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족보를 날조하여 시조를 바꾼 성씨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19.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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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guard.or.kr/phpeuc/board.php?board=sub0302&command=body&no=17

작성자: 안택수 80세

작성일: 2011-09-22 

 

종래의 두 죽산 안씨(竹山 安氏 )가 1976년(丙辰년)에, 중국의 롱서 이씨(隴西 李氏) 이원(李瑗)이라는 가공인물(架空人物)을 시조의 아버지로 꾸미고 그 아들 3형제가 성(姓)을 받고, 이름을 바꾸어 한국의 모든 안씨(安氏)들의 시조라고 족보를 만들더니, 불과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족보를 만들면서 허구인물 이원이 중국 당나라(唐)의 종실사람(宗室人)이라고 신분을 바꾸어 동쪽으로 와서 전공으로 안씨 성을 받았다고 하여 두 죽산 안씨가 하나로 합친 족보의 실상을 고증한다.

☆. 당나라 종실사람이란 당나라를 세운 唐 高祖 李淵의 일가붙이를 말한다. 특히, 전혀 관련이 없는 광주 안씨(廣州 安氏) 시조를 가공인물 이원의 둘째 아들이라고 끼워 붙이고, 시조이하 13대를 기록하여 광주 안씨 시조를 모독하고 성씨근본을 모욕하는 명예훼손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죽산 안씨 족보를 낱낱이 고증하여 광주 안씨 후손에게 알려 주니 절대로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한다.

★. 고찰한 근거문헌.

    가. 죽산 안씨 족보: 1976(丙辰)죽산안씨대동보. 1999(己卯)죽산안씨대동보. 1917(丁巳)죽산안씨세보. 1923(癸亥)죽산안씨세보.
    나. 역사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사. 동사강목. 신당서. 자치통감.
    다. 죽산안씨측 자료: 안씨원류(죽산안씨대종회.‘05.8.27.) 죽산안씨대종회보 7.8.10호(‘00.3월.’00.12월.‘05.5월) 죽산안씨측이 주장하는 고증자료(‘07.4.8.죽산안씨 대종회장 안국승씨 제공).
    라. 성씨종합계보서: 씨족원류(조종운.1680년찬). 조선씨족통보(윤창현.1924년)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한국족보대전. 성씨의 고향.
    마. 백과류서(百科類書): 대동운부군옥(권문해.1589년찬). 증보문헌비고(1908).

1. 죽산 안씨 시조의 선계와 시조라는 인물은 날조한 가공인물이다.

   가.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先系)라는 이원(李瑗)이 농서(隴西)이씨(李氏)로 당나라(唐) 종실사람(宗室人)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는데, 이국정의 아들은 이기(李錡). 이일(李鎰). 이풍기(李豊器). 이풍사(李豊士) 로 네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국정이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에 반군 장수 왕진(王振)에게 붇잡혀 당 보응 원년(唐 寶應 元年. 762)죽임을 당할 때 두 아들 (풍기. 풍사)도 같이 죽었다. 이국정의 큰 아들 이기(李錡)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로 당 헌종(憲宗)황제에 항거한 죄로 원화 2년( 807.丁亥). 11월 11일에 당나라 도성인 장안(長安) 흥안문 성밖에서 그의 아들 이사회(李師回)와 함께 허리를 꺽어 죽이는 (腰斬)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이기의 나이가 67세 때다. 이국정의 둘째 아들 이일(李鎰)은 이국정과 그 윗대 선조인 신통(회안정왕 神通)이 당나라의 개국공신이므로 제사를 받들도록 용서를 받았다.

         ※. 新唐書: 열전 제3.宗室. 열전 제149上. 叛臣 上. 자치통감: 唐紀53. 참조.

    나. 죽산안씨대동보(1999년己卯)에 그 시조의 아버지(선계)가 이원(李瑗)이고 아우는 이황(李璜)인데 두 사람은 당나라 종실사람 이국정의 아들이라 하는데 당나라 종실세계(宗室世系)에 없는 사람을 날조한 것이다.

         ※.신당서 卷70 上. 表제10上. 宗室世系 上. 참조.

    다. 이황(李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시조이고. 고려 덕종(1033). 문종(1063)때 사람으로 당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 고려사 권5. 세가5. 고려사권8. 세가8. 고성 이씨 족보. 참조.

