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스크랩] 우정을 보여준 주례선생님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1. 4.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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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보여준 주례선생님

 

인간은 결혼을 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한다 하겠다. 그러나 유교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네 삶은 아직까지도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고 사는 지도 모른다. 아직 살아계시거나 떠나셨거나 간에 어쩌면 우리들이 그리 살아가는 마지막 세대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 또한 5년 전에 부친 마저 떠나신 후로 환골탈태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보지만 온전히 거듭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부친의 한 절친한 친구 분의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그래선지 세월이 흐를수록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83년도에 그분을 찾아가서 보고 느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86년도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었던 사람은 아버지의 고교 동창이었다. 그는 대학교 체육과를 나와 당시 30 여년 간 지방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많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세 아들을 키우는 가장이었는데도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부부가 상의하여 두 번을 도와주었고, 그 후에도 자신의 아내가 모르게 한번을 더 도와주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본인은 생도 4학년 때인 83년 9월에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했던 친구의 우정을 보여준 그를 찾아 갔었다.

 

소년이 도착하자 그 부부가 반가워하며 자기 자식들에게 소개를 하니 그들의 자식들은 처음 본 소년을 마치 형제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다들 출근하고 아주머니와 단둘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소년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빌렸던 돈을 그때까지 갚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아주머니에게 초딩 5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 10여년 동안 변변한 일자리 없이 살아온 아버지가 답답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녀는 소년에게 눈을 흘기면서 ‘부모가 어떠할지라도 자식은 부모에 대해 자신들을 있게 해준 것 만으로도 무조건 부모에게 고마워해야한다’ 고 교육을 한참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소년은 겉으로는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속으로는 기쁘고도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그 집을 나서면서 아주머니께 차비를 받지 않을 생각으로 그녀가 아침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떠난다고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대문을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소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 봤더니, 그녀가 성급히 맨발로 뛰어나와 대문에 서서는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소년이 그녀에게 다가갔더니 웃는 얼굴로 ‘어른에게 인사도 안하고 가려고 했느냐’ 하며 소년의 손에 차비를 쥐어주는 것이었다. 소년이 괜찮다고 하며 안 받으려고 했더니 ‘너의 엄마를 대신해서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 고 하여 소년은 애초 자신의 계획과 달리 차비를 받아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집을 다녀오고서 소년은 친구의 아들을 그리 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해준 그 아저씨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진정한 친구가 누군지 알게 되었고,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 하고 지냈던 아버지에게 그런 친구가 있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후 3년이 지나 소년은 그들의 따뜻한 모습을 기억하며 자신의 결혼식 때 그 아저씨에게 주례를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년이 아버지에게 그런 생각을 전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지만 평교사로 있는 그보다 좀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없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에게 그가 아니면 주례 없이 식을 진행하겠다고 고집했더니 아버지는 소년에게 고맙다고 하며 그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준비를 하며 소년은 주례선생님이 평교사지만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다 괜찮은 표현을 생각해내서 사회를 보는 친구에게 적어주었다. ‘오늘 주례이신 000선생님은 30여 년간 후진 양성을 위해 교단에서 애쓰시고 계신 분입니다.’ 라고.

그랬는데 나이 50대에 처음 주례를 보게 되었던 그는 겸손하게도, 자신이 주례 볼 자격은 좀 안되지만 신랑의 아버지 친구로서 이 자리에 섰다며 자신은 지방 어디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자신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때 신부 측 하객들은 다소 실망한 듯 했지만 소년은 그렇게 남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현 직업과 직책을 말했던 그 아저씨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 신부의 부친이 소년에게 주례가 마땅치 않았으면 사전에 자신에게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하기에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제일 친한 친구이며 자신이 가장 고마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주저했지만 자신이 고집하여 주례를 서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 그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우리 친구들과도 그런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가려는 강렬한 희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출처 : 장훈고일사회
글쓴이 : 신 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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