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김 득 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2. 1.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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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김 득 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 머리말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 '국군의 아버지'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6. 맺음말


1. 머리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가 한국 땅에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이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이것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이것조차 이전부터 그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군 관계인물이나 그의 배후 역할에 주목한 언론인․정치학자․역사학자들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하우스만 개인을 다룬 논문이 이미 2편 나와 있다. 하우스만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사람은 밀레였다. 최근 도널드 클락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의 하우스만 뿐 아니라 한강교 폭파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글을 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하우스만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하우스만이 행했던 역할을 군 형성과정의 비사(秘史) 정도로만 취급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다. 하우스만이 주로 정보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우스만과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정일권이나 백선엽조차 그들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만을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정일권이나 백선엽의 책을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 전직 한국군 장성들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을 언급하기를 꺼렸다면, 그 이유는 하우스만이 이들 장성들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우스만이 너무나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순사건 때 정보장교 자격으로 최초의 정보군 관계 대책모임에 참석했던 고정훈의 회고록에는 하우스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나와 있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 어찌보면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 아니 미군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군부가 수 십년 간 좌지우지했던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정보 업무가 그렇듯 그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지기에는 활동영역이 너무나 컸고, 고위층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 박노자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과 행동을 아는 것은 (젊은이들이) "배우지 못한 또 다른 현대사 속에 어떤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가, 그리고 한국현대사에서 대미 관계는 어느 정도 종속적이었는가"를 아는 것이며, 하우스만을 한국사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임스 하우스만을 한국군의 형성과정과 연관시켜 보고자 한다. 이 같은 측면은 이미 지적되어 온 바이지만,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이용되지 않았던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상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한편 하우스만은 '국군의 아버지'라는 얼굴 이외에도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한 반공국가 형성과정은 '누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자격심사과정에 다름 아니었는데, 이 때 '좌익 빨갱이'는 너와 나를 가르고, 국민과 비국민을 결정하는 주요한 잣대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학살은 국민자격을 심판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여순사건 진압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등 반공체제 구축에 전력 질주하는 바, 하우스만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하우스만은 단지 배후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학살이 있을 수 있게 만든 든든한 말뚝이었다.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은 1918년 2월 28일 뉴저지주 러니미드(Runnemede)에서 아버지 존 하우스만(John Otto Hausman Sr.)과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건축업자이자 청부업자였는데 이름에서 나타나듯 독일계 사람이었다.

러니미드의 중학교와 뉴저지 오두본(Audubon) 고등학교에 다니던 하우스만은 그의 나이 16세에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나이로는 부모 동의를 얻지 않으면 도저히 군 입대를 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형의 이름을 빌어 지원하게 되었다. 원래 제임스란 이름은 그보다 6살 위인 형의 이름이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지은 존 오토 하우스만 쥬니어(John Otto Hausman Jr.) 였다. 그는 자신이 입대한 이유를 '형은 누나를 만나러 가고 혼자 남아있는 상황' 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집은 커 보였고 '외로웠다'고 회고했다.

군대에 들어간 하우스만은 메인주 맥킨리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에는 형의 이름을 공식적인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얼마간 파나마에 근무하기도 한 하우스만은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 아들을 낳은 다음에는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Des Moines)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어 배치되었다. 이는 하우스만이 원하던 보직은 아니었으나 월급은 많았다. 하우스만의 상관은 그가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이 부대에 배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이 부대 교육에 필요한 군사경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 뒤 중위로 승진한 하우스만은 6개월이 조금 넘어서 다시 대위로 승진하였다. 소위에서 대위까지 6개월만에 빠르게 승진했던 것이다.

