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전두환 을 처형하라! 한 손엔 몽둥이 한 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을 주살하라!!]
아래 기사에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빠졌습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유신 말기 경제파탄으로 형편이 위급하여, 일본이 요구하는 데로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해서 은근슬쩍 무인도화’하고는 일본에서 40억 달러 차관을 빌린, 반민족적 통치행위로 그자의 집권 서막을 올렸습니다. '독도는 우리땅'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전두환의 졸개들에게 고문과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언론이 어찌 모른척 은근슬적 넘어가는 겁니까?
울릉도 출신으로 6.25때 참전했다가, 53년부터 56년까지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고 이끌었던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 박정희 초기에는 근무공로훈장도 받았는데, 이 사람이 72년에 독도 수비를 강화해서 실효적 지배력을 키우라고 하자. 73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또 80년대는 전두환이가 홍순칠 대장을 잡아가서 간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전두환 때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86년에 사망했습니다. 또 “독도는 우리땅” 노래도 처음에는 가처분신청, 금지곡이 된 적이 있습니다. 전두환은 아예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우리 땅인데 우리가 못 갔습니다.
바로 박정희가 한일협정으로 팔아먹고 이미 팔아먹었던 독도를 전두환이가 또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불편하지만 알고 가야합니다. 물건값 두번이나 치룬 일본애들도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같은 독도 두번씩이나 물건 값을 치루었으니 말입니다.
해결책은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여 거래원천 무효화를 시키는 길 뿐입니다. 독도는 장물입니다. 도적놈 전두환이 국민에게 훔처서 일본에 팔아먹은 장물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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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사정권시절 한·일 외교 뒷이야기/2015-03-14/세계일보]
(사진설명) 한일 경제협력자금 100억달러의 비밀/오구라 가즈오 지음/조진구, 김영근 옮김/디오네/1만5000원
1981년 4월 23일, 3년 반의 임기를 마치고 귀임을 준비하던 스노베 료조 주한 일본대사가 한국 외무부로 불려들어왔다. 노신영 당시 외무장관은 5년간 100억달러를 경제협력자금으로 요구했다. 스노베 대사는 황당했지만 이를 본국에 알렸다. 일본 수뇌부는 불쾌해했다. 일본 정부는 전두환정권의 요구는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회신했다.
1997년부터 2년 남짓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오구라 가즈오(78)가 쓴 신간 ‘한일 경제협력자금 100억달러의 비밀’은 군사정권 시절 한·일 외교의 막전막후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한·일 관계의 ‘앙금’을 푸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전두환정권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12·12 신군부 쿠데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일련의 사태를 무마할 대비책을 찾느라 고심했다. 신군부는 취약한 정통성을 경제발전을 통해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5년간 500억달러의 돈이 필요했던 전두환정권은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일본을 설득하기 위해 동원된 논리는 안보였다. 일본도 막무가내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본 정부는 총리특사 자격으로 세지마 류조를 한국에 보내 친분이 있던 권익현과 협의하도록 했다.
밀고 당기는 협상이 이어졌다. 전두환정권과 일본 자민당은 총액 40억달러 제공에 합의했다. 엔 차관 18억5000만달러, 수출입은행 융자 21억5000만달러, 기한 7년, 금리 6%대라는 큰 틀이 잡혔다.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한국을 전격 방문했다. 전두환정권은 성대한 만찬을 베풀면서 환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죄의 표시로 자금을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김신성 기자/ⓒ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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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 Joshua Kim 선생의 독도 이름 찾기 서명 독려의 단체 이메일이 왔다. 홍길동과 안용복 홍순칠(글쓴이는 착각하여 권순칠로 표기 했다) 대장이 등장하는 독도의 쓰라린 민중의 역사 한번 음이하며 읽어 볼 만하다.]
[독도는 우리땅인가?/Mar 18, 2015]
답이 너무 뻔한가?
올 초부터 독도에 대하여 글을 쓸 일이 있어 여러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를 하면서, 독도문제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간단히 정리를 하면, 가진 자에게는 계륵과 같은 땅이었고, 민중들에게는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터전이기에 우리땅이다.
18세기 말(영정조)까지는 독도에 대하여 조선 정부는 거의 알지 못하였고, 우리의 땅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한국정부에서 주장하는 세종실록 지리지(1454), 동국여지승람(1531) 등이 있지만 '독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는 당시의 영토에 대한 이해가 지금과 다른 것도 하나의 원인인데, 울릉도가 우리 땅으로 정착이 된 것이 정말 감사할 정도이다.
울릉도는 태종 때 공식적인 조사를 하여, 국가가 관리할만 한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수익비용을 따져 비용이 더 크기에 울릉도민 전체를 육지로 이주시키고 완전히 그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시행하였다.
즉, 군대를 보내기에는 비용 및 위험문제가 크고, 이에 따른 조세나 군역은 너무 미미하다는 것이 었다.
이 후 울릉도, 독도 지역에서 어로 행위를 하거나 정착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에 조선 정부에서는 완전히 버려놓은 땅이었던 것이다.
