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펌]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5. 20.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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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한손엔 몽둥이 한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을 주살하라!!]


KBS 일요 스페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년 5월 18일 일요일 저녁 8시에 방송 되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독일 외신기자 힌츠페터가 광주에 몰래 진입해 찍었던 영상들을 토대로
80년 광주에선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만약 위의 저런 개념없는 발언을 일삼는 그 사람이 이 다큐멘터리를 봤다면 과연 그 말이 다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개인적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소장하면서 
이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봐야 하는 다큐멘터리라고 강조하고 싶지만,
본 사람보단 아직 못 본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직접 캡쳐 한 
화면을 토대로 방송의 내용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KBS자료실 정기간행물서고] 지난 외국잡지들이 보관되어 있는곳

80년 한 외국잡지는 한국소식을 커버스토리로 싣고 있었지만 목차부분은 면도날에 잘려져 나갔고 내용은 아무리 뒤져도 찾아볼 수 없다.

국회도서관의 외국신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당시의 한국관련 기사는 모두 오려내어져 있었다.

86년까지 그런 이상한 일은 계속 되었다.

80년 5월 광주는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창문 밖 어둠 속에서 무슨일을 벌인것일까..
영원히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겠지만 그 현장엔 목격자가 있었다. 


함부르크에 있는 북독일방송국(NDR) 독일 제 1공영방송(ARD) 뉴스센터
 
 
29년전 5월. 그곳에서는 놀라운 한국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인들도 모르고 있었던 이 엄청난 사건은 그날 다시 유럽 전역으로 방송되었고 매 시간 뉴스로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미국에서도 그 필름은 그대로 방송되었다. (사진 오른쪽)
 
한국의 참상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인도 모르는 이 사실들은 어떻게 해외언론에 보도가 된 것일까.


80년 당시 광주로 몰래 잠입해 필름을 찍어 독일로 보냈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당시 북독일 방송국 도쿄 특파원이었던 힌츠페터 기자에 의해서 보도가 된 것이다.


힌츠페터가 기록해 둔 그 당시의 사진들


월 19일 월요일 아침. 그는 당시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광주라는 단어가 들렸다.
갑자기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는 한국에 여러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광주로 향했다.

당시에는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 해도 광주까지 가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서울을 떠나 고속도로에서 미리 저지 당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상하게도 광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광주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는 군대에 의해 더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운전기사가 샛길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군대를 만났다.

거기서 힌츠페터는 이야기를 하나 꾸며냈는데, 그는 광주에서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학생시위 때문에 그를 잃었다고 하니 군인들은 그들을 들어가게 했다.

그렇게 그들은 광주로 들어갔고, 그 때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를 보자 환호하는 시민들 
 
 

광주에 진입했던 당시 시민들은 낮게 애국가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 느낌이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그가 광주 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지 3일 째 되는 20일 화요일 낮.

그동안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5월 18일 오후 4시. 모든 일은 시작 되었다.


광주의 가장 중심가인 금남로에 군용트럭이 도착 공수부대들이 내렸다.
갑자기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군인들은 힘껏 몽둥이로 내려쳤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길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공수부대원들은 달아나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수부대원들이  여성이나 노약자에게도 폭력을 사용한데에 있었다.


 

참혹한 현장을 지켜 본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의 그 순간 그 시점에서의) 광주 사태의 첫날밤은 두려움 속에서 지나가게 된다.
이날 밤 통합병원에서는 곤봉에 맞은 사람 한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 5월 19일


그러나 그 다음날, 공수부대원 등에는 대검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를 진압하러 온 군인이 등에 대검을 꼿은 것이다.
 
설마했지만 실제 대검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사용되고 말았다.


당시 전남일보 사진부장이었던 신복진씨의 인터뷰에 의하면 6.25 사변때에도 광주에는 그렇게 복잡한 일이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런 유혈사태는 많은 시민들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보고 누가 참을까.
적군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 있는 민간인을 가서 무조건 잡고 보는것인데 그게 이야기게 되겠느냐.
그래서 광주는 공포에 질린 도시였다.
 
