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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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3일 Facebook 이야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10. 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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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긴~여정 애쓰셨어요. 마이홈의 안락을 맘껏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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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정말 그래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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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순여섯 번째 이야기-2013년 9월 25일 (수)]

    윤치호 일기의 사료적 가치 (사진: 미국 에모리 대학 유학중의 윤치호)

    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수많은 한국의 근대 인물 중에서 그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장을 지낸 개화ㆍ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아울러 한국 최초의 미국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그런가 하면 3ㆍ1 운동 발발 초기에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을 피력해 물의를 빚었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기독교계의 친일을 주도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등의 고위 간부를 지내며 친일파의 ‘대부’ 역할을 담당했다. 요약하면 그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부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하는 가치판단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근대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2. 윤치호, 영문(英文) 일기를 쓰다

    그런 윤치호에게 거물다운 점이 또 하나 있다. 더러 중단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쓴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을 영문(英文)으로 말이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일상생활과 공인으로서의 활동상황은 물론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또 직접 겪은 많은 사건의 미묘한 정황, 정국의 추이와 민심의 동향, 각종 루머, 많은 지인(知人)들의 인성(人性)ㆍ사상ㆍ행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정보를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그가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이성적이고 정제된 글들에 비해 그의 속내를 더욱더 진솔하게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적잖이 나타나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집필 당시의 관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은폐했을 가능성도 적다. 게다가 그의 속내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모습을 다각도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윤치호는 학벌과 명망과 재력을 두루 갖춘 ‘귀족’이었고 말년에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청교도적인 인간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사치스럽고, 노동을 경시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아내, 자녀, 동생, 친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는 근면, 정직, 성실, 신용, 절약 등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에 옮기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가 몸이 아플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꼬박꼬박 일기를 쓴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기록 정리하고 반성하려는 의미에서였다. 그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 점에 있었다. 일기야말로 그의 분신이자 그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윤치호의 일기는 개인 저작물이라고는 하지만, 사료비판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어느 공적 문헌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3. 윤치호, 일기에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다

    윤치호가 ‘한일합방’ 이후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쓴 일기는 더욱더 귀중하고 유용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일기에는 지식과 명망과 재력을 두루 갖춘 한 원로의 ‘식민지 살이’와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국내외 정세 인식,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에 대한 견해, 제반 독립운동에 대한 판단, 조선의 역사ㆍ문화와 조선인들의 민족성에 대한 인식 등이 진솔하게, 때로는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친일파도 아니면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고수한 ‘회색인’으로서의 ‘독특한’ 내면세계, 아니 어쩌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는 ‘보편적인’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그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파의 ‘대부’가 된 이유, 즉 그에게 부과된 외압과 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자발적 친일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또 일제강점기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는 지식, 명망, 재력을 겸비한 국내 최고의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일제와 민족주의 진영의 ‘희비’가 엇갈릴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항상 일제와 민족주의 진영 양편에서 ‘영입’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총독부 당국과 친일세력, 다른 한편으로는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접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기에는 사회주의 운동세력을 제외한 일제강점기 국내 모든 세력의 동향이 ‘입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또 공적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부한 뒷이야기들과 각종 루머들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친미파로 분류되는 미국 유학 출신의 지식인층이나 기독교계 인사들에게는 백인종, 구체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인들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상당해서 이것이 친일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운동세력과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평안도지방과 서울ㆍ경기지방 사이에 지역감정(지역갈등)이 극심하게 나타났다는 점 등은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고종황제 독살설, 유길준의 을미사변 관련설, 박용만과 옥관빈 밀정설, 1930년대 중반 최남선의 ‘변절’설, 1930년대 중반 여운형의 기호계 결사 추진설, 1930년대 후반 서울지역 기독교계 지도자 신흥우의 파시스트 결사 추진설과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 조작설 등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상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4.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의 내용이 서로 다를 때

    일제강점기의 가장 중요한 공적 자료라 할 수 있는 총독부 자료와 윤치호의 일기 내용에 서로 다른 점이 몇 군데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윤치호는 자치운동 추진단체인 신우회(信友會)와 친일적 농촌운동단체인 중앙진흥회(中央振興會)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자치운동도 줄곧 반대했고, 중앙진흥회의 취지와 운동논리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런데도 이 경우 아무래도 공적 기록을 따르게 마련인데, 그 공적 기록의 내용이 100퍼센트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개인 기록의 내용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가 총독부 당국의 자료를 절대시해서 일제강점기 운동사나 사상사를 다룬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공안당국의 자료만 보고 1980년대의 학생운동사를 다루는 것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루빨리 완역되기를

