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성결교 이명직 목사에 대한 연구 - 서울신학대 설립자 성결교 목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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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목록에 등제된 밝을 명자 이명직 목사는 목숨 명자를 쓰시는 제 고조부와 같은 항렬로 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집안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같은 한산이씨였습니다. 일제 36년을 살았던 조선인으로 제 고조부나 증조부처럼 목숨을 초계처럼 버리며 저항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진하여 친일한 자들만 추려서 처벌하고 이미 죽었다면 부관참시라도 할 일이지만 살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행한 친일에 대하여는 진실을 적시하고 사과를 받고 용서해 주었으면 합니다.]

  

애국지사 이명직 선생과 한글 함자가 동명이인 이명직 목사

이명직 목사의 제적등본을 통해본 이명직 목사의 가문 - 한산 이씨 


성결교 이명직 목사


  친일인명사전에 개신교인이 51명이 수록되어 있고 그 중에 한국 기독교성결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명직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수록된 주된 친일이유는 이명직 목사 이름으로된 성결교회 해산성명서와 신사참배허용이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일제의 어용교회 일본성교회와의 통합에 반대했고 구약제거에 반대했으며 그로 인해 1943년 5월 24일 체포되어 12월 28일까지 무려 7개월간 온갖 고문과 심문을 당했다. 그리고 성결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명직 목사 한사람의 일이었다면 분명 이명직 목사는 목숨을 내놓고 순교하는 한이 있어도 성결교회의 해산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신사참배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조선성결교 신자들의 목숨과도 관련된 일이었기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으로 서울신학대 교회사전공 박명수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또한,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친일에 대한 교회차원의 반성문을 개신교계에서는 유일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성결교단도 지켜내고 감리교신학교, 경성신학교, 조선신학원의 통합도 막아낸 공적이 있다 하겠다. 


  한국에서 의미있는 한 개인을 이야기함에 있어 ‘가문의 이야기’는 필수적이다. 이명직 목사의 출생 연대가 구한말이고 그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그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명직 목사의 가문과 관련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명직 목사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자료는 없다.  


  이명직 목사의 가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우선 이명직 목사 스스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또한 그동안 이명직 목사에 대한 연구가 형식적이었다. 이명직 목사의 제적등본에는 가문에 대해 “본(本) 한산(韓山)”(1) 이라고 기록한다. 이명직 목사의 가문이 ‘한산 이씨’(2)라는 말이다. 


  이명직 목사가 황성기독청년회(서울 Y.M.C.A.)(3)학관에 다니던 시기, 이명직 목사의 가문에는 당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방황하던 대중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문중의 같은 항열에 같은 이름을 쓰는 구한말과 대한제국시절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낸 '성우 이명직'(4) 대감과 할아버지뻘인 ‘월남 이상재’선생과 문중의 조카인 ‘수당 이남규’(5)선생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이명직 목사는 실제로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명직 목사는 서울 Y.M.C.A.학관에서 공부하며 월남 이상재(6)선생과 직․간접적인 만남(7)과 교류가 있었다.  


  이명직 목사는 “은혜기”를 비롯한 다른 기록에서도 자신의 집안이나 가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자녀들의 이름을 가문의 ‘항열표’(8)에 따라 돌림자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5남 4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2남(男)과 3남(男)은 유아 때에 잃었고, 3남 4녀가 성장하였다. 이명직 목사의 아들들의 이름은 종규(宗珪), 인규(寅珪), 완규(完珪)이고, 딸들의 이름은 문규(文珪), 정규(貞珪), 현규(賢珪), 은규(恩珪)이다. 이처럼 딸들의 이름까지도 ‘한산 이씨 가문의 항열표’(9)를 따르고 있음을 통해 이명직 목사의 가문에 관한 관심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명직 목사의 가정과 아버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의 가정은 오랜 유교전통에 물들었고 아버지는 완고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성태’ 혹은 ‘이승태’이며 대궐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근무하였다.(10)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이명직 목사의 부모는 아들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이명직 목사의 증조모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천주교에 입문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11)


  이러한 견해에 따라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는 '이성태’(12)라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이승태’(13)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결과는 애초부터 잘못된 연구이고 연구의 기초자료인 제적등본 조회조차 하지 않은 결과이다. 또한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는 이성태’라는 주장도 아버지 항열자가 '승'자라는 한산 이씨 항열자 조회조차 하지 않은 연구태만이다.  