그 뒤 하우스만은 미주리주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본대로 귀환하게 된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하우스만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난 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에 한국으로 파견되게 된다. 이 때 하우스만의 나이는 28세였다. 하우스만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다른 동료 군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에 머물러 있고 싶어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이들과 달리 한국에 선뜻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갖고 호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군인의 자세에 충실한 판단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러치장군을 만난 하우스만은 점령지 군사행정은 싫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그의 부임 신고를 들은 러치는 "자네 기록을 보니 병사이므로 프라이스 대령이 국내 보안부서를 조직 중에 있으므로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하게. 우리는 지금 정치적인 이유로 보안부서 조직이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입장이지"하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점령한 상태에서 양측은 남과 북에 군대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남북에는 미소양군과 치안유지만을 위한 경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남한 군대는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하우스만은 미군정 하에서 조선경비대 창설요원으로 배속 받으면서 남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프라이스 대령에게 신고한 후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시키고 확장하는 일을 1개월 정도 맡았다. 이 당시는 경기도의 1연대만이 한국 내의 유일한 완전한 규모의 연대였다.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의 생활에 대해 "내 군대경험 12년에 비추어 그 곳의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한편 하우스만은 춘천 8연대 활동에 대해 주기적으로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에게 보고하곤 했는데, 배로스는 하우스만의 보고서를 눈 여겨 보았다. 드디어 배로스는 하우스만을 찾아와 서울로 와서 자신의 수석보좌관 일을 맡아달라고 청하였다. 1946년 8월부터 하우스만의 본격적인 활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하우스만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배로스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했다. 그 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고, 송호성이 아직 임명되기 전이었을 때에는 하우스만이 사실상의 사령관 대행으로 있으면서 사실상의 총사령관 임무를 수행했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는 등 군사훈련법, 군통제법, 군형법 등의 작성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하우스만의 지휘하에 경비대에서 사용할 군사용어도 영어와 일일이 대조해가며 새롭게 만들었다.

하우스만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는 점과 지방 좌익의 영향으로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를 졸업했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들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형근이 그랬고, 채병덕이 그랬고, 정일권이 그랬으며, 백선엽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러했다.

하우스만의 친한 한국군 친구들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본군 출신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이 더 강한 군사훈련을 받았다는데서 찾았다. 한편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 그는 광복군이 장개석 장군의 '부속기계 같은 존재'였으며, '저속한 말로 불평할게 많다'고 하였다.

하우스만이 광복군을 싫어했던 중요한 이유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우스만은 그 예로 송호성은 공산주의에 대해 나쁘다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점은 여순사건 때 이승만 정부와 미군이 이 사건의 발발 요인을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보는 시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여순사건 발발 초기에 이범석국무총리는 이 사건이 김구와 군대내 반이승만 세력이라는 극우세력과 남로당 극좌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했고, 미군은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을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김구에게 끊임없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을 위협하는 김구라는 존재에 대한 시각은 김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른 미군 병사가 언제쯤이나 본국으로 돌아갈까 골몰할 때, 하우스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문화를 익혔고 한국말도 알아듣기 시작하는 충성스런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져가고 있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군 내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이 되어 어느새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던 것이다.

광복군보다 일군․만군 출신을 우대하는 것에서 나타나듯 하우스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인사정책을 통해 구현되었다. 하우스만이 한국 사정에 밝아지면서, 미국 장군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책과 조치가 적합한지 그리고 한국군과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필요로 했고, 하우스만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이범석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해임하려 한 적이 있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그는 민족청년단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면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일단 정부 요직에 앉힌 다음, 수많은 청년단체를 모두 해체시켜 버리고 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다. 이범석은 자신의 사지가 짤려 나가는 아픔을 겪었지만 내각의 일원으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범석과 채병덕은 친한 사이이기는 했지만, 이범석이 중국에서 무기를 들여와 팔고자 했을 때 하우스만의 조언으로 채병덕이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이승만은 채병덕 후임으로 김석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석원은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인 임영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하우스만은 김석원을 군인으로는 보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이 채병덕을 교체하려 하자 하우스만은 "대통령 각하, 만약 채병덕을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에 채병덕에서 정일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하우스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총참모장을 교체하려 하였는데, 채병덕 후임으로 누구를 추천하느냐고 하우스만에게 물었고, 하우스만은 정일권이라 답했다. 물론 정일권의 미군 군사고문으로 일하게 된 사람은 하우스만이었다. 이렇게 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 임명이 내 손을 거쳐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 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하우스만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하우스만은 한국군에 많은 인맥과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사고문단이 정식으로 출범할 때, 한국 근무기간을 훨씬 넘긴 하우스만은 전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다른 고문관은 필요치 않아. 나는 하우스만을 필요로 해"라고 말했다. 결국 미고문단장은 하우스만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기를 권했고, 이미 한국어도 상당히 알고 있었고, 한국 장교들의 면면을 줄줄이 꿰고 있던 하우스만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드디어 전쟁 중이던 1951년 하우스만은 한국을 떠나 국방부 국방정보부(DIA)로 자리를 옮겨 한국을 담당하게 되는데, 하우스만이 일했던 참모총장 고문 후임에는 짐 하웬이 임명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하우스만이 있으면 참모총장 고문자리가 있고, 하우스만이 가면 참모총장 고문자리도 간다라고 하면서 하웬을 연락장교로 배치하였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하고 아꼈다고 해도, 그가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것도 하우스만이 사형 장면을 찍는 필름을 돌리는 앞에서. 김종석의 운명이 그랬다. 김종석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하우스만은 김종석의 군사적 능력과 군인의 자질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대들보로 생각하였다. 하우스만은 그를 조선경비대 내의 작전교육과에서 초대 과장으로 일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순사건 뒤 숙군 바람이 몰아치면서, 김종석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1949년 9월 서울 부근 수색에서 처형당했다. 이 때 하우스만은 이 처형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이 필름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활용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하우스만은 이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PMAG], 나중에 군사고문단[KMAG]으로 변경)이 만들어지자,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경무대로 불러 군사관계를 묻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하였다. 대통령은 개별보고서를 요구하곤 했는데, 군대의 사기문제라든지 군 조직 개편 등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했지만 어떤 특정 사건, 특정 인물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하곤 했다.