    요약하면 윤치호의 일기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속내는 물론 그의 시대가 상세히 담겨 있다. 따라서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계에서는 윤치호의 일기를 오랫동안 ‘방치’해왔다. 우선 그의 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방대한 분량과 영어 독해의 부담 때문에 검토해 볼 엄두를 못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한 개인의 일기를 사료로 볼 수 있느냐는 고정관념이나 윤치호는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다소 우스운 질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안창호, 김구, 신채호, 여운형 등의 일기가 현존한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방치되어 왔을까? 친일파라 해서 그의 일기가 보잘것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니 친일파이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기 못지않은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하루빨리 윤치호의 일기가 완역(完譯)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글쓴이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주요저역서
    -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엮음, 웅진지식하우스, 2009
    - 『제중원 이야기』, 웅진지식하우스, 2010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윤치호 일기로 보는 식민지시기 역사』, 산처럼, 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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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정말 읽어보고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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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이선생님 덕분에 대한민국 구석구석 구경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페친임이 큰 영광입니다. 작년 여름에 한국에 다니러 갔을때 느꼈던 갑갑한 유리벽을 이선생님도 느끼셨다니 울적합니다. 더 많은 분을 만나고 오셨기에 더 많이 굳어있는 대한민국 지성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전대갈 사형시키고, 친일파 다 잡아들이면 좀 나아질까요?? 그런데, 그럴수나 있을까요? 아니, 이런 말 해서 저 잡으러 오지 을까요..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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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Jeong-Eun Maeng님, 살인마 전두환을 때려죽이자고 한 10년 외치니 바끄네가 전두환법을 만들어 살인마 전두환의 추징금을 최근 받아내었습니다. 또 10년 외치면 처형될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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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스무 번째 이야기-2013년 9월 26일 (목)]

    모든 일은 저 하기 나름이다

    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않는다네

    自爲靑城客 不唾靑城地
    자위청성객 불타청성지

    - 유의양(柳義養, 1718~?)
    『북관노정록(北關路程錄)』

    이 글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촉(蜀) 땅 청성현을 유람하며 지은 「장인산(丈人山)」 시에 나오는 구절로서, 조선 후기의 문인인 후송(後松) 유의양이 『북관노정록』에 인용한 글입니다. 『북관노정록』은 유의양이 함경북도 종성(鐘城)으로 귀양 가면서 도중에 경유한 북관(北關) 여러 고을의 노정, 풍토, 유적 등을 사화(史話), 관련 시문과 함께 기록한 한글로 쓴 기행기입니다.

    함경도를 북도 혹은 관북지방으로 일컫는데, 마천령(摩天嶺)을 경계로 해서 서쪽은 남관(南關)이라 하고 동쪽은 북관이라 합니다. 당시 북도에 대한 글 가운데 홍의영(洪儀泳)의 『북관기사(北關紀事)』를 보면, “남관만 해도 산천과 풍물이 기전(畿田 경기)과 대동소이하나, 일단 마천령을 넘으면 산은 더욱 높고 험준하며, 들판은 더욱 황량하고 넓으며, 민물(民物)과 풍속도 판이하다.”라고 하고, 또 “양반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있어 혹 글을 읽어 행실을 삼가는 자들이 있긴 한데, 그 나머지는 모두 벼슬길로 나갈 기회를 엿보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향임(鄕任)이나 무관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 큰 욕심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지리적인 여건이나 학문의 풍토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여러모로 열악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종성은 북관 중에서도 두만강변에 위치한 변방 지역으로 서울에서 이천 리나 되는 곳입니다. 북관에는 여진족 등 오랑캐가 수시로 드나들어 폐해가 심하므로 세종 때에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는데, 종성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귀양살이하는 유의양에게 한 선비가 찾아와서 글을 배울 것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소생이 북도에서 생장하였기에 학식과 문한이 노둔하니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유의양은, “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아니한다 하거늘, 사람이 스스로 학문하지 않고서 어찌 생장한 땅을 탓하리오? 하늘이 사람에게 성품과 재능을 주심에 어찌 반드시 남방에 후하게 하고 북방에 박하게 하였겠는가?”라 하고, 북도 출신의 충신, 열부(烈婦), 문한(文翰)에 능한 이, 글씨로 유명한 이 등을 일일이 지명하였습니다. 또 이것을 기록하여 그곳의 다른 선비들에게도 전하게 하였습니다.

