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여행스케치

애국지사 이대위 (Daniel Lee)선생과 그분의 아드님 이사무엘 (Samuel Lee)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11. 6.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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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장의 사진 - 날잡아 오마이뉴스 기사로 올려볼까 하다가 세월만 흘르고 있는 사진입니다. 모아둔 자료 정리도 못하고 ... 이곳에 대충의 이야기나 올려서 잊지는 말고자 합니다. 끝까지 읽어 주시길 바라구요.]



사진의 주인공은 저와 미국식 이름이 동일한 Samuel Lee 라는 분입니다. 독립지사 이대위 선생의 자제분들 중에 유일하게 그 존재가 확인된 분이지요. 그러니까 이대위 선생의 손자, Samuel Lee 선생의 아드님이 중국인인줄 알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사귄 친구(Don Lee)입니다.  


이대위 선생 이야기를 좀 하면,


지난 2005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지사 묘역에 유해가 송환되어 안장된 이대위 라는 분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미주 독립운동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만든 분이지요. 


이대위 선생은 1879년에 평양근처 강서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숭실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유학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03년이었고, 안창호 선생등과 함께 그해 9월에 친목회를 만들어 한인사회의 친목과 단합에 힘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운동을 위한 공립협회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답니다.


1906년 12월6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하여 선교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하였고, 그해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양주삼 전도사를 초빙하여 한인들을 위한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에도 전념하였답니다.


그덕에 늦게서야 1908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미국고등학교과정을 졸업하고 6월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한인으로는 최초로 UC 버클리에 입학했습니다.


1909년 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에 많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총회장 황사용과 함께 국민회 기초를 다지기도 했지요.


한일합방이 되자 그해 7월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일본 왕에게 강력한 합병 반대서한을 발송했습니다. 각 지방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하고 필요한 재원 마련에 힘쓰기도 했구요.


1911년 2월, 윤병구 전도사 후임으로 상항 감리교회 3대 단임으로 취임했을 때가 이대위 선생의 나이 32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을 한 교회에서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의 한인교회 설립과 발전을 이끌어 미국남감리교회 안에 한인교회 지방회가 조직되게도 했답니다.


상항감리교회의 주보 ‘대도’를 통하여 복음전도 뿐 아니라 교양, 본국과 세계각국의 정세를 알렸구요. ‘대도’는 미주이민 백년사 집필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대위 선생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조선이 망한후 독자적 영사업무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미국으로 망명하는 애국지사와 유학생들을 위한 신원보증을 서주기도 하고 이민국 수속을 위해 도와주고 통역도 자처했습니다. 그분의 독자적 외교활동 덕분에 미주 한인들은 미주일본인들과 구별될수 있었고 2차대전 당시 미주일본인들을 분리 감금한 일본인 수용소에 집단 수용되지 않는 혜택을 입었답니다.


이대위 선생은 1912년에 안수집사(Deacon)를 받았으며 1913년 5월14일 한인 최초로 UC 버클리를 졸업, 사회학 학사를 받았습니다.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임을 위임받았고,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나라 잃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 역할을 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으로 세차례나 선출되었습니다.


국민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인가 받게하고 <신한민보>를 복간하여 주필이 되었습니다.


1918년 4월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0월10일에는 미국 남감리교회 감독 엘더 목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한인 유학생들의 이민국서류를 보면 도착지가 샌프란시스코 1053 Oak st. David Lee (이대위 목사)로 되어있었습니다. 이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학생들의 지참금 100불과 한달 50불의 재정지원도 이대위 선생이 거두어 마련해 주었습니다.


질병으로 입국이 거부된 경우에는 50불과 편지를 보내 병원치료를 받게 하고 입국청원서를 보내기도 했구요.


또 한가지 이대위 선생의 위대한 업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15년 3월에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신문 활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 식자기는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 식자기는 LA에 있는 국민회관내 미주한인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회장으로 대한독립선언,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1921년에는 김규식, 송헌주와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와 독립선전활동에 전심 전력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통역을 맡았으며 국민회총회장으로 여권도 없이 미국으로 오는 사진신부들의 신원보증과 이민수속 대변인, 거기다가 주례까지 맡았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한인 유학생은 500여명, 사진신부도 70여명이었습니다. 아무튼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한인은 일본인 행세를 하는 자 말고는 없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성격이 강인하고 결심하면 꼭 실행했으며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교회의 새 건물이 세워지기 2년전인 1928년 6월17일,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49세에 별세하였습니다.


그분이 샌프란시스코 인근 사이프러스 묘지에 묻힐 때 미주 한인들은 물론 멕시코, 하와이 한인들도 몹시 슬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구요. 2005년에서야 샌프란시스코 지역 전직 한인회장들의 모임인 한우회가 주축이 되어 이대위 지사 천장위원회(위원장 문충한)를 구성하고 10월1일에는 사이프러스 묘지에서 파묘 및 화장예식을 갖고 본국의 국립묘지로 봉환했습니다.


이대위 선생의 천장이 2005년까지 미루어진 이유는 사이프러스 묘지에서 파묘를 위해 후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그 후손인 Dan Lee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제 친구인 Don Lee는 자신이 중국인 인줄 알고 여지것 살아 왔다고 합니다. 그의 부친인 사진속의 인물 Samuel Lee도 부친인줄을 그 분이 돌아가시며 남긴 집한체를 상속 받으며 알게 되었다는 군요. 부모가 Don Lee 2살때 이혼 하면서 중국인 엄마손에 샌프란시스코 중국아이로 키워진 Don Lee 에게는 Samuel Lee가 그저 주말마다 찾아와 놀아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마음좋은 목공소에서 일하는 아저씨로만 알았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미국에서도 여실하게 그 실체를 보여주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애석하게도 대만 부인과 살고있는 Don Lee 에게는 후손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대위 선생은 미주 한인사회 전체를 이끌어간 재미 민족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민족목회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미주 한인들로서는 어느 지도자보다도 소중했던 그분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소홀하고 미흡함이 안타깝지요.


관련글: 애국지사 이대위 (Daniel Lee)선생과 유일한 혈육 손자 이단 (Don Lee) /2010.02.02 

http://blog.daum.net/enature/1585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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