하우스만이 총참모장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단지 참모총장의 고문일뿐 이었으나, '모든 작전에 책임을 졌다'. 사령관을 임명하는 일, 부대를 배치하고 그것이 중대, 대대, 연대이건 그들에게 임무수행을 명령한 일, 그리고 그 사령관을 감독하는 일들이 하우스만이 했던 일이었다. 사령관이 임무를 완수했는지, 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를 감독했고 또 그 결과를 검토했다. 게릴라 토벌작전 때에는 빨치산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 결국 하우스만은 고문이었지만, 미군이 국군을 지휘하는 상황에서는 하우스만 또한 자신이 조언하는 상관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 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하우스만은 "정,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하우스만의 이런 권능은 하우스만이라는 한 개인의 능력은 아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미국군과 한국군의 당시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하우스만은 그 집약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지창수 상사가 지도한 14연대는 이날 저녁 여수로 진입하여 경찰서와 철도경찰, 관공서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통근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북향했다.

광주 5연대가 여수주둔 14연대 반란 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 20분이었고, 이 사실이 서울에 보고된 것은 9시였다. 이날 아침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게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고, 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웰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여수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기동작전군(Task Force)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군사고문단이었다. 참모총장과 국방경비대 총참모장도 고문단장의 호출에 불려 나왔다. 왜냐하면 비록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군대 지휘권은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진압작전에 군대를 보내면서 군사고문단 장교가 꼭 대동하도록 했다. 송호성 사령관도 미군이 '임명'하였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문관이었다.

이로써 하우스만은 리드(Reed)와 더불어 남한에서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하우스만이 이전의 국방경비대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활동과도 그 성격이 약간 다른 것이었다. 하우스만은 국방경비대를 확충하고 군대를 운영하는 일에는 관여했지만, 직접 적에 대한 작전을 책임지고 주도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이 기동작전군 사령부에 배속됐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공식 명령 네 가지를 주지시켰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이 명령의 내용을 보면 한국군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한국군은 미국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문서에서나 사용될 상당히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 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 경험도 전혀 없었다. 실제로 미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이상이었다.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우스만은 그의 회고록에서 "내가 그 때 공식명령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워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다는 것만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일단 기동작전군을 구성한 다음에는 장비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하우스만이 광주에 파견되는 것과 동시에 화차 2량에는 무기 화약 식량 등이 실려 광주로 떠나갔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식, 99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제주도 파병을 위해 14연대 정도에만 M-1이 지급된 형편이었는데, 미군은 사건진압에 파견된 부대원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제대로 된 비행기 한 대 가지지 못한 국군은 미군에게 수송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 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수없이 실어 날랐다. 어느 하루는 쌀 6톤, 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 쌀은 한국산 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무쵸 주한 미대사는 국무장관에게 "지난 10월에는 여수, 순천지역에 대한민국 사람들, 탄약, 통신장비를 수송하느라 미국 수송기가 러시를 이루었다"는 전문을 타전했을 정도였다. 10대의 L4 경비행기도 지원되었다. 5대는 광주에 배치되었고, 5대는 전주에 두어 부대간의 연락용으로 쓰거나, 여수․순천을 공중정찰하는데 사용되었다.

