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어이없는 일을 경험했다.
오늘도 고서점에 들러 새로들어 온 서적이 무엇이 있나 살펴보고, 서점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점 주인은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민영휘의 호를 고종이 하사하였다며 민영휘 호가찍힌 한적(송자대전)을 보여주었는데, 이번이 두번째이다.
본인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고서점을 다니니, 나에게 자랑할겸 그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눈치이다. 나는 솔직히 매국노인 민영휘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 나는 무조건 친일을 청산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다. 친일파 중에도 악질자가 있고, 어쩔 수 없이 소극적으로 친일한 이도 있으니, 이를 분별하여야 한다고 본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기준에는 신중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 중에는 한일합방을 유도했거나, 초창기부터 일본에 밀붙어 호의호식하며 친일한자와 어쩔 수없이 수십년이 지나서 소극적으로 친일한 이를 구분하여야 한다. 35년간 일제하에 있었는데, 친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새 들어왔는지, 서가 뒷편에서 한 노인이 이완용이가 훌륭하다고 한다. 머리가 좋으며 글씨가 명필이라는 것이다. 국운이 어쩔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고 가만이 있을 내가 아니기에 그 노인으로 눈을 돌려보니, 노인치고는 아주 큰키로 훨친하였으며 외모로 봐선 고생이라곤 하지 않고 살아온 모습으로 젊어서는 멋쟁이 소리를 들어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지요"라고 했더니, "국운이 그래서 그렇지 글씨도 잘 쓴 명필이고 머리도 좋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똑 같은 말을 한다.
"이완용이는 나라를 팔아 먹었어요? 일본하고 돈을 흥정한 매국노입니다."라고 이번에는 좀 큰 소리로 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돈은 일본이 하사금으로 주어서 받았다"고 하며 한치도 부꾸러워 하기는 커녕 위풍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이완용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완용이 머리가 좋고, 글씨를 잘 써서 훌륭하다니 이놈이 어느 나라 놈이란 말인가?
나는 기본이 안된 자에게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냥 두고 넘어가면 똑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니기에 철모르거나 모자라는 이는 이에 동조하여 그야말로 국운에 불길을 자초하기 때문이고, 누군가 제지해야 한다. 그런 자에게 자신의 행동이 잘 못이 되어 큰 창피라도 당하여 두번 다시 그런 말을 공개적을 못하게 할 의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에게 있다. 그러니, 즉흥적이지 않은 의도적 적극적 행위다.
요즘, 어느 놈이 이런 말을 퍼트리는지, 이런 말을 두번 째 들었다. 이완용이 후손이거나 아니면 이완용이와 친인쳑 관계되는 놈들이 퍼트리는 게 아닌가?
아니면, 요즘 고서화점에 이완용이라는 글씨가 등장하는데 값이 안나간다. 그러니 장사꾼들이 그 값을 올리려고 퍼트리는 지도 모른다. 아뭍은 이상하게 이완용 옹호자가 나타는 현상이 있다.
물론 이완용이는 글씨를 잘 섰고, 초대 독립협회 회장도 지냈으나, 종자부터가 좋지않다. 머리가 좋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나, 머리 잘 굴리는 자들이 보편적으로 배신자가 많으니 이완용이도 그 중에 하나 일것이다. 설령 머리 좋으면 무엇하나, 우리는 머리 좋은 자들을 이유없이 숭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사람이 국가, 지역사회 및 국민을 위해 기여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해방전후, 좌파인 박헌영 홍명희 등 많은 이들은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김일성에게 갔으나, 그 결과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민족에게 기여는 고사하고 자기 생명마저 지키지 못했다.
이중 유일하게 홍명희가 김일성에게 대접을 받았다는데, 홍명희 딸이 김일성의 첩이 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김일성이 그 사건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홍명희를 대접해 주었다는 것을 몇년전 북으로부터 온 믿을 만한 이로부터 최근에 얻었다.
이완용은 미국영사도 지내고, 아관파천의 주모자였고, 영어와 로어를 했으나 일본어는 못했다. 그런 놈이 당시 직위를 미끼로 우리민족과 나라를 제 개인 소유물처럼 일본에 흥정해 말 그대로 팔아먹었다.
본관은 우봉이놈이고 고향은 지금의 분당이며, 어려서 이호준에게 양자갔는데, 이호준이 이하응과 친하였으며 또한 조대비와 친하여 이런 연고로 이하응의 아들을 조대비에게 천거하여 왕(고종)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완용이가 이하응(대원군)과 고종으로부터 각별한 시혜를 받았다. 이 정도면 그 놈이 머리가 좋고 나쁘고 논할 필요도 없이 승승장구한다.
