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 및 이축 선생 묘(1473)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3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7-3
이축 선생 묘(李蓄 先生 墓)
은지 및 이축 선생 묘(隱池 및 李蓄 先生 墓)는 흥도동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위치합니다.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한 이축 선생묘는 이천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으며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지만 상석과 장명등은 최근에 교체된 것입니다.
현재 은지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이며, 수초 등과 물방개, 잉어 등 여러 생물체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연못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였던 망월암 이축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못은 1456년에 만들어 졌으며 지금까지 540여년 동안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 오고 있는 드문 연못입니다. 이축은 이곳에서 계유정란에 의해 쫓겨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의를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이축(1402~1473)은 고려말의 대학자이었던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 인제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후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김종서 등이 유폐되어 있는 영월을 향해 매일 망배하고 그의 처소에도 망월당이라는 옥호를 달아 놓을 정도로 전왕에 대한 충절이 깊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축은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연못을 하나 팠는데 그 연못의 이름을 ‘숨을 은(隱)’자, ‘못 지(池)’자를 써서 ‘은못이(隱池)’라고 하였다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이 마을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 도내동 은지 근경... 찾아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은지 (隱池)
고양답사를 하면서 도내동 은지를 찾아갈 때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네비에 나온 주소는 인근까지 가서는 더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인근에서 사람을 찾아도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무작정 네비가 멈춘 근처 식당을 찾아가 물어봐도 아시는 분이 없었는데 다행이 한분이 알려주시는데 바로 그 집 뒤에 연못이 있었다. 하지만 진입로가 없어서 빙 둘러서 가야만 했다. 해는 넘어가는데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고... 또한 이축선생 묘를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연못 근처 묘를 훑었는데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입구로 다시나와 신도비를 보고 더듬어서 겨우 이축선생 묘를 찾았을 때는 어두어진 뒤다. 좋은 카메라 덕분에 사진을 찍긴했지만 아닌 것 같아 한달 뒤 다시 찾았다. 덕분에 이축선생 부인 묘가 최근에 고양시향토문화재로 지정(향토문화제 제53호)되었는데 함께 답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이축선생 묘, 이유청선생 묘(향토문화재 제54호), 이천서씨묘(이축선생 부인묘)를 함께 볼 수 있다.
이축(李蓄)
1402년(태종 2)∼1473년(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보(潤甫). 이색(李穡)의 증손이며, 광주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의 아들이다.
그가 처음 제수된 관직은 계성전직(啓聖殿直)이었는데,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그뒤 사선주부(司膳主簿)를 거쳐 외직으로 광주판관(廣州判官)을 지냈다. 사헌부의 감찰과 호조의 좌랑 및 정랑, 전농시(典農寺)의 소윤을 지냈으며,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봉상시사(奉常寺事)·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를 거쳐 이조참의에 올랐다.
1453년(단종 1)에는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해 9월에 사직하고서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원당읍(元堂邑) 도내 4리(道乃 4里)에 위치하며, 배(配) 이천서씨(李川徐氏)의 묘(墓)와 합부(合 )하였다.(오류-이천서씨묘는 인근에 별도로 있다) 봉분(封墳)는 둘레 24m 6 각묘(角墓)이다. 2 개의 비(碑)가 있는데 구비(舊碑)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13cm, 높이 100cm이며 신비(新碑)는 폭 42cm, 두께 20cm, 높이 112cm이다. 또 성종 6 년(1475) 2월 건립(建立)된 묘표(墓表)의 표문(表文)은 이승소(李承召)가 지었다.
이축(李蓄)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號)는 망월암(望越庵)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다. 고려말 성리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자로 이숙야(李叔野)의 장남(長男)이다.
<고양군지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 고양시 향토유적 제36호 |
문화재명칭 |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7-3 |
네비게이션주소 | 연못: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6-6에서 50미터,은성교회앞에서 산길로접어듦, 묘:도내동 844-3(837-3주택뒷산) |
관리자(연락처) | 한산이씨 |
흥도동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이다.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한 이축 선생묘는 이천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으며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이축(1402~1473)은 고려말의 대학자이었던 牧隱 李穡의 둘째 아들 인재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은지는 이축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진 연못으로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도내동 은지 안내판
▼ 도내동 이축선생 묘역 일원
▼ 이축선생 신도비
▼ 이축의 조부이자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이종학 신도비.. 이축신도비 옆에 있다.
▼ 이축선생 묘 전경...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찾은 곳이라 캄캄하다
▼ 이축선생 묘표
▼ 이축선생 묘를 찾은때가 너무 어두워서 한달 뒤 다시 찾았다...
▼ 이축선생 묘비
▼ 이축선생 묘 석물
▼ 이축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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