통신은 광주에 주둔한 미20연대가 갖고 있는 장비를 지원했다. 최신 무전기 M208이 작전 하루 이틀 뒤에 보급되어 작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가끔 반란군은 경찰 전화선 껍질을 벗기고 통화내용을 도청하곤 했는데, 최신 무전기는 안전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자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수와 순천은 즉시 진압되지 않은 채, 초기에는 진압군이 반란군에 협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반란의 진원지인 여수와 순천을 빨리 탈환하고자 시도했다. 미군 수뇌부는 "이승만 정부가 곧 전복 당할 처지에 있다. 여수는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진압군을 재촉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부대를 멈추고 전선을 구축하여 바다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전선에는 될 수 있으면 소규모 부대만을 남겨 놓고 대부분의 부대는 북쪽으로 행진시켜 지리산을 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우스만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은 여순사건에 대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군인과 지방좌익세력의 합세로 인해 여수에서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그는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에 불과하며, 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과 호응하여 남한에 항상적인 소요를 일으킬 빨치산 유격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는 파악했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발발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반란은 공산당 조직이 사전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고, 여수의 공산주의자들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봉기는 한국전쟁 전 남한에서 일어난 최후의 대중적 봉기였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여순사건을 북한과 연관지어 사고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리산 입산을 극구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우스만에게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 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무쵸대사, 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 여순사건 이후에 본격화되는 게릴라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수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대부대가 참가함으로써, 한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 있었던 군대와 경찰간의 마찰은 이제 군의 압도적 우위로 결판났다. 사건이 발발한 요인에는 친일 경찰에 대한 경비대의 반감이 작용했기도 했거니와, 진압작전 과정 자체를 군대가 완전히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분규를 진압하는데는 소규모 화력이 아니라 정규군의 압도적 화력이 역시 중요했다. 미국이 제공한 화력 덕분에 진압군은 순천을 24일, 여수를 27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진압은 14연대 반란군과 진압군만에 한정된 전투는 아니었다. 진압군 작전은 정규 14연대 반란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그 결과 여순진압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희생을 불러왔다.

10월 27일 여수 전 시내를 포위하면서 작전을 시작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기관총을 쏘아댔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면 사살되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공공장소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진압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모두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끌려 나왔다. 의심되는 사람의 변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시내는 공포분위기로 완전히 뒤덮였다. 위헌적인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협력자 색출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무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증명하는 주위 정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다. 협력자 색출은 단지 믿음직하지 못한 혐의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인명의 숫자조차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유혈 과정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반공체제 확립의 법적 지주를 마련한 셈이었다.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졌고,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해야만 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들과 함께 제1차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다.

여순사건이 종결된 뒤 미 국방부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해 1949년 1월 10일 하우스만에게 미 공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4번째 서열쯤의 훈장이었고,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이런 훈장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미군은 당시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우스만의 훈장에는 학살의 공도 포함되어 있을까?


하우스만이 국방경비대와 국군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남한에 반공국가가 세워지는 때였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1949~50년 사이에 미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을 오고간 문서의 대부분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이승만이 병력과 끊임없는 물자 지원요구로 채워져 있다.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이승만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미국 개입 소식을 듣고 감격스러워 했고 그래서 군 작전권을 대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맥아더에게 헌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른다.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지원으로 남한은 반공국가의 모양을 점점 갖추어 갔지만 제주도와 여수에서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다. 얼핏 국군․경찰․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학살의 배후에는 이 사실을 묵인한 미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서의 대한민국 군대가 만들어진 것은 여순사건 뒤 대대적으로 실시된 숙군 때부터였다. 숙군과정을 주도한 김창룡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경력이 있었고, 북한에서 소련군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남하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은 빨갱이 사냥 이상의 것이었다.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마음놓고 자행했다. 단지 반공이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마음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없이 숙청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숙군 상황을 매일 매일의 일일보고를 통해 이승만에게 보고하였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군내부의 숙청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악명은 하우스만에게도 해당되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자신의 손에 붉은 피를 묻히려고 하지는 않았다. 민간인학살을 지켜보고 옆에서 이 과정을 점검하던 다른 미군 장교들과 같이, 하우스만 또한 학살현장을 목격했지만 스스로가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에 대한 언급도 그러하다.