  제적등본을 통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이성태’도 아니며 ‘이승태’도 아니다.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는 ‘이승원’(李承源)이다. 이명직 목사의 “제적등본”에는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는 이승원(李承源)이고 모친은 박계원(朴啓源)이다.(14) 그동안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이성태’ 혹은 ‘이승태’(李承泰)는 이명직 목사의 숙부(큰아버지)의 이름이다. 이명직 목사의 가족 중에는 ‘이성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    


위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이명직 목사의 제적등본에는 “서기일구삼팔년(西紀壹九參八年) 십월삼일(拾月參日) 분가(分家) 신(申), ..., 경성부(京城部) 죽첨정(竹添町) 삼정목(參丁目) 삼십오(參拾五)번지(番地) 호주(戶主) 이승태(李承泰) 질(姪) 분가(分家)”라고 적고 있다. “호주(戶主) 이승태(李承泰) 질(姪) 분가(分家)”라는 의미는 이명직 목사가 ‘호주 이승태의  질(姪)’(15) 즉, ‘조카인데 분가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명직 목사의 직계 가족관계를 각각의 제적등본을 통해 정리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6) 


  “조부(祖父) 이원익(李元翊), 조모(祖母) 이석현(李錫鉉), 부(父) 이승원(李承源), 모(母) 박계원(朴啓源), 본인(本人) 이명직(李明稙), 처(妻) 박선낭(朴仙娘)(17)이다.” 


  그렇다면 “이명직은 아버지 ‘이성태 혹은 이승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인 ‘이승원(李承源)’에게는 이승태(李承泰)와 이승희(李承熙)라는 두 형(兄)이 있었는데, 형제들의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을 경우이다. 둘째는, 제적등본을 검토해본 결과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인 ‘이승원’은 일찍 별세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로서 이명직 목사 연구의 권위자 이한복 선생이 제적등본 주소지인 ‘서울특별시 성북구청’에 확인을 요청(18)하였지만,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인 ‘이승원의 제적등본’은 찾을 수가 없었다.(19) 또한 이명직 목사의 호적이 이승태의 “제적등본”에 질(姪)로 등재되어 있다. 그 이후 이명직 목사는 1938년 자신이 호주(戶主)로 분가할 때까지 ‘이승태’의 ‘호적’에 등재되어 있었다. 즉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인 이승원은 일찍 별세하고, 그 이후 ‘조부인 이원익’과 ‘숙부인 이승태’의 집에서 성장함에 따라 숙부인 ‘이승태’라는 이름이 아버지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결국 이명직 목사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성태’ 혹 ‘이승태’로 알려진 것은 이명직의 가정배경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직 목사는 어린 나이에 생부인 이승원(李承源)의 별세로, 하나밖에 없는 형제인 동생(20)과 함께 할아버지 이원익과 숙부(큰아버지)인 이승태의 집에서 성장했고 이명직 목사의 어린 시절의 내면적인 갈등이 얼마나 심했을 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명직 목사의 "은혜기"에 기록된 그의 청소년기 갈등의 원인은 바로 이와 같은 성장 환경에 기인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그 동안의 이명직 목사의 가정배경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오류가 있었으며, 전반적인 재검토와 교정이 불가피함을 입증해준다. 예를 들면, “이명직은 서울 충정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 이성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명직의 아버지 이성태 혹은 이승태 는 대한제국의 대궐 주전원 전무과의 주사로 근무하였다”(21)는 주장들과 또한 “이명직의 아버지는 아들이 신학문을 배워서 출세하기를 바라고 일본 유학을 권했고 이명직 또한 원하던 바였다.”(22)는 등의 터무니 없는 주장도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이명직 목사의 친일행위에 대한 성결교단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나온 이명직 목사의 친일관련 내용(23)이다:


1938년 개신교에서 각 교단 대표들이 솔선해 신사참배를 할 때, 성결교에서는 이명직이 대표로서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교의 홍택기 등과 함께 일본 신사를 방문해 신사참배를 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러 일제는 강압적으로 성결교단을 해산하도록 했는데, 이때 이명직을 필두로 한 성결교 지도자 7인이 성서가 그 기본을 유대 사상에 두어 국체에 반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으므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의 성결교회 해체 선언서를 발표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2005년 예비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개신교 인물 47명 중 성결교단에서는 이명직과 박현명 두 사람이 선정되어 오랫동안 잠복해 왔던 신사참배 및 친일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에 대해 교단 측은 국가보다 신을 중심으로 삼는 이명직의 "신중심적 국가관"을 이유로 들거나 그의 내면에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교단을 이끌다 보니 신사참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동정론 등을 내놓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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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1)  이명직의 “재적등본”에 기록되어있는 사항. 