    라. 이원이 당나라 종실사람도 아닐뿐더러 가공인물이니 그의 세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허구인물이다.

2.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와서 전공(戰功)이 있고 安씨가 되었다 는 것은 거짓이다.

   가. 이원. 이황이 당 헌종 원화2년(丁亥. 807)에 동쪽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 송악산 아래에 살았다는데, 가공인물이 어찌 올 수가 있는가? 807년에는 당나라 종실사람 이기가 처형을 받아 죽은 해다.

   나. 이원과 이황이 광주(廣州)사람이 그 성주를 죽이는 민란이 일어난 것을 토평하는 전공으로 신라 국왕이 이원에게 안씨(安氏) 성을 주고 이황은 이씨 성을 갖게 하고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했다면서 그 근거로 신라 헌덕왕 7년(815)의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된 지역은 서쪽변두리 지 역이니 개성이나 광주(廣州)가 아닐뿐더러  이원이나 이황이 평정했다는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7년조 .참조.

    다. 헌덕왕14년(822)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기록을 이용하여 이원. 이황이 전공(戰功)이 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지역은 지금의 공주(公州)지역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이었고 당시 한산 (漢山.)은 지금 광주(廣州)로 스스로 지켰고,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의 인물기록 등이 자세하여 이원이나 이황은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 14년조. 참조.

    라. 또, 헌덕왕 때에 백성에게 姓을 주었다는 기록과. 봉군(封君)한 사실이 삼 국사기(신라본기)에 없다.

3. 이원의 세 아들이 전공(戰功)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改名), 봉군(封君)받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가. 신라 경문왕 4년(甲申.864) 갑신왜란(甲申倭亂)에 왜구를 소탕한 공으로 이 원의 세 아들이라는 지춘(枝春)은 방준(邦俊). 엽춘(葉春)은 방걸(邦傑).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이름을 바꾸고. 죽산군(竹山君). 광주군(廣州 君). 죽성군(竹城 君)으로 봉군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4년에 왜란이 없으며, 경문왕 재위 14년 동안에도 왜란이 없었으며. 당시에 죽산. 광주. 죽성 이라는 지명(地名)이 없었고, 일반 백성에게 봉군하는 일이 없었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문왕 4년조 내지 경문왕조 전부. 참조.

      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 당나라 종실사람이라는 이원이 없는 인물이니 그 자식이라는 세 사람도 허구인물인 것이다.

      다. 신라 때 성을 왕이 준(賜姓) 일은 신문왕 3년(683)에 보덕왕 안승(安勝)에게 김씨(金씨)를 준 일. 애장왕 6년(805)에 왕의 어머니를 숙씨(叔씨)로 당 나라가 준 일. 이외에는 없다.

      라. 죽산 안씨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빙자하면 1908년 당시에 떠돌던 항간의 낭설을 기록한 것일 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없으니 거짓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 특히, 광주 안씨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출자(出自)와 성씨연원(姓氏淵源) 을 모방(模倣)하고 도용(盜用)하여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거짓족보(僞譜) 를 만든 것이다.

4. 종전(1976년 이전)에는 죽산 안씨는 어떤 족보기록을 가졌는가?

     가.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는 준(濬. 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두 문중이 1744년. 1805년에 각각 족보를 간행하며 분명하게 따로 계대를 이어왔음이 그들의 족보 기록과 각종 성씨계보 문헌에 확실하 다.

          ※.죽산안씨세보(1917.1923.). 씨족원류. 대동운부군옥.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참조.  준계(濬系)와 영의계(令儀系)의 1930년대 이전 후손의 비문(碑文). 행장(行狀). 시장(諡狀)등에 기록한 시조의 이름(諱)을 고찰.

      나. 영조 20년(甲子.1744)에 준계(濬)인 죽산안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씨족원류(氏族源流. 조종운이 1680년에 필사 편찬한 종합성씨보)를 보고 해당 계파를 베껴서 참고 하였다는 안상휘(安相徽)의 족보서문(序文)과. 순조 5년(乙丑.1805)에 처음으로 간행한 영의계(令儀)의 죽산안씨는 안성흠(安聖欽)이 쓴 족보서문(序文)에서 시조와 계대(系代)가 모호하다는 고충을 기록한 것이 보인다.

