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혼례청에 처려진 곡자상(穀字床)의 유래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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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는 고려말 제25대 충렬왕(1274-1308)부터 제32대 충정왕(1348-1351) 때까지 무려 77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때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내시, 노비, 공녀(貢女)를 진상해야 했습니다. 또 탐라총관부(제주도), 동령부(자비령 이북), 쌍성총관부(철령 이북)를 원나라에 내줘야 했습니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遠征)을 간다며 고려군으로 동정군을 편성하고 함선, 군량, 병기, 선원, 집기 등을 고려에 부담시켰습니다. 매국적인 친원파들은 한술 더 떠서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원의 일개 성(省)으로 개편하자고 주장했으나 익제(益齊) 이제현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시기에 슬기롭게 원나라에 맞선 분이 대성리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할아버지입니다. 곡 할아버지는 1335년(충숙왕 4)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원나라 수도에 있을 때 동녀구색(童女求索·어린 처자를 구하여 찾아냄)을 말아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 순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 상소문의 글귀가 어찌나 절절하였는지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상소문의 일부를 보면 

“어린 여자들을 모아 놓고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이 채워지면, 미인이라도 놓아주고 다른데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면 수십 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기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대성통곡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두기도 하고, 이웃마을에 숨겨 놓기도 합니다. 그럼 친족들을 묶어 놓고 매질하고 주리를 트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지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있고, 대들보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

이 간곡한 상소문에 원나리 순황제도 감동하여 곡 할아버지의 상소를 받아들여 공녀제도를 1356년(공민왕5)에 중단합니다.

이렇듯 공녀 문제를 해결한 곡 할아버지가 고려로 돌아오자 부녀자를 비롯한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환영했는데 그 인파가 송도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곡 할아버지는 1351년(충정왕 3)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지만 곡 할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구국활동은 훗날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영토 탈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백성들은 공녀제도를 단절시킨 곡 할아버지의 보은에 감사하는 뜻으로 초례청에 곡자상(穀字床)을 만들었습니다. 

곡자상(穀字床)이란 곡 할아버지의 ‘곡(穀)’자를 따고 '상(床)'은 보은에 감사하며 올리는 제상(祭床)이라는 의미로 곡자제(穀字祭)라고도 합니다. 곡자상은 혼인 때 초례(醮禮)를 치르기 전에 초례청 한 구석에 곡자상을 마련하고, 보은제를 드리는 민간풍속으로 자리잡아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한일 합방 후 정신대 모집에 방해스러운 풍습이라 판단한 일제에 의해 미신이란 구실로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고려 말 당시, 딸이 태어나면 공녀를 피하기 위해 남장시켜 키웠고, 어린 나이에 결혼시키고 아니면 승려가 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처녀보고 가시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가짜사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녀제도는 조선의 친명파 사대부에 의해 부활됩니다. 조선 전기 태조에서 세종까지 7차례 114명, 후기에도 2차례 27명이, 명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세종 때에도 명에 공녀를 바치는데, 한 교자에 7명씩 태워 20리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성노리개로 공출까지 했습니다.
일제는 가정 이곡 할아버지와 목은 이색 할아버지로 부터 이어지는 한산이씨의 절개가 바탕이 된 조선정신을 말살하고자 치밀한 준비를 했습니다. 조선사 편수회의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 1932년) 박사(조선식민사관기여학자로 친일사학자 이병도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를 지냈다)가 1925년에 총독부제출한 한 고적답사 보고서로 이윤경 선조의 묘소를 전설로 조작합니다. 

마치 단군조선의 사실의 역사를 허구의 단군신화로 변조한 이마니시의 수법의 판박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식민사관을 몰아내야할 필요성을 곡자상이 7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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