(2)  ‘한산 이씨’는 중시조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신 양반 집안 가운  데 하나이다. 이명직은 목은 이색의 19대손이다.   뿌리찾기운동본부, 「나의 족보」, 10권, (서울: 뿌리찾기운동본부, 2001), pp.71,72. 참조.  

(3)  이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황성기독청년회’는 ‘서울 Y.M.C.A.’로, ‘청년회 학관’은 ‘Y.M.C.A. 학관’으로 표기한다. 

(4)  이명직(李命稙 혹은 李明稙, 1867년 1월 11일~1915년 9월 7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5)  이상재(李商在, 1850.~1927. 3. 29),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월남(月南).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자료출처: “인터넷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상세한 내용은 지면상 생략함.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m=all&articleID=b17a3591b 

(6)  이남규(李南珪, 1855.~1907. 8.19.),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수당(修堂),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승문원권지부정자․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95년 민비학살사건 후에는“청복왕후위호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讐疏)”를,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등의 상소를 올린 구한말 항일유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906년 항일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일본군에게 압송 당하던 중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인터넷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m=all&articleID=b17a3030a 

(7)  이상재는 특별히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 하였다. 이명직은 “은혜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상재의 “성경공부반에 들어가” 성경을 배웠다. 

(8)  ‘항열(行列)’이란, 흔히 이름의 ‘돌림자’를 의미하는 말임. 제정표(制定表)는 돌림자를 미리 정해 놓은 표를 뜻한다.

(9)  ‘한산 이씨 대동항열 제정표’의 자료출처: < http://victory0504.hihome.com/ >참조.

(10)  이현갑, 「이명직목사 생애와 신학」, p.38. 

(11) 이천영, 「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1970). p.59.

(12) 박명수,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사역”, 「역사신학 논총」, 제8집, p.259. 송기식, “이명직목사의 삶과 신앙”, p.22. 정상운, “李明稙論”, p.22.

(13) 조종남, “고 이명직 목사 약력”, p.57. 정인교,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설교”. http://sgti.kehc.org/data/person/mjlee/3.htm. 

(14) “李明稙의 제적등본”.

(15) ‘질’(姪)은 ‘조카’를 뜻하는 말이다. 

(16) “李元翊, 李承泰, 李明稙의 제적등본”.

(17) 이명직의 부인인 ‘박감은 여사의 호적상 본 이름’이다. “李明稙 제적등본”.

(18) 발취 참조: 이한복 - 이명직 목사의 가정과 신앙배경에 관한 연구 - 1909년 동경성서학원 입학 이전을 중심으로 -

(19) “제적등본”이 기록되어있지 않음. 제적등본이 작성되기 시작한 1984년 이전에 별세하신 것으로 판단된다. 

(20) ‘이승원’은 장남 ‘명직’(明稙)과 차남 ‘정직’(庭稙)을 두었다. ‘이정직’은 大正七年(1918년) 황해도(黃海道) 연백군(延白郡) 유곡면(柳谷面)으로 分家함. “李元翊 제적등본”.

(21) 박명수,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사역”, p.259.

(22) 송기식, “이명직 목사의 삶과 신앙”, p.22.

(23) 이명직(李明稙, 일본식 이름: 牧野明稙, 1890년 12월 2일 ~ 1973년)은 한국의 성결교 목사이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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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이명직 목사의 친일의 증거 제시되는 문건 2건과 성결교단의 반박 성명서 1건


다음은 실천문학사에서 1987년에 나온 [친일논설선집]에 실린 것이다. 같은 내용이 [성청50년사]에도 실려 있다.

1. 성결교 해산성명서

우리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회는 조선에 포교 이래 삼십 오륙년, 그간 장기에 긍(亘)하여 미국인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것뿐이 아니라 재정적 기초도 역(亦) 미국에 의존하여 왔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적 미 영사상의 로(虜)가 되어 상금도 기(其) 잔재를 말살키 어려움은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더구나 교리로서 신생(新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의 4중 복음을 고조하여 왔었는데 취중(就中) 재림의 항은 기독이 가까운 장래 육체로서 지상에 재림하여 유태인을 모으고 건국하여 그 왕이 될 뿐만 아니라 만왕(萬王)의 왕인 자격으로써 전세계 각국의 주권자로부터 그 통치권을 섭정(攝政)하여 이를 통치한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신관에 대하여도 성서의 해석에 기(基)해 에호바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재 아등(我等)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昏迷)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

