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4. 15.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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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오늘의 미국'에 소개된 글입니다. 임태주 라는 시인이 누구인지 검색하니 산문집을 림태주라는 이름으로 발간했다고 뜨고 수염난 근사한 사진도 뜹니다. 



우리네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글이고 마음까지 먹먹해집니다. 잠시 일 손을 놓고 작고하신 어머님이 당신에게 남긴 이 편지를 세겨보길 바랍니다.(퍼온이주)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출처: http://www.todayus.com/?p=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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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에 대한 명상


림 태 주 (https://www.facebook.com/limudt)


나는 본다, 이스트처럼 슬픔이 부푸는 

한 그루 미루나무의 둥그런 팽창을 

잎잎마다 오후의 빛을 끌어 모았다가 

차가운 발등 쪽으로 아주 조금씩 흘려보내는 

깊은 물관부를 따라 바닥에 내리면 

수박향 나는 치어를 기르는 시내가 흐르고 

켜켜이 시간을 쌓고 있는 모래들 

문득 상류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는 듯 

조그맣게 몸을 뒤틀어 부유하기도 한다 

늘 제 스스로 만든 바람이 

잎을 흔들고 피가 마르고 

희망이 마른다 

저렇듯 잎의 상처가 세월보다 가벼워지면 

어둠 속에서 미루나무 한 그루 부풀어오른다 

날아오른다, 날아 

오를까 

기실 날개란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저 흙을 움켜쥔 단단한 현세(現世)의 뿌리들 

그러니 미루나무의 영혼이여 

너무 높이 날지 말거라, 生이 

희박하므로


- 문학동네 199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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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약을 마시며

림 태 주 (https://www.facebook.com/limudt)

언제쯤
풀의 劍이 보일 건가,물러서서 나를 버리면
저들의 아름다운 상생이
보일 건가
스스로 들끓는 어두움의 내열,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이 끊어진
울혈의 숲,내 안에 사는 한 마리
악창이여
나의 검은 그대의 눈을 밝게 하는가
나의 검은 그대의 마음에 착한가
저를 벼르고
저를 불 그릇에 가두어버린
향기로운 자결!
뼈로 여윈 풀들의 검이
푸른 피의 씨앗을
틔우고 있다
머지 않아 내 몸 안에 피어날
환한 들꽃

- 문학동네 199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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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림 태 주 (https://www.facebook.com/limudt)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개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는 손톱 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燈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一生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 문학동네 199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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