이후 대마도 도주는 수시로 조정에 뇌물을 보내거나 청원했다. 땅이 좁고 경사가 심한 대마도보다 땅도 넓고 기름진데다 어장과 약초, 목재가 풍부한 울릉도가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불가'하다 말만 하고 군대와 관리를 보내 일본인의 이 섬의 출입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민중들은 삶을 위해 울릉도 독도를 드나들었고, 왜인 해적에게 노략질을 당하거나 피박을 당하는 일은 수시로 발생하였고, 조선 정부는 죄인들의 경거망동 수준으로 인식하였다.
이러니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막부에서는 오타니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 울릉도 독도에서의 공식 조업허가증을 발부하여, 거의 왜인들이 울릉도, 독도에 상주, 요즘말로 점유를 한 것이다.
숙종 말년에 '안용복'과 조우를 하여 그를 납치해 간 왜인들이 이들이다.
조선 정부가 완전히 버려둔 땅인 울릉도,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국제적으로 최초로 문제제기를 한 이는 전직 격군(명랑해전을 보았다면 격군의 지위를 알 것이다)이자 비천한 어부인 안용복이 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안용복의 주장과 성과를 조선 정부가 귀를 기울이고 울릉도, 독도를 우리 땅으로 명시하거나 다른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구속하고 죄인(안용복)의 경거망동을 사죄할 뿐이었다.
다행히, 갑술환국(장희빈이 쫒겨나고 인현왕후가 복귀한 사건)으로 국면이 전환이 되어 온갖 사기와 협박을 이겨낸 안용복의 주장이 부분적이지만 외교적인 성과를 내었다.
즉,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돌려준다'는 공식 문서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정말 분통터지는 것은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아니고)를 잘 받았다.'고 답서를 보내 아직까지 두고두고 분란을 만든 무책임과 무능의 극치를 보인 것이다.
온갖 투옥과 무시를 당한 안용복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이후에 독도수비대장으로 독도를 수호한 권순칠 대장과 비슷한 최후를 맞는다.
권술칠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하지 말라고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전두환정권의 안기부에서 간첩조작을 위한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독도는 러일전쟁후에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려는 일본에 의해 국가의 의지로 처음 '점유'가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일본의 독도점유를 막은 것은 결코 정부가 아닌 일개 민간인이었고, 그는 독재권력에 의해 간첩조작의 희생양이 되어 사라졌다. 그의 희생은 독재정권이 국민을 호도하려는 쏘와 무관하지 않다.
60년대 일본과 한일협정과 관련된 정일권, 김종필의 비밀합의는 모두 잘 아니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에게는 독도는 그냥 골치덩어리이고, 민중들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어떤 피박에도 지켜내야 할 땅이었다.
최근 역사드라마에서 자주 주인공이 되는 선조처럼 정통성이 없고 무능한 정권이 무리하게 권력을 고수하려고 하면 그 고통의 무게는 아래것들에게 내려가고,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 무게는 더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의 폭압에 차마 산적이 되지 못한 민중들은 울릉도에 정착을 하였고, 근해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을 때 전복밭인 울릉에서 전복을 몰래 따거나, 아름다리 나무를 베어 팔아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여러 섬이 있는 서해와는 달리 울릉도 독도는 동해안 항해의 목숨줄이었다. 권력자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버렸지만 민중들에게는 비옥한 땅이 있는 피난처이자 바닷길에서는 급수 창고였던 것이다.
홍길동이 무리를 이끌고 도착한 곳 '울릉도' 그 곳이 안용복이, 이땅의 민중들이 지켜냈던 그 땅이다.
또한 울릉도 독도는 오랫동안 삼남도의 민중들의 생명줄의 위협이었던 왜구의 침몰과도 무관하지 않다.
왜구의 소굴의 역할을 한 척박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차지하려고 안용복에게 사기를 치고, 협박하고, 조선정부에 뇌물공세와 온갖 공작을 진행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울릉도 독도에 왜놈들이 넘처나면, 울산, 강릉, 양양 등 동해안의 서민들이 식은 죽이라도편해 먹을 수 있었겠나?
독도는 일본의 왜구나 여진족이 울릉도를 노략질 할 때 우리 민중들의 피난처였다.
망망대해에서 악착같은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권력은 한번도 지킬려고 한적이 없고, 뼈속까지 친일인 이명박은 대통령최초로 독도를 방문하고 불법시설물인 독도표지석까지 설치하는 쑈를 벌렸다.
이런 쑈가 박종우선수같은 희생자를 또 만들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것은 그들에게는 부담스럽고, 어떤 이에게는그냥 노래나 유희겠지만, 우리 '아랫 것들'에게는 처절한 삶의 투쟁이다.
이 지역에서 구글본사가 있는 이지역에서 구글지도의 '독도'이름 복원을 위해 대대적인 서명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명용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또는 www.svkorean.org에서 독도 패티션전자 서명에 참여하실 것을 권한다.
또한 sfkorea독도서명 알림에 박근혜사진 좀 내려달라고 항의해 주시길...
진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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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86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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