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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순종
순종과 각료들
1919년1월 고종 장례식
고종 독살설(高宗毒殺說)은 대한제국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원인이 일제의 사주로 인한 독살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과 함께 후일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영향을 준 하나의 동인이 되었다.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때도 심하게 부풀어져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부분은 독극물 중독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했다.
고종 독살설은 당대에 크게 떠돌아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5년까지는 이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그 이후로도 공식 조사된 바 없어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은 당시 67세로 적지 않은 연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양위를 당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 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한혁명단에서 고종황제를 망명시켜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도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사실일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되고 있다. 더구나 고종황제는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으로 지원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설이 사실일 경우 관련자로서 거론되는 인물은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 등이 있으며, 어의인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들로서 특히 이완용은 일본 천황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설이 있으며,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한 궁녀는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 묘자리 조성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맞구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康寧殿)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원래 직업인 건축가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앞서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난다
명성황후 장례 행렬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고종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였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아침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다.[25]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동대문
수구문
왕실 영빈관
한강
서울시내
정동의 러시아 대사관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水兵)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년) 2월 11일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어윤중 또한 살해되었고, 유길준·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 제국과 가까워지며,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 제국은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때, 고종이 다른 나라의 공관에 피신하여 다른 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우리 나라의 자주권이 심하게 훼손된다. 그리고 그 이후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게 된다.
파고다 공원
청계천 빨래터
배재학당
이화학당
간호대 졸업생
공사장
공공 버스
기생들
마님 행차
야채 장수들
종로 장작 시장
판매를 끝낸 남꾼이 밥을 먹기 시작하여 피맛골이 형성됨
홍수 피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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