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은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한산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고,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였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향시에 수석으로 합격, 이듬해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진수당(進修堂)은 원생들이 공부하는 건물로 학업에 정진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곳이다. 진수당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으로 지었다. 서원은 보통 사당, 강당, 재로 구성되는데 사당(祠堂)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고 강당(講堂)은 원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이며 재(齋)는 원생들이 숙식하는 장소로 쓰인다.
서재(西齎)인 석척재(夕惕齋)는 주역(周易)의 건건석척(乾乾夕惕)에서 유래한 말로 '군자가 종일 조심하고 조심하여 저녁에 드려운 듯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는 뜻이다.석척재는 해가 저물면 사당에 모신 유현들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재인 존양재(存養齋)는 맹자의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말로 원생들이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사액 서원(賜額書院)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서원 가운데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된 서원을 뜻한다. 선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는 577개의 서원이 새로 생기고 그중 100개의 서원이 사액을 받게 되었다. 국가의 공인을 받아 서원명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았던 서원이다.사액 서원은 국가가 인정한 사학으로서 성균관과 대등한 교육 기관으로 인정을 받아 지방 사림들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한산 이씨가 크게 융성하게 된 것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윤경의 후손들이 5대에 걸쳐 호방을 맡아오던 중 현감이 앉아 있는 한산현 동헌의 널빤지가 뒤툴리고 마루 틈으로 안개같은 기운이 스며 오르는 것을 보고, 그 곳이 명당인 것을 알고 몰래 호장공을 묻었다고 한다. 그 음덕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해서 6대 손인 이곡이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해지고, 그의 아들 이색도 한산부원군이 되는 등 부자가 군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관청 부지는 당연히 금장지(禁葬地)이고, 이미 쓴 묏자리 부근은 물론 문무양반의 1품의 묘지는 사방 90보, 2품은 80보, 3품은 70보, 4품 60보, 5품 50보, 6품 이하는 30보 이내에 타인이 도장(盜葬)은 물론 밭을 갈거나 나무를 베지도 못하게 하는 금장령이 있었으며, 만일 금장령을 위반하면 1년 이내의 징역과 곤장 60대 이상의 벌을 받고 동네에서 추방하도록 법으로 정해져서 이색이 아직 생존하고 있을 때 동헌 마루 밑에 조상을 암장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색도 처벌받아야 할 입장이었으나, 임금의 신임을 얻고 있던 이색은 조상의 무덤을 옮기는 것보다 차라리 관가를 옮겨 달라고 상소를 하니 그 상소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문헌서원은 이 지역을 본관지로 하는 한산이씨 명조 선현 8위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기록상 창건은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지며 처음 이름은 ‘효정사(孝靖祠)’이다. 1611년(광해군 3)에 문헌(文獻)이라 사액 받았으며, 제향인물은 이곡(李穀), 이색(李穡), 이종덕(李種德), 이종학(李種學), 이종선(李種善), 이맹균(李孟畇), 이개(李塏), 이자(李북을 돋울 자)이다. 문헌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1891년 옛 터에 단을 설치하고 제향하였다. 서원구지(書院舊誌)에 의하면 이 설단 당시 한산 향현사에 제향되던 ‘한산 6군자(현암 이종덕, 어성 신담, 남강 이임,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련, 지족당 권양)’을 함께 제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1967~1968년에 종족들에 의하여 중건이 발론되고 후손들의 합력으로 영모리 동쪽의 현재위치로 1969년에 이건하게 된다. 이 해에 현암 이종덕(玄巖 李種德)을 추배하여 모두 6현을 제향하게 되었다.[참고문헌 문헌서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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