      다. 두 죽산안씨 문중이 항간에 떠돌던『隴西李氏東來說』이나『죽산안씨 同源譜』를 두 문중의 1919년 이후 일제강점하의 족보에 또 다른 가공인물인 안윤채가록(安潤彩家錄)(安潤彩.안윤채는 두 죽산안씨 족보에 이름이 없어 가공인물이다.) 이라  하면서 범례(凡例). 또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며 “믿지 못한다(尙難徵信)“라고 하였다.

      라. 또한, 두 문중의 고려이후 조선조에는 이름난 선조가 있고 그 개인의 행적을 보아도 중국 사람이나 당나라 종실사람과 한 점 관련이 없다. 

      마. 고려. 조선조 때의 전통사회에서 죽산 안씨. 광주 안씨. 순흥 안씨 간에 서로 결혼(結婚)으로 얽혀있음을 보면 성씨만 같을뿐 다른 계통임이 분명한 것이다.

5. 결론.

     가. 성씨의 격(格)을 높이려는 수단으로 가공인물을 만들어 1976년에 족보를 합쳐 조작하고,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시조의 격(格)을 높여 조작하여 사람들을 현혹한 것으로 짐작한다. 

     나. 또 조작한 족보에 광주 안씨와 순흥 안씨의 시조. 선조들을 같은 계통으로 기록하 였으니 죽산 안씨는 족보로써 다른 안씨의 姓氏 根本을 侵犯한 범죄적 행위를 져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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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에 머문 사람들

오원 安在弘
 
 
한국학의 본산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와 한국인이 된 귀화한 성씨들.
한국이 좋아,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인이 된 성씨들.
굴러들어와 박힌,
자기의 ‘성’까지 바꾼 사람들의 ‘씨’입니다.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에 머문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이 너무 좋아 중국인이 되려는 조선 사람 죽산안씨.
 
하나를 더해야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디 한국인이었다가 중국 사람이 된 죽산안씨,
중국의 ‘동북공정’의 하나로,
역사기록 날조에 빌붙어 놀아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산안씨.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찌든 얼빠진 한국인 죽산안씨.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시조가 중국인이었답니다.
조선 말까지는 안준, 안영의, 안원형, 안범 등의
여러 갈래의 조상을 모시던 죽산안씨.
조선 왕국이 망할 때부터 거짓소문을 내기 시작하여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발전을 거듭하던 1976년, 안준 ․ 안영의 계열을
한 데 묶어 족보를 만들며 새로운 시조를 만들었습니다.
안방준(安邦俊),
중국 농서 지방에 살던 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답니다.
 
奇한 일은,
또 다른 죽산안씨 갈래였던 안원형 ․ 안범(우산 안방준의 고조) 계열은
‘순흥안씨가 되겠다’는 노력이 먹혀들어
순흥안씨 경신(1980년)보에 기록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죽산안씨 우산 안방준(安邦俊 1573~1654)과 그의 후손들은
'순흥안씨 죽성군파'가 되었습니다.
ㅍㅎㅍ핳ㅎㅍㅎ
 
중국인 安邦俊은 한국인 安邦俊과 똑같은 글자로 씁니다.
 
(구)죽산안씨는 중국인 '안방준'을 새로운 시조로 만들고,
(新)죽산안씨 '우산 안방준'은 '순흥안씨 우산'이 되었습니다.
 
(구)죽산안씨들은 우산 안방준의 존재를 몰랐는지?
(구)죽산안씨들은 우산 안방준을 시조로 모시려는 게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당췌. 머리 휘둘립니다.
 
왜, 한국의 安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웃기고 있습니까!
무리 지어 사람을 웃기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들은 희극인입니까?
개그맨입니까?
 
어둡던 세상에는 아는 이들이 적어서 별일 아닌 듯이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대명천지(大明天地)
아니 달나라의 토끼를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
기록을 날조하여 환부역조(換父易祖)를 하다니!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바꾸는 일'을 벌리다니!
세상에나, 세상에나.

 

1.중국계의 귀화성씨

 

  우리나라 많은 성씨가 그 연원을 중국에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당수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정착한 인물을 그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중기 이후에는 

중국을 동경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입각하여 각 문중이 족보를 편찬할 때 자기 집안 시조의 연원을 중국과 결부시키려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음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성씨들.