아등은 최근 이 점에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여하히 하여 성서의 해석을 우리 국체의 본의에 적합케 할 것이냐에 관한 연찬(硏鑽)을 거듭하여 왔으나, 필경 성서는 그 기지(基址) 유대사상에 두어 우리 국체의 본의에 배반하는 기다(幾多)적 치명적 결함을 포장하는 것으로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치 못한다면 완전한 국민적 종교로서 성립하지 못할 것으로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수 유력 신도 간에는 현 시국에 감(鑑)하여 아등의 전시(前示) 소견(所見)과 동일 소견 하에 자숙 자제, 교단(敎團)의 자발적 해체의 요망이 있자 이들 신도의 총의에 응하는 것은 아등 교단 간부와 부하(負荷)한 책무인 것을 통감하고 자(玆)에 아등은 단호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개명 일본기독교 조선성결단)를 발전적으로 해체(解體)하게 되었다.

아등은 장년월간(長年月間) 부지불식 중에 그와 같은 불온(不穩)포교를 하여 온 책임을 통감하고 이금(爾今) 맹세하여 결전 하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치 않을 것을 기함.
우(右) 해체에 제해 중외에 성명 함.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일본 기독교 조선성결교단)

목야명직(牧野明稙/이명직) 산본정도(山本正道/최석모)
무촌 건(茂村 鍵/이 건) 신정현명(新井炫明/박현명)
식산영택(植山永澤/최영택) 신정형순(新井瑩淳/박형순)
안전창기(安田昌基/안창기)

쇼와 18년 12월 29일

2. 八紘一宇(하꼬 이지우)의 大理想

이명직

八紘一宇는 大日本帝國의 建國情神이오 理想이다. 神武天皇께옵서 卽位하옵실 때 詔勅을 나리시옵기를 "六合을 兼하여써 都邑을 열고 八紘을 덮어 집을 삼는 것이 또한 可하지 아니한가" 하시었으니, 이는 널리 全世界를 合하여 一家를 만든다는 넓고 큰 理念이니 이를 또한 皇道라고도 한다.

建國以來 歷代天皇은 이 情神을 實行하시여왔으며, 지난 날 日淸. 日露 兩戰爭도 이 理想을 實現하는 것이었으며 滿洲事變도 이 理想을 實現하는 것이었으며 現下 支那事變도 이 理想을 體現하려함이며 南總督의 슬로강인 內鮮一體도 이 情神을 高調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基督敎로 이 八紘一宇의 大理想과 內鮮一體의 슬로강을 볼 때에 우리 聖書信仰에 矛盾될 것이 없는 것은 聖書는 벌써 이 情神을 가르치었고 또 基督敎는 이 情神을 實現하는 過程에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三章十四節에 "天과 地에 在한 諸族屬에게"란 諸族屬은 原語에 一家族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는 宇宙一家主義를 말하는 것이다.

또 人類의 祖上은 一始祖로 시작되었으므로 四海兄弟主義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냐 故로 이는 皇道情神인 同時에 聖經情神이다. 皇軍은 밖에서 이 理想을 實現하려고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建設하는 中에 있다.

우리 基督敎는 안에 있어 內鮮一體의 實을 擧하여 傳道報國의 赤誠을 다하는 것이 國民으로서의 忠義를 다하는 것이고 또는 基督者로서의 使命을 遂行하는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 敎會는 新年에 際하여 加一層 이 情神을 高調하여야 할 것이다.

활천 1940년 2월호

3. 성명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포함 된
성결교단 인사에 대한 교단의 입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4월 29일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본 교단의 이명직 목사와 다른 한분의 교단 지도자가 포함된 데 대하여 유감을 표하며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표한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검토를 끝내고 이들의 행동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단의 명운이 걸린 극한 상황에 교단의 대표로 대응하는 과정에 일어난 일로 판단하고 지난 2007년 교단 창립 100주년을 기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교단의 이름으로 사죄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이러한 우리의 판단은 적절한 것이라고 본다.

이명직 목사는 당시 성결교단이 주창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 권세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전도주제를 <일본의 패망을 선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성결교단을 핍박하고 마침내 교단을 폐쇄 조치하는 극단적 상황에 교단의 대표로서 대응해가는 과정에 일어난 언행이었던 것이었고, 또 다른 한분은 일시적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어 그 이름이 올랐을 뿐 달리 어떤 친일적인 언행을 한 기록이 없음에도 수록 대상자로 명단에 등재한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 판단 된다.