    종성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북도 음식은 대체로 먹기 어렵지만, 염장(鹽醬) 맛은 더욱 형편없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유의양이 종성에 올 때도 함흥 판관이, “육진의 염장이 맛이 참혹하다 하니 장을 가져가라.”고 할 정도였는데, 와서 먹어보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북도는 광천(鑛泉)에서 제조하는 천염(泉鹽)으로 장을 담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집주인에게 염장을 얻어 먹어보니, 맛이 비상하여 오히려 서울서도 드물게 먹던 장맛이었습니다. 이에 유의양은, 장맛은 담기에 달려 있지 소금 맛이 아니었더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유의양은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학문을 등한시한 자신을 반성하라고 선비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또 장맛이 형편없는 이유가 좋은 자연의 혜택을 입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위 시구에는 귀양살이하는 필자의 마음가짐도 담겨있는 듯합니다. 자신이 현재 몸담고 발 딛고 있는 곳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임을 알겠습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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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Feb 24, 2013
    In honor of Women's History Month, this video spotlights the valorous actions of U.S. Army Sgt. Monica Lin Brown while serving in Afghanistan. Brown is only the second woman since WWII to earn the Silver Star.
    In honor of Women's History Month, this video spotlights the valorous actions of U.S. Army Sgt. Monica Lin Brown while serving in Afghanistan. Brown is on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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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가주 동문회 부회장을 역임하셨던 3회 프렉스에어코리아 오현록 전무 별세
    - 2013년 5월 23일(목) 아주대 장례식장에서 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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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이번 방문중에 뵈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불통이었다. 소원했던 지인이 있으면 당장 전화해보길 바란다. 시간내서 하려다 인간구실 못한다. :'( :'( 현록이 엉아 ~]

    [부고] 영동고 북가주 동문회 부회장을 역임하셨던 3회 오현록 선배 지난 2013년 5월 별세
    북가주 동문회 부회장을 역임하셨고 Applied Material 본사에서 중국담당이사를 지냈으며 한국에 돌아가 프렉스에어코리아 전무를 역임하다 별세 - 2013년 5월 23일(목) 아주대 장례식장에서 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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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이름표 :'( :'(
    오현록 선배와 실리콘밸리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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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속이 후련합니다. 100 퍼센트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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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상당히 고급영어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번연이 되면 좋겠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이 식민지 논리를 내면화 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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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왜 친일을 했을까요?라는 의문은 너무 현재적인 기준에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20년대를 지나서 1930년대는 사실 조국이 광복되리라는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요. 그 시절에 확고한 민족관을 갖지 않고서는 아마도 모두가 윤치호처럼 될 수 밖에 없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윤치호를 대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공과를 따졌어야 하고 공을 가진 독립운동세력에 대하여 대접을 했어야 하고 매국 행위를 한세력에게는 그에 맞는 처분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걸 못한 결과가 현재 우리의 가치기준을 싸구려로 전락 시켰다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한세력은 얼마나 고통을 감내하였을까요.... 반민특위가 제구실을 못한게 너무나도 아쉽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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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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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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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가족 분들의 가정에 부재의 공허함보다는 끈끈한 가족애로 더욱 든든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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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럽구 ... 대단하다 ... 나두 딸 하나 더 있으믄 좋겠는데 ...
    With Sangho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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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그 특위를 방해하고 부샤버린 인간이 통령이었가는것이..그다음에 통렴은 일본 이름까지 가지고 계셨나니, 좀 잘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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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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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끄네가 아니라 '박근혜대통령'이었군요.
    한국이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임에 확실하군요.
    '바끄네'라 하여도 죽지 않고 고이 살아갈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민주주의의 태평시절을 만드는데 저도 피한방울 보태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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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어디인데 조** 등장했군요.
    그는 일찍이 자기방식이 통해야
    그것이 세상사인줄 알지요.
    절대 타인의 전후사정은 NO~!!!
    함께 글 섞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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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요즘, 다들 "바뀐애"라고들 하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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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그렇지요...민주적으로 사기치고 당선 되었지요...사기꾼 박근혜 대통령님...사재를 털어서 라도 공약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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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박근혜 대통령께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작태는 이미 잊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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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옷닭,빨끈해,,,,등등 많지요
    그럼 우리도 환생경제 같은 연극 만들어서 "이런 개XX", "육시럴 놈(년)"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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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 번째 이야기-2013년 10월 3일 (목)]