경비대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데리고 가서 나무 막대기에 묶어 놓고 끝이 뾰족한 대나무 막대기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를 보여주면서 주민을 처형했다. 또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구덩이 가에 서게 하여 다른 주민들이 대나무 막대기로 그 사람을 찔러 구덩이에 빠뜨린다. 그러나 대나무는 상처만 내지 실제로 죽이지는 못하므로 경비대 군인들이 구덩이에 넘어진 주민들 위에 석유를 부어 산채로 태워 죽이곤 했다. 제주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다.


하우스만은 경비대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을 단지 '목격'만 하고 자신의 손은 하얗게 남겨두었을까?

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라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1948년 6월, 제주도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달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박진경은 일본 외국어학교 출신으로서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군정장관 딘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인권옹호연맹이나 법학가동맹은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동기를 참작하여 감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상길은 몇 달 뒤 사형되었다.

전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처형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 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하우스만이 한 짓이 여기에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기 시작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압박했을 때였다. 대통령은 라디오로 서울을 지킨다는 허위방송을 전국민에게 떠든 채 몰래 달아나 버리고, 채병덕은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비워가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미8군에 의하면 국군 9만 8천 명 가운데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천 명 뿐이었고, 경찰 병력 중 피난 간 사람은 4,500명에 불과했다. 다리 위에서는 피난 가려는 시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가던 국민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어떤 미군 장교는 이 폭파로 인해 5~800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대 육사교장이었던 이형근은 현장을 목격한 뒤, 유엔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인민군이 선수를 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누가 한강교 폭파의 명령을 내렸는가?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몰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최창식 부인 옥정애의 재심청구 요청으로 1964년 10월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최창식에서 채병덕으로 죄인이 바뀌었지만,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퇴역을 맞아 한국을 떠나 있었고, 라이트(Wright)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또한 책임을 맡아야 할 선임 통신장교인 챨스 스튜리스는 자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5․16 후 재심판결에서는 채병덕을 한강교 폭파의 명령권자로 밝혔는데, 채병덕의 고문관은 하우스만이었다. 또한 하우스만은 자신은 한강교 폭파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만약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이 채병덕이라면,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이었던 것이다.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 1960년 7․27선거를 통해 들어선 장면을 하우스만이 지원하지 못했던 것은 이후 군부정권의 등장과 관련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미묘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정권을 획득한 민주당 신파의 수장이었던 장면총리는 이전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미 대사관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장면은 "일등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기를 꺼리지 않았던 하우스만이 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이승만을 도왔던 하우스만이 장면 정권을 도우면 안 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면 정권은 4월혁명에서 제기된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물리치고 확고한 지배력을 다시 회복할 것인가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 장면 정권시기의 정책들-한미경제협정과 데모규제법․반공법의 2대 악법-은 기본적으로 4월혁명을 거스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생과 혁신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 이 때 등장한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미국에게 확실히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고 있었다.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던 주한 CIA 지부장 피어드 실버는 장도영을 만나 쿠데타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한 적이 있는데, 이는 하우스만이 건네 준 정보였다. 군대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하우스만이 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누구보다 더 잘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일, 한국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으며, 이런 정보는 "나 이외에 누구도 그런 정보를 입수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했다.

군부 쿠데타 주모자인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광주에 내려와 작전참모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 조직체계를 밀고하고 하우스만과 김창룡․원용덕․백선엽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구명운동을 벌임으로써 생명을 건졌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왔다. 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려 했으나, 하우스만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우스만은 "그 당시 나는 한국전문가였고, 하우스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다고 나를 믿고 신뢰"했었기 때문에 미국 정․관계에 박정희를 신임하도록 얘기할 수 있었다. 하우스만은 한국 상황과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수여 받았다.