광주 도심에는 살해된 시체가 나도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21일 아침.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21일 아침 모든 것이 드러났다. 건물 안에서 나온 시신은 트럭위에 올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은 젊은이를 볼 수 있었다. 밤 사이에 죽은 것이다.
대학생들이 막고 있는 건물 안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그곳에서는사람들의 시체를 더 볼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힌츠페터가 광주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도청 앞에 쫙 깔린 저격병이라는 걸 처음 봤다는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인 황종건 기자의 인터뷰와 함께

김영택 당시 동아일보 취재기자는 공수부대원들이 앉아 쏴 자세로 정조준 한 채 태극기를 들고 그들 앞에서 흔들었던 사람들을

쏴 죽이고 끌어내고, 또 태극기를 흔들면 쏴 죽이고 끌어내고.. 이러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며

그 장소에서는 사실상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 날 희생자는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광주시내는 피가 흥건했고 숨진 사람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 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디에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

그들은 정말 모두 죽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힌츠페터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해 이 상황을 촬영했다.


힌츠페터는 모두 10롤의 필름을 촬영했다. 그 중 중요한 5개만 따로 추려내어 모두 허리속에 감췄다.
그리고 서울로 향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군대에 모두 압수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광주에서 나오면서 모두 두번의 검문을 받았는데,
대게 군인은 차 안에 총기가 있는지 살폈지 촬영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는 조선호텔에서 쿠키를 사고 그 속에 필름 몇 통을 숨겼다.
결혼선물로 포장하고 혼자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 필름은 일본 공항에서 바로 독일로 보내졌다.

80년 5월 22일 독일 제 1공영방송 저녁 8시 뉴스


그 날 저녁, 독일 제 1공영방송은 힌츠페터의 필름을 방송할 수 있었다.


 

전두환 일파가 내란을 일으켰음이 명백해졌다.
적의 공격이 있어야 가능한 전국 비상계엄을 억지로 선포한 뒤 국회 기능마저 정지시켰다.
광주에서는 내란 목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던것이다.

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시켰다.
 
힌츠페터는 일본 공항에서 3시간을 머문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힌츠페터는 광주로 돌아가기 전 김영삼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힌츠페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정확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한국 언론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음을 눈치 챌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았다.
신 군부가 계엄령을 통해 제 2의 쿠테타를 일으켰고 최규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신문은 평화로운 백로 사진으로 시민을 총살하는 엄청난 사건을 덮었고, 광주시민들의 시위 대신 미국의 폭동 소식만을 전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4일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던 언론사들이 드디어 광주 소식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허위보도였다. (왼쪽 사진)
이미 광주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유언비어라고 역선전을 했다.
하지만 유언비어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신문 만화까지 동원된 보도의 역선전에 국민 대부분은 속아넘어갔다.  

그리고 김삼웅 성균관대 언론대학원 겸임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차마 우리나라 국군이.. 군인들이 시민들을 그렇게 학살, 총살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지요.
그 때가 바로 4.19민주혁명이 일어나고 꼭 20주년이 되던 해 인데,

4.19때 발포를 해가지고 당시 정부 장관들이 전부 사형, 처형 당하고 그랬잖습니까.
그런 것을 겪은지 불과 20년밖에 안되었는데 그때만해도(4.19혁명 당시) 군인들은 시위하는 시민, 학생들을 보호하고 그랬는데,
그랬던 군인들이  광주에서 시위한다고 총살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지요.

 
 
진실은 발간되지 못한 이 신문에 모두 들어있다. (사진 가운데)
이처럼 광주의 진실은 아주 초기부터 언론사 내부에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실은 신문은 발간되지도 못하고 허물어졌다.
더이상 국민을 속일 용기가 없었던 기자들은 사직서를 내고 언론사를 떠나갔다.


힌츠페터는 23일 다시 광주로 들어갔다.
이제 광주 부근 고속도로에서 탱크와 헬기까지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군대는 시내에서 철수해 외각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고 힌츠페터는 바로 중심가로 향했다.
힌츠페터는 도청앞에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수요일에 떠났던 광주에 금요일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이틀 전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여자와 노인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병원 창고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관이 모자라서 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누워있는 시신들이 많았다.
힌츠페터는 베트남전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부상당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악을쓰며 원통해 하고 있었다.
그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죽은 자의 친구와 가족들이 와 있었고, 관은 모두 30여개가량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은 밧줄에 묶여 있었고 태극기를 덮어 장식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힌츠페터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와 목사, 신부등이 위원회를 만들어 군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시민, 학생등은 총들을 다시 반납했다.