그래도 그 더러운 놈에게 꼭꼭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선생님,국운이 그래서 이완용이가 나라 팔아먹었으면, 독립운동한 분들은 국운이 어때서 독립운동했습니까?"라고 큰 소리로 따졌더니, 이 놈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당신이 독립운동 후손이오" 나는 당당하게 "그래요, 독립운동 후손이오"라고 했더니, 그 놈이 약간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그런 줄 몰라 미안하다고 해야하는데, 한 술 더 떠,
"내가 당신보다 알아도 더 많이 안다"고 큰 소리친다. 이런 개만도 못한 사람탈을 쓴 짐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놈이 나와 만난지 불과 5분도 안되었는데 이 놈이 나를 어떻게 안다고 이런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요즘 "친일사전을 만들고 그러는데 잘 못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 같이 생각하니, 좌파들이 보수꼴통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게 빨갱이들에게 책잡히고 빨갱이들 판 만드는 겁니다."
그래도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칭했다. "선생님은 우봉이씨입니까?"라고 했더니 "전주이씨"라고 한다. 더욱 한심하다. 그래서 "전주이씨들은 할말이 없어요.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았오." 차마 이성계라고 하지는 안했다.
그 놈이 전주이씨라는데 그놈 조상인 이성계를 거명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서 "정도전이는 조선을 세우며 고려 충신들,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죽었오."
그랬더니,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대답이 "내 자부가 정몽주 17대손이오"라고 한다. 어이없는 놈이다. 그게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독립운동한 분들에 대해 조금도 예를 안 갖춘 놈이 620년전의 정몽주의 후손이 제 며느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인가? 이 놈은 뭘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지 무조건 제 놈 유리한대로 갖다 붙이는 놈이니, 이완용와 똑 같은 놈이다.
여기서, 국사를 제대로 안다면 정몽주는 이성계의 하수인이었다.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의 작이 아니고 심광세의 위작이라는 것을 입증한 나로서는 웃기는 이야기다.
정몽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성계에게 충성한 사람으로 고려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재평가되야 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고려를 뒤업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분명하게 "조선개국에는 두 정(정몽주와 정도전을 지칭)이 있다."라고 태조(이성계)가 말한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단, 마지막에 가서 이성계일파에게 죽음을 당했지만, 이는 정몽주가 자기들 편인데 마지막에서야 뜻을 같이 안해 그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죽인 것 뿐이다.
정몽주는 이성계 휘하에서 고려가 정치적 어려움에 있을 대, 이성계일파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공로자이다. 정몽주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안했으면, 결코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니, 정몽주는 고려를 지킨자가 아니라 이성계를 지킨자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근데, 이 놈이 하는 말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죽일 놈은 죽여야 한다"고 내밭는다. "죽일 놈이라니 죽여야 돤다"니, 독립투사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한 더러운 놈이다. 이런 놈이 대한민국에서 현재도 살고 있다니, 내가 그 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때 그 놈이 내뱉은 태도에 비하면 극존칭에 해당된다.
난, 더 이상 이 개 돼지만도 못한 이 더러운 놈을 상대한다는 자체가 불결해 서둘어 서점을 나왔다.
(여기서, 놈이라는 표현은 과격하지만, 독립투사를 생각하면 그 놈이라는 표현도 모자라기에 사용했으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비하한 것이 절대 아니며, 이런 못쓸 놈을 비하한 것 뿐이며, 전주이씨를 거명한 것은 그 놈이 전주이씨라고 했기에 그 놈에게만 해당되오니, 전체 전주이씨가 아니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완용 1858- 1926]
처음에는 친러파로 아관파천을 주도했으나 이후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자 을사조약·한일합병의 주역으로 민족을 배반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추원의원·고문을 역임하면서 각종 단체에 참가하여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아버지는 석준(奭俊)이며, 10세 때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에게 입양되었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주서가 되었다.
이어 대교가 되고 그후 수찬·검상·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거쳐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소환되어 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에 갔다가 12월에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하여 약 2년간 있다가 돌아왔다.
대사성·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육영공원판리·교환서총판 등을 역임했다.
1895년 학부대신이 되고 중추원의관이 되었으나,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형인 이윤용(李允用)과 함께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의 알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澈)·이재순(李載純) 등과 더불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동하고 친러내각의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서리를 겸직했다.