6. 맺음말


하우스만은 커밍스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로 역사에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 쪽이 비교적 공식적인 역사였다면, 하우스만이 관여한 학살의 역사는 지금까지 은폐된 어둠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군의 형성은 반공체제의 형성과정이었고 이는 또한 국민에 대한 폭력적 편가르기이자 학살을 의미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체제를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군에 대한 숙군을 실시했고, 그 결과 군대를 가장 강력한 물리적 기구로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형성과정은 반공주의를 그 중심적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었다. 반공체제 구축과정은 평화롭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폭력 기구를 전면에서 사용하면서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했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반공체제 구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반공체제 형성의 굳건한 지원자이었던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한국 땅을 떠날 때, 수도방위사령부 시절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보안사령관 노태우 육군중장은 1981년 6월 24일, 하우스만을 불러 두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하우스만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한국군 창설과정 때부터 군에 관여한 하우스만이 보면 전두환․노태우 같은 군인은 꼬맹이 같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군사정권이 수십 년을 지배했던 한국에서 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배후 실력자'로서 활동했고, 미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훈장들은 그가 흘린 땀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아니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의 대가였을까? 이승만의 반공극우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와 50년간 이루어졌던 민간인학살의 핏방울이 그가 뿌려 놓은 유산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떠나면서, 하우스만은 한편으론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젼과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꺼지자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 나쁜' '야비한 놈(brutal bastard)'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게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 10월에 죽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 제임스 하우스먼 

 

1.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은 누구인가?

- 1981년 6월 24일, 보안사령관인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을 불러 두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하우스만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 1960년, 장면은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한다. 하지만 미 대사관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이에 대해 장면은 "일등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기를 꺼리지 않았던 하우스만이 국무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라고 토로한다. 이제까지 이승만을 도왔던 하우스만이 장면정권을 도우면 안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1960년 3월 1일, 하우스만은 한국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한다.

- 1961년 5월 18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고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미국으로 날아간 하우스만은 한국 사태를 소상히 설명한다. 그 뒤 국방장관은 그에게 공로표창을 수여한다.

- 1949년 서울 근교 수색,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던 김종석 등 군내 좌익세력 처형장. 하우스만은 무비 카메라로 총살이 진행되는 상황을 천천히 녹화한다.

- 1949년, 남로당 프락치로 숙군 대상에 오른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우스만은 백선엽, 정일권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함께 이승만에게 구명을 요청하고,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정희를 살려준다.

- 1949년 10월 여수에서 군 반란으로 시작된 저항이 순식간에 순천 등 전남 동부지방을 휩쓸자 하우스만은 진압군의 고문관으로 광주에 파견된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준장의 명령을 받은 하우스만은 미군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국군의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한다. 여순사건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1주일만에 진압된다.

이것은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한국 현대정치사와 얽힌 몇 개의 장면이다.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군사고문단 고문, 1951년 미 국방부 국방정보부에서 한국담당, 1950년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던 하우스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공식 이력만으로는 모자란다.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였지만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니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2.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하우스만이 남한에 처음 들어 올 때 국군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점령한 상태에서 양측은 군대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직 치안유지만을 위한 경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남한 군대는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하우스만은 미군정 하에서 국방경비대 창설요원으로 배속 받으면서 남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하우스만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는 점과 지방좌익에 의해 조정되어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형근이 그랬고, 채병덕이 그랬고, 정일권이 그랬으며, 백선엽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러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국방을 책임질 든든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승만은 정일권을 참모총장, 백선엽을 1군사령관에 임명하고는 이형근에게 줄 자리가 없자, 결국 1954년에 합동참모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이형근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하우스만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했다. 그 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중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고, 송호성이 아직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우스만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는 등 건군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다른 미군 병사가 언제쯤이나 본국으로 돌아갈까 골몰할 때, 하우스만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문화를 익혔고 한국말도 알아듣기 시작하는 충성스런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져가고 있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군 내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군인이 되어 어느새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다. 미국 장군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책과 조치가 적합한지 그리고 한국군과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필요로 했고,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하우스만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기가 아끼는 인물은 챙겨주는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 가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했다 해도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것도 하우스만이 사형장면을 찍는 필름을 돌리는 앞에서. G-2라는 정보부에서 일하며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었던 김종석의 운명이 그랬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PMAG], 나중에 군사고문단[KMAG]으로 변경)이 만들어지자,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을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정부 수립 뒤부터 이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단장, 그리고 하우스만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가 매주 열렸다. 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경무대로 불러 군사관계를 묻곤 했다. 대통령은 개별보고서를요구하곤 했는데, 군대의 사기문제라든지 군 조직 개편 등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했지만 어떤 특정 사건, 특정 인물에 관한 보고서도 요구하곤 했다.