 

강릉유씨(江陵劉氏) · 평해황씨(平海黃氏) · 연안이씨(延安李氏) · 함양여씨(咸陽呂氏) · 결성장씨(結城張氏) ·

안강소씨(安康邵氏) · 함양오씨(咸陽吳氏) · 진주강씨(晉州姜氏) · 거창장씨(居昌章氏) · 풍천임씨(豊川任氏) ·

신안주씨(新安朱氏) · 달성하씨(達城夏氏) · 아산호씨(牙山胡氏) · 공촌엽씨(公村葉氏) · 해주오씨(海州吳氏) ·

제주좌씨(濟州左氏) · 평양조씨(平壤趙氏) · 임천조씨(林川趙氏) · 배천조씨(白川趙氏) · 밀양당씨(密陽唐氏) ·

태안고씨(泰安賈氏) · 수안계씨(遂安桂氏) · 광천동씨(廣川董氏) · 성주초씨(星州楚氏) · 김해해씨(金海海氏) ·

성주시씨(星州施氏) · 임구풍씨(臨胊馮氏) · 용강팽씨(龍岡彭氏) · 수원백씨(水原白氏) · 문경전씨(聞慶錢氏) ·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 · 청주갈씨(淸州葛氏) · 강화만씨(江華萬氏) · 나주정씨(羅州丁氏) · 용궁곡씨(龍宮曲氏) ·

통천태씨(通川太氏) · 영산신씨(靈山辛氏) · 현풍곽씨(玄風郭氏) · 광주노씨(光州盧氏) · 회양후씨(淮陽后氏) ·

휘주요씨(徽州姚氏) · 충주매씨(忠州梅氏) · 서산정씨(瑞山鄭氏) · 진주사씨(晉州謝氏) · 연안송씨(延安宋氏) ·

안산여씨(安山汝氏) · 합천마씨(陜川麻氏) · 풍덕포씨(豊德包氏) · 창원공씨(昌原孔氏) · 상주주씨(尙州周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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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방씨(溫陽方氏) · 상주방씨(尙州方氏) · 영양남씨(英陽南氏) · 진주소씨(晉州蘇氏) · 보성선씨(寶城宣氏) ·

청주양씨(淸州楊氏) · 제주원씨(濟州元氏) · 곡산연씨(谷山延氏) ·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 등. (추가

竹山安씨

)

 

2. 몽골계의 성씨

 

  몽골계의 성씨로는 연안인씨(延安印氏)가 있습니다. 시조는 1270년 제국대장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온 인후(印侯)라는 사람입니다. 인후의 본래 이름은 ‘후라타이’였는데, 당시 대장군이었던 교동인씨(喬桐印氏)인 인공수(印公秀)의 집에 있으면서 그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인공수의 성을 빌려 자신의 성씨를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합니다.

 

3. 여진계의 성씨

 

  여진계의 대표적인 성씨로는 청해이씨(淸海李氏)가 있습니다. 청해이씨의 시조는 이지란이란 사람인데 본래 그의 이름은 ‘퉁지란’으로서 태조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이성계와는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4. 위그루계의 성씨

 

  우리나라의 위그루계 성씨로는 경주설씨(慶州楔氏)가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이름이 높았던 설순은 위그루계인 경주설씨입니다.

 

5. 아랍계의 성씨

 

  아랍계의 대표적인 성씨로는 덕수장씨(德水張氏)가 있습니다. 조선 효종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기도 한데 당시 4대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우의정을 지낸 계곡 장유 선생을 배출한 집안입니다.

 

6. 베트남계 성씨

 

  우리나라에 귀화한 베트남계 성씨로는 화산이씨가 있습니다. 화산이씨의 시조는 본래 베트남의 왕자였는데 정치적 환란을 피해 우리 한반도에 정착한 분의 후손입니다.

 

7. 일본계의 성씨

 

  일본계의 성씨로는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있습니다. 우록김씨라고도 하는데  시조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문화와 인심에 감복하고 귀화한 사야가 김충선입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호를 모화당(慕華堂)이라 하고 조정으로부터 김해김씨를 사성 받습니다. 경상도에 있는 녹동서원은 모화당 김충선을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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