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재미 언론인 한우성씨 발굴 기록
조지 리로 추정되는 인물(왼쪽). 남가주대 동아시아도서관에서 찾아낸 이 사진에는 이 인물의 이름이 ‘Young Lee’로 표기돼 있다.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기사 역시 조지 리를 ‘Young Lee’로 표기하기도 했다. 당시 신한민보가 조지 리의 한국 이름을 ‘이응효’ ‘이윤호’ 등으로 불분명하게 기재한 점을 감안하면 조지 리의 한국 이름이 ‘이영효(호)’였고 이 가운데 글자를 따 미국인들이 그를 ‘Young Lee’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같이 사진을 찍은 한인 청년들은 비행기 정비사 자격증을 딴 우병옥(가운데ㆍ미국명 피터 우)과 상하이 임시정부 비행학교 출신인 이초(미국명 찰스 리)다. /남가주대 동아시아도서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미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해 156회 무사고 출격이란 대기록을 세운 조지 리(George Lee)라는 한국인이 있었으며, 그가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1921년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한 안창남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일반적 통설을 3년 이상 앞서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공군사 연구가 등 전문가들 사이에선 ‘1920년 상하이임시정부가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이 안창남에 앞서 미국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이 관련 논문 등을 통해 알려져 있었으나 조지 리에 대한 기록은 보고된 적이 없다.
재미 언론인 한우성(53)씨는 지난 2월 24일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이자 전쟁 영웅인 조지 리의 삶이 재조명 돼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하고 조지 리의 활약을 보도한 1918년 12월 18일자 미국 일간지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 기사와, 샌프란시스코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의 1919년 6월 7일과 1920년 7월 8일자 보도, 그리고 1917년 6월 5일자로 작성된 조지 리의 ‘미군 징집 등록카드’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들 기록은 일본이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에 작성된 것들이지만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조지 리에 대해 (일본이 아니라) ‘한국 출생(a native of Korea)’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부친을 따라 7세 때 미국으로 건너온 조지 리도 징집 등록카드에 출생지를 ‘한국’, 국적을 ‘일본’이라고 기재했다. 당시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조선을 돕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보도해 조지 리가 조국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조영식 교수(역사학)는 “한우성씨 주장과 관련 기록들이 사실(事實)이라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史實)이라 할 수 있다”며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공군 박물관 측은 “조지 리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관련 기록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캘리포니아 지역 신문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1918년 12월 18일자 기사. '조지 리, 명예와 아내를 얻다(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란 제목이 달려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조지 리의 활약
사탕수수 농사 짓다 남몰래 자원 입대
인종차별 극복, 항공대서 공훈반지 받아
미국 일간지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1918년 12월 18일자는 조지 리란 전쟁 영웅에 관한 기사를 지방면 머리기사로 처리했다. 캘리포니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1895년부터 발행돼 온 이 신문은 ‘조지 리, 명예와 아내를 얻다(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란 제목의 기사로 그의 삶을 소개하면서 “무려 156회나 되는 무사고 출격을 기록해 지휘관으로부터 훈장의 일종인 미국 육군항공대 공훈반지(meritorious ring)를 받은 뒤 21세로 명예 제대했다”고 보도했다. 한우성씨는 “당시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라고 말했다.
한씨의 취재에 따르면 조지 리는 1896년 제물포(지금의 인천)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903년 3월 30일 아버지 이두형을 따라 이민선 갈릭(garlic)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캘리포니아 북부 맨티카(Manteca)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던 조지 리가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 참전을 선언하자 ‘아버지 몰래’ 미군 육군항공대(당시 공군을 대신)에 자원 입대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에게 왜 입대 사실을 숨겼는지는 보도하지 않았다.
한씨는 “조리 리가 미군 비행사가 된 직접적 동기는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을 선언하자 ‘미군에 들어가 전쟁 기술을 배워 조국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동포 청년들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미뤄 조지 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에 따르면 입대 과정은 험난했다. 미국 군대는 원칙적으로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지 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수차례 입대를 거듭 청원한 끝에 결국 미국 육군항공대에 들어갔다.
이 신문은 “군인이 된 조지 리는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켈리필드(Kelly Field) 비행장에서 훈련을 시작한 뒤 1918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미첼필드(Mitchell Field) 비행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식 파일럿이 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조지 리가 유럽 전선으로 배치된 것은 그 해 6월이었다. 이후 1918년 12월, 전쟁이 끝나고 귀향할 때까지 그는 156회의 무사고 출격 기록을 세웠다.