일제 강점 기간이 자그마치 35년이라는 긴 세월이다.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이런 긴 세월을 일제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국외로 망명을 하든지 아니면 싸우다가 죽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도저도 아닐 경우 굴종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따라서 사리사욕을 취하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적극적인 친일자를 찾아 단죄하는 것은 마땅할 것이나 그러나 자신이 속한 단체나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행한 불가피한 언행에까지 단죄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본다.

친일행위자를 단죄하려다가 고난의 역사를 감내하며 지켜낸 인사들이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후손에 의하여 함부로 단죄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2008년 5월 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 회 장 백 장 흠 목 사
역사편찬위원장 방 인 근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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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3: 성결교단이란 무엇인가?


성결교단의 장·단점
이정익 목사(한복협부회장, 신촌성결교회 담임), 한복협 발표문
성결교단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다음으로 1907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금년으로 107주년이 된다. 성결교단은 비교적 조용하면서도 내실을 다져가는 형태로 교단을 운영하고 있고 교단이 표방하고 있는 신앙 노선은 순수 복음주의적 신앙노선을 따르고 있다. 성결교단이 지니고 있는 장단점을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I. 성결교단의 장점
1) 민족애로 우리의 힘으로 자생시킨 교단
성결교회가 시작될 즈음의 역사를 보면 무엇보다 민족을 생각하여야 하는 난국의 시대였다. 그런 면에서 한국성결교회의 시작의 이면을 보면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과 함께 운명을 나누면서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큰 고난을 자처한 숭고한 민족애의 유산이 서려 있다. 그 시대에 한국성결교회는 선교사들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기원하였다. 정빈, 김상준 두 사람은 이미 일본에 선교하기 위하여 진출하여 있던 동양선교회가 세운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후 1907년 귀국하여 복음전도관을 스스로 열어 전도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성결교회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 두 사람의 동경성서학원 유학은 동양선교회의 초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구도적 의지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이식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유학하여 기독교 복음을 국내에 전래시킨 교회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 후 정빈, 김상준으로 하여금 든든한 후원자로 동양선교회가 계속 배후에서 힘이 되어 주기는 하였으나 한국 전도는 그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준 것이 아니고 한국인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1911년 토마스 감독이 한국에 들어와 성서학원을 개원하기 이전에 이미 복음전도관에서는 25명 가량의 신학생들에게 성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한국인 선교를 위한, 한국인 선교를 위한, 한국인 교육자에 의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의 꿈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건강한 중형교회들을 가진 교단
성결교회에는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없다. 그 대신 전국 도시마다 건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중형교회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래서 성결교단안에는 상호간 대형교회가 주는 위화감은 비교적 없는 편이다. 성결교단의 목회자들은 목회외적 활동인 교단정치활동의 장이나 대외선교 또는 대사회사업의 장이 작은 편이어서 목회에만 치중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 결과 작지만 교회중심과 목회중심으로 사역하여 각 도시마다 소형교회와 중형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목회자들이 뜨거운 기도와 동역자의식으로 연대하여 중형교회들을 만드는데 서로 협력하고 있다. 지방별로 목회자들이 매월 매주 함께 기도회를 하므로 목회의 중심을 기도로 잡아가고 있다. 또한 지방회별로 선교비를 모아 작은 교회들의 동반성장 및 최저 생계비 보장(월 150만원)을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결교단은 타 교단에 비해 미자립교회가 적은 편이다. 현재 성결교단의 전체 교회 비율 미자립교회는 60%로 나타나고 있다.
3) 한국교계를 잇는 가교적 역할
한국성결교회는 한국기독교에서 주류교단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은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주류는 결코 정통보수적인 신앙도, 현대문화와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도 아닌 온건한 복음주의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것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일반신자들은 교리싸움만을 일삼는 보수주의도, 이해하기 힘든 자유주의 신학도 거부하고 성서적인 신앙을 소박하게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바로 이런 소박한 복음주의의 신학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신학이 성결교회이며, 그 신학교가 서울신학대학교라고 생각한다. 성결교회의 이러한 신앙적인 유산이 메이저 교단과 마이너 교단 사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대형교단은 연합활동을 함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메이저 교단들은 항상 서로 견제하며 경쟁자의 입장에 서 있게 된다. 그 중간에서 가교적 역할을 하는 것이 성결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교단은 신학적으로나 교단 성향으로 볼 때 어느 교단에서도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이 가교적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II. 성결교단의 단점
