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4. ETIC/41_스크랩

[스크랩] 백촌(白村)김문기(金文起)의 충의연구(忠義硏究)[7]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5. 2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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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白村)김문기(金文起)의 충의연구(忠義硏究)

 

7. 사육신의 처리문제


이와 같은 경위(經緯)에 의하여 <육신전>은 사선(私選)되었고 사육신의 오전 문제도 전문의 불확실 때문에 오류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왔던 것을 검안하면 원사육신으로 김문기가 들어가야 함은 전후 분맥이나 사료의 정확성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일부 반대론 자라도 즉각 이 글을 읽어봄으로서 과오를 뉘우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위 <육신전>이 간행되면서 동전은 육신사건에 관한 한 성서같이 절대 성역화적인 완벽한 사료로 인식, 이해도었었다.
따라서 모든 각급 서적에 전재(轉載),인용(引用), 해석(解釋)되었고 역대(歷代)왕(王)과 조신(朝臣)들도 이에 의거하여 육신사건을 논하고 처리하였으며 그 충의적사실을 강조(强調)하였다.

그 뒤 숙종(肅宗) 때도 위 사선인 <육신전>에 의거하여 그 잘못된 기재의 통속적(通俗的)이었던 6 인만이

신원(伸寃)되었고, 육신묘비도 동 <육신전>에 의거하여 기술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문기의 부각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가운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혁혁한 충열적 위훈(偉勳)이 사장(死藏)되어 왔던 것이다.

 

육신 묘에는 육신에 꼽히지 않는 삼운검인 성승과 유응부의 묘가 함께 있었으며 육신중 김문기, 하위지, 유성원의 또 명기에는 안되었지만 삼상(三相) 묘가 없었고 오기(五基)의 묘(墓)만이 존치(存置)하였었는데도 통속적으로 <사육신묘>라 불러왔다.(최근 경향신문에 이모(某)씨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관해 사칠신(死七臣) 운운(云云)한 것은 그가 성승장군의 묘가 그곳에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관찰이었다.)정조때 배식록(配食錄)을 작성한바 있으니(정조어정배식록:正祖御定配食錄)에도 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 김문기를 삼중신(三重臣)이라 명기된 바 없고 또 이들이 동시순절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부산대 이교수는 이들이 동시 순절한 삼중신이며<정조실록>정조 15 년 2월 丙寅조에 이들은 삼중신으로 명기하였다고 허위사실을 유포(流布)하였다.
또 명기는 안되었지만 삼상(三相) 삼중신(三重臣) 양운검(兩雲劒) 사육신의 순서로 볼 때 그렇다고 억지 주장을 정설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순서대로 하면 박중림부터 유성원까지가 사육신이 된다.
동 배식록자체가 왕조실록과 육신전에 대한 비교 검토 분석을 하지 않고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가령 김문기를 삼중신으로 정하였다고 하여도 사료를 정확히 비교 분석하여 원사육신을 밝히는데 어떤 장해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배식록에도 누가 삼중신(三重臣)이고 누가 육신이라고 명기(明記)된 바는 없는 것이다.
이때도 세조실록과 위의 사선기록인 <육신전>을 신중하게 비교검토 분석(分析)함이 없이 위 육신전을 기본으로하여 작성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실록에 지중추원사인 성승을 육신전 대로 그 사망한후 10년에 생긴 도총관(都摠管)으로, 실록에 제학(提學)인 성삼문을 육신전 대로 우승지로,(전부산대 이교수는 성승이 단종손위시 도총관이라고 전시(前示)한 논문집(論文集)에 썼다.
도총관이 그 사후 10 년에 생긴 것이 지적되고 또한 정조어정배식록에 지중추원사인 성승을 사육신전대로 도총관으로, 각기 잘못 기록해 놓은 것을 보더라도 위의 배식록도 왕조실록과 육신전에 대한 깊은 비교 검토 분석없이 육신전을 기본(基本)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지적 당하자,

당혹한 나머지 후일 직제개편(職制改編)으로 지중추원사가 도총관이 되고 동지중추원사가 부총관이 되었다고 거짓말로 선량(善良)한 국민을 현혹(眩惑)시키고 있다.
세조 12 년 1월에 지중추지원사는 지중추부사(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동지중추사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진무(鎭撫)가 부총관으로 개칭 개칭되었을 뿐이지 지중추원사가 도총관이 되거나 동지중추사가 부총관으로 개칭된 일은 없다.)
실록에 사성겸집의(司成兼執義)인 유성원을 육신전대로 사예(司藝)로,유응부를 그 사후(死後) 10 년에 생긴 부총관(副摠官)으로 기술한 점으로도 조선왕실록과 육신전에 대한 충분한 비교검토(比較檢討)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비교 분석 검토가 없고 육신전만 경전(經典)인양 철석같이 믿고 맹신(盲信)하던 때에 잘 모르는 분들이 <백촌 유사집(遺事集)> 등에서 사육신으로 김문기를 안 썼다던지 김문기의 말을 요약(要約)하여 육신과 의(義)가 동일하다고 말하였다고 썼다던지 김씨보(譜)에 김문기가 육신과 더불어 순절하였다고 쓰여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원래의 사육신을 찾아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두는 바이다

출처 : 나의 뿌리
글쓴이 : 팔공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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