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천명이 되니 진짜 50Km/H로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마다 12월이면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에 또 다시 희망을 꿈꾸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더욱 그런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미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문득 625 전쟁간 북진했던 연합군이 후퇴할 때 당시 미 해병대 지휘관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미 해병대에게 후퇴는 없다. 지금 상황은 후퇴가 아니라 또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이다.”
이 말을 되새기며 이제 또 다시 후반전을 힘차게 나아가자고 다짐해보며 여지껏 느낀 삶의 소감을 정리해서 올려본다. 우리 친구들과 또 한번 멋진 후반전을 함께 해나가자는 의미에서. ^^
12월중에 대략 5개의 주제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짝이란 제목을 선정한 이유는 얼마 전 모임에서 몇몇 친구들로부터 듣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자신들이 해보지 않은 선택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한 것 같아서 이다.
어릴 적은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랐지만 이제는 짝의 엄청난 영향력 하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가.
내게 맞는 짝은
초딩 5년 때 어머니가 떠나신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 고딩 1년 때엔 집이 넘어가 버렸다.
그 후 졸업 때 까지 11번을 옮겨 다니며 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수학여행은 간다는 얘기도 못했고, 소풍 때는 맨손으로 다니다가 고2때 음주 졸도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가정형편상 본의 아니게 군관학교를 지원하게 되어 입학한 이후로 그전보다 훨씬 잘 먹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40세에 싱글이 되신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홀로 어렵게 지내다 떠나셨다.
그런 가정상황 때문인지, 아님 어머니를 너무 그리워해서 인지 생도시절 미팅을 많이도 했다. 한 20번 정도. 그러다 3학년 때, 당시 서울의 D여대 약학과 전액 장학생이었던 1학년과 첫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4학년 중반까지 한참 사랑이 무르익어갈 즈음에 임관을 앞두고 있던 본인이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당시 518 탓인지 본가가 전주인 그녀는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녀는 2남2녀의 셋째였는데 나처럼 그녀도 집안의 기둥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사랑의 상처를 추스를 즈음, 휴가 때 교외로 가는 길에 서울의 K대 병설 보건전문대학을 나와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임관하여 부임지로 가기 전에 사귀자고 정식 제의를 하며 그동안 첫사랑의 상처 때문에 늦게 말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한 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부임지에서 떡 싸들고 면회와주는 모습을 보고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년을 사귀는 동안 그간의 내 모든 삶을 다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빨리 결혼하려는 막내아들을 말리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렸었다. 아버지께서 나중에 골라주시는 여자가 현재 내가 선택한 여자 보다 낫다고 평생 장담하실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아버지께서는 내가 임관 후 2년이 지났을 때, 형이 결혼을 하자 누나를 제치고 결혼하라 하셨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전부 복학생들이어서 함 팔 때는 12명
씩이나 왔었다.
그러나 100억대 부잣집 맏딸과 사업실패로 어렵게 지내는 편부의 막내아들의 부부로서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결혼 당시 서민의 아들은 옥탑방 단칸방에서 월세로 시작하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반드시 친정아버지가 해주신 33평 아파트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8세에 부천의 공수부대에 근무할 시절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아파트에 살게 되었으나 그때 본인은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그래선지 내 혈족들이나 몇몇 친구들 조차 내가 데릴사위가 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흘러 국방부에 근무하게 되어 신길동의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면서 나는 엄청난 향수 열병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홀로 노량진에 계신 아버지를 자주 뵐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침 일사회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홀 시아버지를 모실 며느리는 없었기에 마음 속 으로는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그래서 마침내 진급을 앞 둔 중요한 시기에 홀로 집을 나와 아버지 곁으로 가서 1년을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2년간 지방으로 떠나있을 즈음에 아버지가 떠나셨다. 내게 말도 없이. 그러자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뵀을 때 아버지께서‘너 같은 아들은 세상에 둘도 없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눈물이 샘 솟듯 흘렀다.
그 후 2년 뒤에 K대 의대에 시신 기증을 하신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 어머니 산소에 납골묘로 모시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가족간의 갈등이 발생했는데 끝내는 수준 낮은 찌질이 삼남매와 동서는 앞으로 더 이상 얼굴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당시에는 본인도 헷갈려 형제를 한 동안 안 보게 되었다. 그러다 외아들이 제대해서는 다시 입시공부 하기 보다는 다니던 D대 천안분교 야간대학을 그냥 다니겠다고 하여 더 이상의 미련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그 후 1년 반 동안의 돌싱 생활을 하던 중 3년여를 앞당겨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서 빨리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1년쯤 지났을 때 아들 녀석이 전화해서는‘아버지 사랑합니다.’해서 눈물이 났다. 얼마 뒤에는 내게 들렀다가 가면서 애비를 안아주고 가는 녀석을 보며 그래도 제대하니 어른이 되기는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그러다 전역을 얼마 앞둔 작년 4월에 또 모자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녀석이 또 집을 나가있는 것 같았다. 그래선지 당시 내게는 당분간 못 올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역을 하던 그날 내 주변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당시 내게 찾아와준 친구가 2명 있어서 그들과 함께 31년간의 군생활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특히 그날 내 집 앞까지 차를 끌고 와서 부모님 묘역까지 태워주며 함께 했던 친구의 마음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인생의 큰 변화시기에 심심풀이로 가입한 결혼 정보회사에서 나를 만나러 달려왔다.
62년생이었던 여성 커플매니저는 내 얘기를 듣더니 재혼 조건이 최상위급 이라고 말해주며 가입하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그런 좋은 조건에 있는 분이 왜 이렇게 혼자서 힘들게 사냐고.
