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찰스 로버트 젠킨스(Charles Robert Jenkins, 1940년 2월 18일 ~ 2017년 12월 1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출신의 전 주한 미군 중사로 비무장지대(DMZ) 철책근무 당시인 1965년 1월 5일 새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투항했다. 그곳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국의 지령에 따라 결혼한 납북 일본인인 소가 히토미와 결혼했는데, 그녀와 결혼하면서부터 탈북을 결심하다가 2004년 7월 8일에 결국 탈북에 성공하여 일본 니가타 현 사도 시(사도가 섬)에서 살다가 2017년 12월 11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65년 1월 5일 이른 시간, 그 해 가장 추운 날로 기억되는 날, 하사관 챨스 로버트 젠킨스가 이끄는 네 명의 미군이 DMZ를 순찰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3시간 여 매복 중이던 그들은 새벽 2시 30분경에 막사로 돌아가기로 한다. 젠킨스는 -나중에 순찰 전에 10개 정도의 맥주캔을 마셨다는 것을 시인했는데- 동료들에게 선두에 서서 순찰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3주가 흐른 후에 북한 당국은 북한에서 ‘천국’을 찾았다고 말하는 젠킨스의 메시지를 방송으로 전한다. 젠킨스는 3년 사이 미군을 이탈해 북한으로 망명한 네 번째 군인이었고 특히 환영 받았는데 그건 그가 하사관에 무기를 가지고 망명했기 때문이다.
젠킨스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될 것을 두려워하여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만 북한에 잠시 숨어있기 위해 월북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한은 젱킨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독재 국가의 실체가 드러난 곳이었으며 젱킨스 자신이 "거대한 감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열악했다. 물론 자신을 비롯한 제임스 드레스녹 등의 월북 미군들을 북한에서는 미제를 버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스스로 선택한 영웅이라는 대외홍보용 자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저소득층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젠킨스는 바로 북한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 납치되어 북한으로 오게 된 일본인 여성인 소가 히토미[1]를 만나면서부터는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탈북 이후에는 아내의 국적인 일본의 영주권을 획득하였고, 현재까지도 젠킨스는 일본에서 살고 있다.
젠킨스는 탈북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미국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였던 조지 워커 부시는 젠킨스에게 중형을 선고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젠킨스가 기소되었을 당시가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이였는데, 조지 워커 부시의 후임으로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오바마는 젠킨스에게 30일 금고형과 현역 부적합 전역으로 젠킨스의 월북행위를 일단락지었다.
이후 젠킨스는 아내인 소가 히토미와 자신의 자녀들과 같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일본에 살다가 2017년 12월 11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위키백과인용)
납치 KIDNAP
2002년 9월, 챨스 로버트 젠킨스라는 이름이 매우 묘한 상황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북한 스파이들에게 일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자 13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했다는 확신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8명은 이미 사망했고 남아 있는 5명 가운데 한 명인 히토미 소가는 젠킨스와 결혼한 사이였다. 젠킨스와 그녀는 1980년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납치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2004년 평양에서 젠킨스는 감독에게 그가 단지 소가의 영어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보호자였노라고 고백했다.
2002년 10월 젠킨스의 아내는 귀환 허가를 받아 도쿄로 돌아갔다. 이 일은 일본에서 감동적인 사연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었고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평양에는 젠킨스와 두 딸만이 남았다. 아내가 돌아가자 젠킨스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만약 북한이 그와 딸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면 그는 곧바로 탈영과 적국 협조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일본과 미국 사이의 범죄자 송환법에 따라 강제 출국되었을 것이다.
이 납치 사건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두려움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소가와 젠킨스의 드라마는 일본과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이산 가족들의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북한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이산 가족이 미국과 송환 협상을 맺지 않은 제3국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베이징이 제안되었지만 소가는 그 곳이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상으로 북한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2004년 7월 8일 드디어 인도네시아에서 만나게 된 부부는 눈물 어린 감동의 재회로 전 세계 미디어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들이 도쿄에 도착하자 그보다 더한 환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젠킨스는 설득 끝에 응급 치료를 받고 자수하게 된다.
젠킨스는 일본 내 미군에 투항해 법정에 선다. 이후 그는 그가 북한에서 당국과 동료 망명자들, 특히 드레스녹에게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충격적인 진술을 한다.
“내가 북한 당국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날 묶고 드레스녹을 불러 때리게 했다. 드레스녹은 진정 즐기는 모습이었다. 드레스녹은 196센티미터의 장신이었으며 128킬로그램이 나갔다. 그는 거대했고 사람을 때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하사관이었기 때문에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젠킨스의 군사 법정 재판일은 11월 3일로 잡혀 있었는데 이 날은 전 세계의 관심이 미국의 대선에 쏠려있는 날이었다. 그는 탈영과 적국 협조 두 가지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았고 6개월의 실형을 언도 받았지만 사전 합의에 따라 30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석방된 후 젠킨스는 1978년 아내가 납치되었던 곳인 사도 섬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살다가 2017년 12월 11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일본 사도가 섬에서“오늘은 내 인생 마지막 장의 첫 날이다. 이 곳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길 소장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비밀해제 미정부관련문서]
Sgt. Charles Robert Jenkins: Defected January 1965
Returned to Japan & Remained There After US Army Court Martial
Alive as of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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