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동자로 美 이민, 쌀농사로 거부 돼
독립운동 최대 자금줄… '백미대왕'(Rice King) 별명
김종림(1884~1973)은 재미동포 백만장자 1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신문인이자 사회봉사자였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조국도 없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를 기회로 삼아 불과 10년 안팎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풍운아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야심찬 계획의 착수를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생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 자녀들조차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함경도 원산 출신인 그는 조선에 드리운 일제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07년 1월 2일 앨러미다(Alameda)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Salt Lake)시에 부설되던 철도 건설 노동자 신분이었다.
조국을 향한 그의 기부와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해 공립협회에 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한 그는 이듬해 정월 공립신보의 신문기계 구입을 위해 30달러를 기부했다. 가난한 철도노동자로서는 큰돈이었다.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창립, 훗날 국민회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이며 공립신보는 이 단체의 기관지이다.
재미동포 첫 백만장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종림씨의 젊은 시절
김종림은 1908년 철도노동자의 삶을 청산하고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주식태동실업회사의 전신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주관,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 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사업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종림은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식품이나 자신의 시간을 내놓으며, 이대위·이상설 등과 함께 한국에 고아를 돕는 구휼기관인 대동고아원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공립신보의 사무원으로 봉사했으며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인쇄인을 맡기도 했고, 후에는 국민보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특히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한인 2세를 위한 한글학교나 유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또는 시계를 선물했다. 훗날 비행학교의 최대 재정후원자로서 독립군 공군 양성의 대부가 되는 단초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이 무렵 김종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숙박업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아직은 사업가로서 탐색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3년 안창호·조병옥 등과 함께 흥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당시 각 1명씩이던 8도 대표 가운데 함경도 대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14년은 김종림의 인생도 바꾸었다. 그가 정확히 언제 농사에 손을 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이 해에 농사에 종사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세계곡물시장의 수급과 가격이 급변하는 격랑을 헤치며 쌀농사를 통해 거부로 떠올랐다.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미국은 반사이익을 얻었는데 이 기간 캘리포니아에서 발흥한 3대 업종이 벼농사→수수농사→조선업 순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상업용 벼농사를 시작한 때가 1912년이므로, 김종림이 이 시점에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쌀농사에 손을 댄 것은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김종림의 농토는 해를 거듭하면서 확장돼 1915년 최소 100에이커, 1916년 최소 280에이커, 1917년 최소 1030에이커, 1918년 최소 1800에이커, 1919년 최소 3300에이커로 커갔다.
김종림씨의 두아들 김진원(우)과 김두원(좌)씨. 이들 3부자는 모두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민 초기부터 돈만 생기면 기부… 1913년 안창호와 흥사단 창설
1941년 진주만 공습 터지자 58세로 입대… 유해 현충원 봉환
쌀농사로 거부를 축적한 김종림은 ‘백미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기부에서도 ‘큰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해 1918년 신한민보 식자기계 구매를 위해 200달러를 기부했다. 당시 이 신문은 “이러한 연금은 10년 미국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교회 헌금, 무연고 동포, 병에 걸린 동포를 돕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던 그는 그해 3월 치과의사의 딸인 최원희(미국이름 앨리스 최)와의 결혼식에 5000달러라는 거금을 사용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림의 심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8년 8월 29일 한일병합 8주년을 맞아 북가주 한인 85명이 김종림의 저택에 모여 넓은 마당에 식당을 준비하고 자동차 12대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가운데 망국의 한을 삼키며 독립운동자금을 걷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919년 약 1년 동안 재미동포의 독립의연금이 3만388달러25센트였는데, 이 중 최대 기부자가 3400달러를 낸 김종림이었다. 이로 인해 김종림은 임시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와 국군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한다.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하고, 즉시 이를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는 이 한 해에 약 5만달러의 지원금을 쾌척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수단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던 김종림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에 지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 아들 모두 미국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했으니, 3부자 모두 군인이 돼 일본과 싸운 셈이다.
임시정부가 김종림에게 보낸 감사장
김종림의 조국 사랑은 한국이 독립된 후에도 계속됐다. 그의 독립운동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안창호를 지지하고 후원했다는 점이다. 도산 생전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이며 동지였던 김종림은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 의장을 맡았다. 그는 재미동포 사회에서 지도자 위치를 유지했다. 1946년 장남의 결혼식 하객이 400명을 넘는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국민보의 보도 역시 당시 김종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김종림은 1920년 10월 폭풍우로 사업에 결정적 타격을 입은 뒤, 비행학교 재건을 위해 분투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한 채, 89년에 걸친 파란만장하고 이타적이며 애국적인 삶을 뒤로 하고 197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한국정부는 김종림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 만인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잘 아는 장태한 캘리포니아주립대(UC Riverside) 교수(소수인종학)나 김지수 2009년 LA애국선열추모위원장 같은 인사들은 “김종림의 업적은 현저히 저평가돼 있다”며 “조속히 재평가돼야 옳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원 일반인 공동묘지에 영면해 있는 김종림의 유해를 2009년 4월 13일 임정 수립 90주년에 맞춰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봉환했다.
[출처]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8호에 게재된 기사를 바탕으로 보완된 사실을 첨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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