    가족을 그리는 마음

    만 리 멀리 서녘 바람 이내 백발에 불어오니
    고향에서도 오늘 밤 이 가을을 슬퍼하리라
    병든 이 몸 중원 땅의 나그네도 싫증이 나
    고향 생각 물결 따라 가는 배보다 바쁘어라
    떨어지는 잎새 벌레 우는 소리는 다 구슬프고
    드높은 하늘 도는 북두성은 더 아득하구나
    저 멀리서 가족들은 등불 아래 이야기하며
    상자 열어 해진 갖옷 다시 쓰다듬고 있겠지

    萬里西風吹白頭
    故園今夜亦悲秋
    病軀厭作中原客
    歸思忙於下瀨舟
    木落虫鳴俱悄悄
    天高斗轉更悠悠
    遙知兒女燈前語
    開篋還應檢弊裘

    -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중원에서 객수에 젖어(中原旅懷)」
    『유하집(柳下集)』 권6

    서녘 만 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백발의 시인. 강물이 흐르는 드넓은 공간 속에서 시인은 생각에 잠겨 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이 바람은 집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불고서 그 숨결을 안고 나에게 불어오는 것일 터. 가족들도 오늘 밤 아마 나처럼 이 바람을 맞으며 가을을 느껴 서글퍼할 것이다. 집을 떠나온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는 그만 가족들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가족들 생각에 물결 따라 내려가는 배보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내 마음이 더 다급하기만 하다.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온갖 풀벌레들 울어대기에 나그네 시름은 점점 깊어지고 광활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 생각은 더욱 아득해진다. 그렇다. 저 멀리 별빛 아래서 가족들은 지금 등불 앞에 앉아 상자 속에 담긴 내 해진 가죽 외투를 꺼내어 어루만지며 나를 걱정하고 있으리라.

    홍세태는 숙종 연간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영조 초년에 생을 마감한 중인(中人) 출신의 시인이다. 이 시는 네 수의 연작시 가운데 두 번째 시로, 홍세태가 1718년 66세 때 한강을 따라 유람하다가 충주에 당도하여 지은 것이다. 『유하집』 권6에는 동호(東湖)에서 배를 띄운 시, 밤에 여주 목사 조공(趙公)과 이별하며 남긴 시,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저물 무렵 배를 댄 일을 읊은 시 등이 있어 당시의 여정을 대략이나마 엿볼 수가 있다. 충주를 중원(中原)이라고 불렀던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양(漢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의 나루에서 배를 띄워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광주(廣州)에 이르면 물길이 둘로 나뉘게 된다. 여기서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남한강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대로 물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양근(楊根), 여주(驪州)를 지나 충주(忠州)에 닿는다. 가을로 접어드는 강안(江岸)의 풍광을 바라보며 천천히 노를 저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에서 홍세태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홍세태는 처음에 8남 1녀를 두었지만 불행히도 모두 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늦게서야 또 딸 둘을 낳고 키워 시집까지 보냈지만 둘째 딸마저 몇 해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참혹한 자식들의 요절을 겪으면서 죽는 것보다 힘든 삶을 그는 이어 오지 않았을지. 이 여행은 어쩌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 주는 작은 위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 변구일(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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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이노래 부를때는 정말 미국도야지 였어 ㅠㅠ 내가 보아도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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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오현록 선배님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 :'(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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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레이디가카 란 말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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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의외로 미성이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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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엇 닭*혜아니었나요?. 다들 그렇게 불러서 그런줄 알고있.....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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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이름 조금 바꿔 말했다고 세계최고 민주주의라??? 마음이 아프네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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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도둑을 도둑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가 무슨 민주화된 사회인지요! 헌법에 조국 대통령을 뭐라고 불러라 써졌답니까. 조**씨는 공적 호칭을 써야할 때와 장소를 생각해보시지요. 사적공간에서 공인을 뭐라 칭하든 그건 말하는 이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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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상호 존중하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깝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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