1) 해외에 파트너가 없다.
성결교단은 자생적 교단이기 때문에 해외에 파트너나 연대적 뿌리가 없다. 고로 해외에서 성결교회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수반된다. 모든 교단들은 해외에 뿌리가 있고 파트너가 있어 국제적 교류나 연대 그리고 세계화를 이루어 나가는데 훨씬 수월하다. 신학생들이 유학을 갈 경우 협력 자매교단이 없으므로 여러가지 편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역할 교회나 연합기관 그리고 선교현장에 진출하는 장이 훨씬 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학을 할 경우 특별히 교리적으로 일치된 학교로 가지 못하고 칼빈계통이나 오순절 계통 또 웨슬리적 계통 등 다양하게 유학하므로 귀국 후 신학교에서 연구 및 가르칠 경우 신학의 일관성이 결여 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유학과정에서 습득한 연구방법론과 연구과제에 대해 더욱 지속적인 연구활동 및 체류가 어렵고 귀국 후에도 성결교단과의 공통성이 결여된 연구결과나 활동상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이같이 협소한 교단상황이 세계적으로 기여하는 타 신학단체나 기관들과의 적극적인 만남도 어렵다. 상대방이 성결교단을 알아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음으로 성결교단의 참여 희망자가 스스로 창의적 주도적 참여가 어려우며 기여가 어렵다.
2) 메이저 교단에 대한 콤플렉스
한국교회는 장, 감, 성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결교회는 그중 가장 작은 교단으로서의 대형교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고로 메이저 교단들을 따라가다 보니 교단의 체제나 제도에 독창성이 상실되고 장로교단화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는 성결교단이 지니고 있어야 할 고유성을 고집하지 못하고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성결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콤플렉스는 목회자나 평신도들로 하여금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교계 연합사역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그리고 정체성 면에서도 성결교단 지도자들이 교단명칭이나 사중복음에 대해서 갖는 자긍심이 약할 수밖에 없다. 오늘 타 교단에서 오히려 오늘의 시대가 성결시대라고 말하고 하는데도 성결교단에서는 그 명칭을 부담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중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생겨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3) 대사회적 역할의 부족
성결교단은 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참여에 한계가 있고 비교적 소극적인 편이다. 한국성결교회가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세를 성취하게 된 데에는 직접전도가 주요한 요인이라는 점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한다. 직접전도는 사회참여와 반대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웨슬리안 성결교회 전통은 사회참여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은 기존의 교회들이 이미 도외시한 도시빈민들을 상대로 한 전도 운동이었다.
한국성결교회는 사회봉사를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6.25전란 중에도 각 기관별로 꾸준히 구호활동을 전개하였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균명중고, 인천의 인천영화중학교, 여주의 대신중학교를 세워 선교의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사회사업 기관으로는 대전의 영생양로원 외에 12곳의 고아원을 세웠다. 또 은퇴한 여교역자를 위한 성락원을 세워 운영하였다. 교단 밖으로는 군목제도 창립에 동참하여 창설에 기여하였다, 특히 조선기독교연합회(NCC)를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그 산하 기구인 재건연구위원회 등 기독교 연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었다. 초창기 성결교단은 한국 교계 연합활동이나 대 사회적인 사역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왔다.
그런 과정에서 1961년에는 교단의 분열로 기성과 예성으로 갈라지는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 분열은 분열로 끝난 것이 아니고 교단의 재결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합사업이나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예성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후 대 사회적인 사역 자체가 위축되어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역사적 전통에서 벗어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성결교회가 오늘 사회참여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는 비판은 이같은 내부적인 요인에서 기인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I. 결론
우리는 성결교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교단에 비해서 성결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신앙 노선 그리고 대 사회적인 역할이나 교계 역할에서 어느 교단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 더 적극적인 역할과 참여가 요청되고 있는 것은 우리 성결교회가 보완하여야 할 과제이기는 하다. 그리고 교계나 사회가 몹시 탁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에 성결교회가 지나치게 좁게 생각하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성결의 신학과 신앙을 더 강조하여 요한 웨슬리가 18세기 영국사회를 구원한 것처럼 성결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브랜드를 적극 활용하여 이 시대에 요청되는 역할에 소임을 다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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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재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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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목사의 친일 문제에 대한 논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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