이에 대해 한우성씨는 “미 공군 예비역 장교들에 따르면 당시 6개월 남짓한 기간에 156회 출격했다는 기록은 거의 하늘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의미”라며 “그 자체로 경이적인 대기록”이라고 말했다.
조지 리의 활약상에 대해 당시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전쟁 중 독일·프랑스 국경지대에서 공기선을 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우성씨는 미국 예비역 공군중령인 로버트 존슨의 말을 인용해 “당시엔 비행선이 정찰기로 쓰이곤 했다”며 “여기서 말한 공기선은 비행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씨는 “그 시기엔 비행선 조종사가 전투기 파일럿으로 변신하기도 했다”며 “따라서 조지 리의 행적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가 보도한 조지 리의 최종 계급은 상사다. 한우성씨는 “미 공군에 따르면 1차 대전 때엔 미군에 비행 부사관이 있었다”며 “비행 부사관은 2차 대전 초까지 일부 존재하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져 이후엔 장교들로 조종사가 구성됐다”고 말했다. 조지 리의 계급과 관련해 캘리포니아주립대 장태한 교수(소수인종학)는 “당시 미국에선 인종차별이 합법이었다”며 “조지 리가 파일럿 자격을 획득하긴 했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 때문에 장교 계급장을 달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17년 6월 5일자로 작성된 조지 리의 ‘미군 징집 등록카드’. 출생지는 ‘한국’, 국적은 ‘일본’으로 기록돼 있다./미 육군
조지 리의 연인
롱아릴랜드 생도 시절 미국 여성과 연애
제대 후 결혼, 장인과 고무 사업 계획
조지 리에겐 미국인 애인이 있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에 따르면 두 사람은 조지 리가 롱아일랜드에서 생도로 생활할 때 서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이 신문은 “조지 리가 수개월 안에 그녀와 결혼해 뉴욕에서 장인과 함께 고무사업을 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우성씨는 1920년 7월 8일자 신한민보 기사를 근거로 “조지 리가 조선을 돕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을 세워 1920년 6월 부인이 기다리는 뉴욕으로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첫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한씨가 제시한 1917년 미군 징집 등록카드엔 조지 리에 대해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을 가졌으며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미혼이고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 국적자”라고 적혀 있다. 조국을 잃고 이민 또는 망명 생활을 하던 선조들의 비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 리의 부친 이두형
대한인국민회 회원… 봉사·기부 활동 활발
안창호 선생과 친분 다지며 애국운동 나서
조지 리의 아버지 이두형은 1903년 이민선을 타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우성씨는 이두형에 대해 “도산 안창호가 세운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한인 2세들을 위한 봉사와 기부 활동을 성실히 전개해온 동포”라며 “3·1절 2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1921년 3월 1일에 동포들과 함께 기념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자 ‘새벽 4시에 혼자 일어나 책상 앞에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씨에 따르면 이두형은 1913년 8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당시 이두형은 도산에게 “왕복 여비는 못 드려도 편도 여비는 부담하겠으며 오시면 마차로 마중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한우성씨는 “초청 서한에서 이씨는 도산의 자녀들 안부를 물었다”며 “이 점으로 미뤄 이씨가 도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우성씨에 따르면 조지 리의 한국 이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고 한다. 한씨는 “조지 리에 대해 1918년 5월 24일자 신한민보는 ‘이응효’라고 실었으며, 1919년 1월 2일자 같은 신문은 ‘이윤호’라고 다르게 게재해 현재로선 어느 것이 확실한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조지 리의 아버지 이름도 “하와이 이민국 출입자 명단에는 ‘이원형’으로 적혀 있지만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이두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좌로부터 한장호,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선
l 지금까지의 ‘한국인 최초 파일럿’들 |
미국 하늘은 1919년 노정민, 중국선 1921년 서왈보, 한국선 1922년 안창남
여성은 1925년 권기옥이 최초… 영화 ‘청연’ 모델 박경원은 1928년 첫 비행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안창남(安昌男·1900~1930)이다. 안창남은 1921년 일본 도쿄의 오쿠리 비행학교를 3개월 만에 졸업하고 제1회 비행사 면허시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오쿠리 비행장에서’란 글을 통해 “조국의 하늘에서 자신의 비행술을 선보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 1921년 11월 안창남 후원회가 조직됐고 이듬해인 1922년 12월 10일 용산에서 1인승 단발 쌍엽기 ‘금강호’를 몰고 시범비행을 했다. 그의 비행은 망국의 청년들에게 ‘창공의 꿈’을 불어넣었다. 애국심이 강했던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1925년 조선청년동맹이란 독립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무장항일단체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해 무력 투쟁을 펼쳤다. 하지만 1930년 4월 2일 중국 산시성에서 훈련하던 도중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창남으로 알려졌던 ‘최초의 비행사’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서왈보(徐曰甫·1887~1926)다. 188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병합하기 직전인 1909년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만주~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적 활동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19년 1월 28일 32세의 고령으로 중국 남원항공학교에 입학했다. 공군박물관은 서왈보에 대해 “1921년 11월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그가 안창남보다 한 해 먼저 비행기 조종사가 됐음을 밝혔다.