지독한 허무함에 빠져있던 때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한번 경험해 보았으니 내게 맞는 짝의 조건을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매니저는 자기가 관리하는 회원들 중에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300만원을 내고 한달 내에 다섯 차례 미팅을 주선하라고 했다.
그때 내가 제시한 내게 맞는 짝의 조건은 이러했다.
‘키 크면 안 되고 돈 많으면 안 됨. 나이 1960~65년생, 고졸이상, 모성/자식 有, 가급적 조실부모+서울 출신’
그랬더니 1주일 후 첫 미팅 연락이 왔다. 만나보니 내가 요구한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처음에 커피숍에서 그간의 내 삶을 2H동안 얘기했더니 그녀는 관심을 갖고 들어주다가‘어제 생일이라 과음했다’는 내말에 해장국 먹으러 나가자고 하는 말을 해주어 고마웠다.
그래서 어릴 적 살았던 집터 주위를 함께 거닐게 되었는데 내가 홀로 살고 있었던 숙소 앞에서 그녀가 갑자기‘저 서울여상 나왔는데요.’하는 것이었다. 당시 술이 덜 깬 채로 나는 내가 어릴 적 공부 잘했던 누나 얘기를 하다가 그 학교를 갔어야 했다는 얘기를 했단다. 그래서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순간 허름한 내 숙소로 안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또 두어시간 얘기하는데 어린 소녀처럼 재밌게 내 어릴 적 삶을 듣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저녁 먹으러 나가는데 그녀가 금새 먹던 찻잔을 닦아놓은 것을 보고 나와 정서가 통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꼭 내 첫사랑 여인처럼. 그때 그녀도 러시아과 동기생들과 9쌍이 되어 MT를 갔을 때 무지한 생도들이 설거지 도구를 준비하지 않아 아무도 설거지 할 생각을 않고 있는데 홀로 개울에 가서 나뭇잎 등으로 그릇을 닦는 모습을 보고 뿅 갔던 것이었다.
그날 내 숙소를 나와서 나는 큰누님(65세)으로 삼았던 단골 민속주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 가면서 전날 내 생일 파티를 그곳에서 했다고 하니까 그녀는 다음날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떠나신 아버지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핸폰 끝번호가 5358(내생일 5.3,당신 5.8) 이었는데 그녀의 생일이 5.5 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그곳에서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내 친 누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면서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이 여자가 내 짝이 맞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밤10시가 넘은 시간에 나는 그날 마지막 제안을 했다. 오랜 단골이었던 빈센트 라이브카페에 가자고.
그리로 옮겨서 나는 내 어설픈 기타반주에 노래를 불렀고 이어서 쥔장의 화려한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처음 함께 한 자리여서 어색해 했던 그녀가 그날 그 가게에 들른 30대 친구가 무대에 올라가 김광석 노래를 멋지게 부르자 마치 어린 소녀처럼 신이 나서 사진 찍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서 나와 정서가 딱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에는 그녀에게 한곡 부르라고 청했더니 그녀는‘어제 내린 비’를 정갈하게 불렀던 겄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사랑의 비야~ 내려다오~’
그날 밤 12시가 넘어 그녀를 귀가시키던 택시 안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신고 하겠다고.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두어시간 한 뒤 부부로 살겠다고 답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1주일 후 순진한 돌싱들은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한동안 보지 않았던 내 형제들을 찾아가 그간의 앙금을 풀며 내 재혼계획을 알렸다.
혼인신고를 하던 날, 가장 신경쓰였던 아들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녀석이 바로 답장을 해주었다. 축하드리고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이어서 전역할 때 함께 했던 친구 2명과 함께 회기역 부근에서 조촐한 피로연을 했다.
그렇게 정신적 일란성 쌍둥이 같은 그녀와 난 부부가 되어 내 고향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 돌싱 경험담
ㅇ 부잣집 맏딸과 이혼하고 나니 이혼 당한 것으로 간주 당함
ㅇ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하자고 하면 다주고 나와야 함
ㅇ 돌싱 모임에 가보니 주된 이혼사유는 가치관/집안 정서 였음.(이성문제는 별로 안 됨)
ㅇ 이혼 하자고 한 쪽은 미련 없이 좋은 상대 있으면 재혼 함
● 내게 맞는 짝을 만나 살아보니
ㅇ 부모로부터 받은 정서가 맞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음
- 조실부모 했으나 부모님의 사랑/은혜를 감사하는 마음, 서로 의지하는 관계
- 내 가치관과 가고자 하는 삶을 존중함, 나를 만난 것과 나의 사랑을 고맙게 생각함
- 거짓말을 못하고 거짓말을 해도 곧이 믿으니 거짓말을 할 수 없음
- 서울식 서민 음식을 잘하여 입맛에 맞음
ㅇ 형제 관계 : 아랫사람 도리를 하려는 아내로 인해 형제들이 나의 진심을 이해
ㅇ 친구관계 : 내 마음처럼 소중하게 생각함
- 친구들이 집에 찾아 왔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한상 차려 줌
- 장훈고 총 동문회 때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보러 들름
- 친구 부인이 아플 때 먼저 병문안 가보자고 말해 줌
ㅇ 주변 사람들 반응
- 형제 : 좋은 사람 만났다며 꺾였다가 다시 잘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함
- 친구 : 내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함
● 맺음 말
ㅇ 자식이 있는데 헤어지면 너무나 가슴이 아픔
ㅇ 그러나 살면서 괴로울 거면 각자의 삶을 사는 것도 한 방법 일 듯
ㅇ 그렇지만 자식의 미래에 부담을 주거나 자신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야
(부모의 이혼과 재혼이 자식들에게 해가 되어서는 행복해지기 어려움)
ㅇ 초혼이건 재혼이건 부부간에 믿음, 존중,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행복하리라 생각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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