이 시기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위원장·회장을 지냈다.
1897년 고종이 환궁하자 세력을 잃고 평안남도관찰사·전라북도관찰사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1901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서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까지 겸했다.
1907년 의정부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를 겸했고,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며 고종의 양위를 주장하여, 궁내부대신을 겸하면서 고종의 퇴위를 성사시켰으며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8월 매국친일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회생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훈1등 백작과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같은 해 중추원고문이 되고 1912년에는 중추원부의장이 되었으며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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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외에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의 많은 명예직을 겸하며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이완용 가계도 : 주요 친일인사]
▲ 대를 이어 일본에 충성한 대표적 친일파 일가인 이완용 집안은 조부와 부친, 손자 3대에 걸쳐 작위를 세습했다. 이완용 일가 가계도.
이완용 글씨 족자 한 지식인의 행동이 유구한 나라의 민족사를 철저히 짓밟아 놓았다. 개인의 욕망과 지성인의 심지(心志)는 어떠해야하는가. "上苑春先入 中園花盡開 惟餘幽徑草 尙待日光催"
항상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오늘 우리의 공부도 무수한 이완용이를 양산하는 무책임한 지식과 외래 문물 추종의 만용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속에서도 매국노의 정서속에 꿈틀대는 일향성(日向性)을 느낄 수 있다.
궁궐의 동산에 봄이 먼저 드니
동산가운데 꽃이 다 피었네
오직 남아있는 깊은 그늘 길의 풀들은
아직도 햇볕이 빨리들기를 기다리네
1926년 오늘, 친일파 수괴 이완용(1858~1926)이 경성 옥인동 자택에서 죽었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 호의호식하다가 평안한 임종을 맞았으니 세상사가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장례는 일본 순사들의 호위 속에 호화롭게 치러졌는데 고종의 장례와 맞먹을 정도였다.
전북 익산시 낭산면에 묻혔으나 묘가 계속 훼손되는 바람에 순사들이 경비를 서야 했다. 해방 후 소풍온 초교생들이 묘를 짓밟고 수시로 파헤쳐지자 1979년 증손자가 유골을 화장, 묘가 없어졌다. 이완용과 아들, 손자 3대가 친일에 앞장서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완용은 현금만 300만원(현재 가치 600억원)을 보유한 ‘조선의 현금왕’이었고 아들도 씀씀이가 큰 조선 제일의 부자였다.
그러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돌팔매를 맞았다. 장손 이병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고 또 다른 손자 이병주는 멸시를 견디다 못해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으며 증손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직계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문조차 보전하지 못한 것으로 매국의 죄과를 일부나마 치른 셈이다.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을망정 그 더러운 이름은 천년을 가도 지워지겠는가.
박병선 논설위원
이완용 (李完用 ; 1858~1926) |
친일파의 거두로서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경덕(敬德)이다. 그리고 호는 일당(一堂)이며 아버지는 석준(奭俊)이며, 10세 때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에게 입양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 출생이다.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검교(檢校) ·수찬(修撰) ·동학교수(東學敎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8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 ·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18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형인 이윤용(李允用)과 함께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의 알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澈)·이재순(李載純) 등과 더불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하고 그 후 친러파로서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당시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한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즉, 1909년 12월 22일 상오 11시 30분이었다. 이완용이 명동천주교회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것을 이재명(李在明)이 군밤장사로 변장하고 교회당 문 밖에서 밤을 굽고 있다가 달려들어 단도로 찌른 것이다. 옹위하는 이완용의 집 하인을 먼저 찔러 죽이고 땅에 엎어진 이완용의 복부를 여러 번 찔렀는데 이완용은 병원의 가료로 죽음을 면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에 의해 국권을 피탈당하게 한 후 그 공으로 훈1등 백작과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외에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의 많은 명예직을 겸하며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다가 묘에 사람들이 똥물을 끼언지니, 후손이 파헤쳤는데,명정에 "우봉이 ...."라고 쓰여진 것을 누군가 박물관에 보관하여 영원히 기억해야 하여야 한다며 원광대에 기증했는데, 이병도가 연구한다며 가져가 소각시켯다 한다. 랑케의 실증사학을 평생 우려먹던 이병도가 명백한 역사적 실증자료를 소각시키다니 이런 몹쓸 자가 사학하였다니, 우리 국사 대부분이 이 병도에 의해 주장인데, 제대로 된 역사일가?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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