하지만 서왈보의 기록을 깬 한인 청년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지난 1992년 ‘1920년 임시정부 군무총장(국방장관) 노백린 장군 등이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사 양성소에서 오림하, 이용선, 이초,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등 6명의 비행사를 배출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1920년 4월 독립신문은 최초의 조종사 6명이 탄생했다는 사실과 함께 약 40명의 조종훈련생이 미국에서 양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좌로부터 이용근, 권기옥, 박경원, 안창남
이들에 앞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에싱턴(Essington)비행학교를 나와 미국 해군비행사가 된 노정민이 1919년 비행학교를 마치고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일단의 재미 동포 청년들은 조지 리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최초의 한인 비행사로 알려져 왔다.
최초의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는 권기옥(權基玉·1901~1988)이 꼽힌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4년 중국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인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4월 20일 중화민국 항공처 부비행사로 임명돼 10년 이상 조종사로 활동했다.
영화 ‘청연’의 모델로 알려진 여류비행사 박경원(朴經遠·1901~1933)이 비행사 자격을 딴 것은 권기옥보다 3년 뒤인 1928년이다. 박경원은 1925년 일본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해 3년 뒤인 1928년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했다. 진취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1933년 8월 7일 아끼던 ‘청연(靑燕)호’를 몰고 조선을 향해 날았지만 이륙 50분 만에 시계를 잃고 추락했다.
| ‘조지 리’ 발굴 재미 언론인 한우성씨 |
상하이임정 비행학교 취재하면서 조지 리 존재 확인
“조지 리의 활약이 임정 비행학교 설립에도 도움 됐을 것”
“조지 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말을 직접 했는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활약상이 당시 재미 동포 사회에 공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조종사를 양성하자는 열기를 북돋운 것은 확실합니다. 조지 리의 활약 이후인 1920년 상하이임시정부가 재미 동포들의 지원 속에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운 게 이를 방증합니다.”
‘한국인 최초 비행사’ 조지 리를 발굴한 재미 언론인 한우성(52)씨는 조지 리라는 인물이 갖는 의의가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인 비행사 중 ‘최초’라는 기록에만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를 통해 당시 재미 한인사회의 공군 육성에 대한 의지와 상하이임정 비행학교로부터 출발한 대한민국 공군의 기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공군사 연구가 등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세워진 상하이임정 비행학교가 우리 공군과 공군사관학교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한우성씨는 상하이임정 비행학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조지 리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인 최초 비행사’로 흔히 알려진 안창남보다 앞서 윌로우스 비행학교 등을 졸업한 한인 청년들이 미국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비행학교 설립 전인 1918년 1차 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한국인 조종사가 있었다는 또 다른 사실은 짜릿한 것이었다. 한씨는 조지 리에 대한 상세 기록을 찾기 위해 지난 1년간 미국 각 도서관을 뒤졌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신문에 난 조지 리의 기사를 찾아냈고 그의 징집카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지 리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만 구했을 뿐 100% 확실시되는 사진을 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한씨는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줄곧 기자생활을 해 왔다. 미주 한국일보와 통신사인 뉴아메리카미디어(New America Media)에서 작년까지 일했고 올해부터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 한씨는 그동안 한인 이민사와 종군 위안부 문제 등 현대사에 얽힌 이슈들을 추적해 왔다. 미국에서 진행됐던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도 깊숙이 관여했고 이와 관련된 논문도 썼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미국계소수기자상, AP통신 기자상도 수상했다.
한씨는 국내에서는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영웅인 고 김영옥 대령 ‘전도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사망한 김영옥 대령을 생전에 장기간 인터뷰했고 2005년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을 펴냈다. 미국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김영옥 대령에게 프랑스 정부가 자국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 한국 정부가 태극 무공훈장을 추서하게 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작년에는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설립 지원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영옥 연구소’ 지원 관련법은 지난 정기국회에서 통과됐다.
[출처]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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