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2_麟齋遺稿年譜

1.인재유고(麟齋遺稿)의 인재 이종학 선조를 기리며.....(140121)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4.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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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종학  인재공(諱 種學 麟齋公) 1361~1392


麟齋公의諱는種學 이요 字는仲文이니 高麗 文靖公 諱 李穡先生의 仲子 恭愍王10年 辛丑(1361年)에  松京(開城)에서出生 (1361. 8. 25 )하여 年僅 14세에 司馬試에合格. 16歲에大科及第하여 卽時 藝文館檢閱에 任命되고 丁巳( 1377年: 長子 諱 叔野 出生年)에는 翰林直學士에 除授司되어 春秋館 編修官 知製敎에 올랐으며,여러번 昇進하여中正大夫(從3品) 成均館 司成에 이르렀다. 乙丑(1385年)에는 奉順大夫(正3 品) 判內府 寺事知典 法司事에 올랐고 얼마 안되어三司右平 藝文館 直提學에 승진하고 正順大夫(正3 品)에 올랐다.丙寅年(1386 : 4子叔畝 出生年)에는 다시 成均館에 들어가 大司成이 되어서 날마다 大學生들과 함께 道義를論하고 禮法을 講論하니 當時 士類芳들이 모두 公에게 心服했다.丁卯(1387年)에는 判典敎寺事 藝文館知製敎로 옮기고 다시 春秋館 修撰官 知典理 司事의 일을 맡았다. 戊辰年(1388 :五子叔福出生) 봄에는 密直司 右代言 知軍簿司事로 옮겨서 成均館의 일을 맡았다. 이해 겨울에는 奉翊大夫(從2品) 密直提學商談 都監事 寶文館 提學 同知春秋館事 上護軍에 승진했다.


  이로부터 國政에參與하여 處理하게 되니 朝野의 소중히 여기는 人望이 公에게로 돌아갔다.己巳(1389 年) 昌王 元年 봄에 知貢擧가 되니 世上에서는 사람을 얻었다 일컬었다.이해 여름에는 簽書密直司事 同判會議都監事 知書筵事 進賢館 提學을 拜하니 公의나이 겨우 29세였다. 이때 高麗는 운수가 장차 다해서 날로 잘못되어 갔다.
李太祖는 禑王과 昌王을廢位 하고恭讓王을 擁立하니 公은 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 敢히 玄陵의 命令을 어기고  廢位하는 것을제 마음대로 하여 姓을 바꾸고 아비를 바꾼단 말인가 하고 易姓革命에 抗拒하고 끝까지 高處皇室을 扶護하다가 罷免과 同時에 彈劾을 받아 五次에 걸쳐 流配 當하니 順天,濟州,鎭天,茂長, 등지이다.成昌에서 茂長으로 移配途中 居昌에서 鄭道傳이 부린 體핵使 孫興宗에 依해 絞殺 當하니 李太祖 元年 壬申(1392年) 年이었다.


 士林은 麟齋先生의 忠節을 追慕하여 韓山 文獻書院과 開城 都山書院, 鎭川 百源書院에 配享하였다.先生은 不事二君의 忠節로 靑春을 바쳤으니 千載史籍에 빛나며 世人君子의 推仰을 받는 愛國忠節之士이시다. 先生은 天稟 이 端雅하고 밝고 지혜로우며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어려서 작난하고 놀때에는 文字를 좋아 했고 外傳에게 글을 읽으면서 부터는 잠자고 식사할 때가 아니면 책상을 떠나지 않았으며 이미 읽은 글은 외우지 못하는 글이 없었다. 成童이 되기도 전부터 抱負가 풍부하고 가정의 교훈이 몸에 배어서 伊洛의 淵源과 올바른 學文을 알게되니 그 아버지 牧翁은 과조의 興을 일으켰고 한때의 老成하고 경험많은 사람들도 모두 그 뛰어난 재주를 경탄해 마지 않았다 한다.


 先生이 귀양가기 작전 글을 남겨 여러 아들을 경계 하기를“네 아비가 충성으로 국가에 보답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여기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은 야예 科擧를 보지 말라”하고 떠난 이후 무촌역에서 목졸림을 당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는 8월28일이요. 春秋는 32세였는데 맏아드님은 겨우16세의 소년이엇다.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돌렸으며 심지어 철시했고 길 가던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또한 탄식했고 애석해 했다. 이때 文靖公은 아직도 귀양살이에 있어서 禍를 헤아릴수 없는 狀況이었다. 그후 公은 墓所와 配位이신 양성군 부인의墓所는 실존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後孫 觀察使 泰淵에 이르러 穆隱先生을 꿈에 뵈오니 分明히 命令하시기를 麟齋 아무에 墓를 네가 그 文稿를 찾는다면 墓도 또한 찾을수 있으리라 하고 그 뒤에 先生의 遺稿 백여편을 얻었으니 이는 곧 後孫 文懿公 자가 領議政 惟淸公 宅에서 文輯을 보고 編纂한 것이다.


 거기에 跋文이 있어서 대략 先生의 禍입은 狀況과 墓所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드디어 봉분을 다시 하고 墓表도 세웠으니 이는 곧 長湍郡 小南面 有德里 王陵洞이다.옛날에는 소나무의 標本을 세워서 아들이 아버님 墓를 찾은 일이 있더니 지금은 후손의 꿈에 현몽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墓를 알려주었으니 그 일이 더욱 기이하도다.선생은 陽城李氏 門下侍中 春富의 따님에게 장가 들어서 그 夫人이 郡夫人이 되었는데 貞淑한 行動이 족히 君子의 배필이 될만 했다. 3月에 24日에 卒하니 그 年代는 자세히 알 수 없고 墓所도 合부됐다고도 하고 혹은 失傳 됐다고도 하는데 亦是 자세하지 못하다.


 六男一女를 낳으니 아들 叔野는 아버지의 교훈을 지키서 벼슬을 하지 않아서 光州牧使를 除授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叔畦(숙휴)는 晉州牧使요 叔當(숙당)은 右軍 僉摠制요 叔畝(숙무)는 刑曹判書로써 諡號는 良度요 叔福(숙복)은 文科에 뽑혀 成均館 直講에 올랐고 叔치(숙치)는 左贊成으로서 諡號는 順節이다. 따님은 正郞 李漸에게 시집갔고 孫子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世子 佐賓客 權近編 "穆隱先生 諱穡行狀"에는 男六에 女二라 하였으나 長은 適正尹李漸 하고 次는 幼하였을뿐 그 後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成長하지 못했음이 分明한 듯하다. 어쩔수 없는 南北分斷으로 지금 高揚 점산에는 公의 神壇이 모셔져 있고 公의 神道碑는 位置 變動이 不可避 함으로 1998年3月27日 점산入口 路邊에 새로 세웠다.


출처.....韓山李氏 麟齋公派 列先祖 略歷 .....광목공파 종회 발간..................





출처: 옥광천 순복 숙부님 블로그 http://blog.daum.net/sunbok50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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