 

신문에서는 시위선동 간첩이 잡혔다고 보도를 냈지만 이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 후에 밝혀졌다.

계엄사에서 제공한 헬기로 언론사 사회부장들이 광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자들의 보고를 통해 광주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린다고 보도하면서 진실을 교묘히 은폐하는데 앞장섰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 다시 진입


시신이 즐비한 도청안. 진압군은 옷을 바꿔입었지만 초기에 사람을 살해했던 그 공수부대였다.
진압군은 시신마저 훼손하고 있었다.



KBS는 뉴스 시간 내내 진상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괴래를 운운하며 광주시민을 위협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시민살해에 분노한 사람들은 모두 극렬한 폭도였고 군대가 국민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은 모두 정당한 일이 되고 말았다.
화면속의 광주는 어처구니 없게도 평화로웠다. KBS는 국민을 속이고 진실을 감추는데 성공했다.
끝까지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짓고 말았다.
 
시신이 즐비했지만 신문 보도에서는 2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계엄군 진입을 시민들이 반긴다는 허위보도에 광주 시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당시의 광주와 대한민국 상황을 전하는 외신들의 보도


80년 8월 23일자 신문 
 

외신들의 그러한 보도와는 달리 파렴치하게도 당시의 신문과 방송은 전두환 장군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잘려나간 신문에는 광주의 대규모 시민 살인사건이 누구때문에 일어난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그리고 80년 9월 1일.
그렇게 전두환 장군은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힌츠페터 기자는 전두환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한국 상황에 분노하고 있던 베르트람 중국 특파원에게 공동작업을 제의했다.
베르트람은 다큐멘터리 원고 작성을 맡았다. 결국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제작되었다.

'기로에 선 대한민국' (80년 9월 방송)


모든 것은 끝났다. 광주는 무거운 침묵속에 빠져들었다.
언론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살인자의 편에 서 있었다.
모든 진실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진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진실을 알리려 했다. 매년 5월이 되면 처절한 저항이 계속 되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사진집이 몰래 출판되었고, 수만권을 압수하고 관계자를 투옥시켰지만 책은 복사되어 읽혀졌다.
여기서 우린 오른쪽 사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석영씨는 광주의 저항과 참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보고서의 저자이다.
황.석.영.씨가 말이다...


눈물을 흘리며 숨죽여 보던 광주 비디오들, 그 중 독일 비디오로 알려진 것이 바로 힌츠페터의 기로에 선 한국이었다.
인터뷰에서 장용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86년쯤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 때 동료 신부가 한 사람이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건 어느 의미에서 당시에는 위험한 물건이었기때문에 아무에게나 부탁할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그 신부에게는 내 후배고 그래서 너는 신부니까 다쳐도 니 몸 하나 뿐이다.
그러니까 제발 이거 가지고 들어가서 전 광주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라.
그랬는데 한국공항에서 실패를 했지요

 
결국 그는 직접 가지고 갔다.
해설을 번역해 놓고 몇가지 다른 자료를 덧붙여 비디오는 만들어졌다.

 
비디오 상영 후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필름을 비디오로 처음 제작을 해서 한국판으로 내보내니까 바로 정부 대변인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정부 대변인이..
내가 그대로 기억을해요.
이것은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온집단에서 만들어낸거다. 이렇게 나왔어요 성명서가.. 
그래서 그런 성명서가 나오리란것을 미리 예측을 했기 때문에 저도 반박성명서를 준비해 놨었어요.
그래서 바로 반박을 했지요.
이것은 몇년 몇월 몇일 독일 국영방송에서 방영된 것이고,

또 이 사실은 독일 기자가 직접 어려움을 무릅쓰고 광주에 진입해가지고 직접 찍어서 사실 그대로를 보도한 것이다.
만약에 번역이 왜곡되고 틀렸다거나 과장되었다거나 그렇다면 그것을 한번 지적해봐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은 사실 그대로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한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 거짓에 맞서왔던 언론인 힌츠페터.
그러나 한국인들이 그의 필름을 볼 무렵 그는 기자생활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동안 병원에 있어야 했다
바로 한국에서의 상처때문이었다.
늘 감시당하고 있던 그는 86년 서울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중에 사복경찰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노상에서 집단 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 앞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1937년7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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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한손엔 몽둥이 한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을 주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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