복 및 동포의 안녕과 복리신장을 목적으로 미주에서 최초의 한인 연합체가 됐다.

국민회는 신한민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당시 미국, 멕시코, 중국,유럽 및 러시아 등지의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애국심 고취시켰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아침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빌딩에서는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바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더함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는 조국의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때 미주에서의 최초의 항일의거였다. 이 같은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의거는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이어졌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미주 땅에서 ‘임시정부’ 역할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신임을 획득했다. 


1913년 남가주 지방 헤밑(Hemit)의 미국인 농장에 한인 11명이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중 일본인 노동자로 오해를 받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축출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영사는 추방당한 한인을 심방하고 “이 사건을 미국 정부에 교섭해 배상을 받아 주겠다”며 간섭하려하자 한인 노동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국민회가 나서 현지 주민들과 교섭을 진행서 협상을 마무리했고 국민회 총회장 이대위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미국정부에 발송해 한인과 일본인간의 대우를 달리 해줄 것을 요구한 일이다. 다음은 당시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이 보낸 전보의 전문이다.


“상항 발 전보” 


수신: 미국정부 국무장관 Bryan귀하

<근일 한인 11명이 Hemit지방에 일하러 갔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축출 당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본영사가 간섭하려고 하나 우리가 일본관리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귀국의 법률 밑에 사는 한인들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니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 사회에 교섭하기 바랍니다. 1913년 6월 30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이대위 >


이에 미국무부에서 윌리엄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아래와 같은 회신을 보내왔다.


“미국 국무성 성명”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 말하기를 재미 한인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 합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하니 이제부터 재미한인에게 관계되는 일은 공이나 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말고 한인 사회를 통하여 교섭 할 것이다. 

1913년 7월 13일 미국 국무장관 William J. Bryan >


미 국무장관의 성명으로 인해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에서 재미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많은 우국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망명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으로 입국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한인들도 대한인국민회가 중심하여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대한인국민회는 조국이 독립된 1945년까지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독립 후 미주한인사회는 1948년 선포된 신생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에는 미주 한인들이 원동력이 될 정도로 인적자원의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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