3. 여순사건과 하우스만

하우스만이 남한에서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하게 된 것은 여순사건 때였다. 미군이 여수에서 군 반란이 일어난 것을 처음 보고 받은 것은 10월 19일로써 반란이 발생한 당일이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즉시 하우스만을 호출했고, 기동작전군(Task Force)을 편성해야겠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오전 고문단장실에서는 국방장관,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하우스만, 몇몇 고문단 참모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갖고 제일 먼저 광주에 기동작전군사령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총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사령부에 배속됐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공식명령 네 가지를 주지시켰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이 명령에는 미군이 직접 나서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미군은 작전을 세워 한국군을 지휘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군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한다고 상당히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전부터 한국군은 사실상 미국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미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가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역할은 단지 군 작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해주는 이상이었다.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우스만이 현장에 투입됐을 때 맨 먼저 그는 화차 2량에 무기 화약 식량 등을 가득 싣고 갔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식, 99식으로 무장하고 있던 형편이었는데, 미군은 사건진압에 파견된 부대원 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미군은 수송도 맡았다.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어느 하루는 쌀 6톤, 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 쌀은 한국 산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무쵸 주한미대사는 국무장관에게 "지난 10월에는 여수, 순천지역에 대한민국 사람들, 탄약, 통신장비를 수송하느라 미국 수송기가 러시를 이루었다"는 전문을 타전했을 정도였다.

통신은 광주에 주둔한 미20연대에서 지원했다. 최신 무전기 M208이 작전 하루 이틀 뒤에 보급되어 작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가끔 반란군은 경찰 전화선 껍질을 벗기고 통화내용을 도청하곤 했는데, 최신 무전기는 안전한 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반란의 진원지인 여수와 순천을 빨리 탈환하고자 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먼저 이 사건이 군인과 지방좌익세력의 합세로 인해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이고 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우스만은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 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우스만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이번 여순사건이 북한과 호응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 무쵸대사, 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 게릴라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반란군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하여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자, 미군사고문단은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이른바 4F 전술을 지시하면서, 진압작전을 원호했다.

여수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대부대가 참가함으로써, 한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 있었던 군대와 경찰간의 마찰은 군의 압도적 우위로 결판났다. 사건이 발발한 요인에는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기도 했거니와, 진압작전 과정 자체를 군대가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분규를 진압하는데는 소규모 화력이아니라 정규군의 압도적 화력이 역시 중요했다.

여순사건이 종결된 뒤 미 국방부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해 미 공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4번째 서열쯤의 훈장이었고,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이런 훈장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미국은 당시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한 미군사고문단이 정식 출범하자, 한국 근무기간을 훨씬 넘긴 하우스만은 전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다른 고문관은 필요치 않아. 나는 하우스만을 필요로 해"라고 말했다. 결국 고문단장은 계속 한국에 남아 있기를 권했고, 이미 한국어를 상당히 알고 있었고, 한국 장교들의 면면을 줄줄이 꿰고 있던 하우스만은 그대로 남게 되어 한국전쟁을 맞았다.




4. 하우스만- '학살의 얼굴'

하우스만이 국방경비대와 국군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남한에 반공국가가 세워지는 때였다. 이승만정권이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이승만과 채병덕 참모총장이 미국 개입 소식을 듣고 감격스러워 했고 그래서군 작전권을 대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맥아더에게 헌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남한 반공국가 건설의 기반이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주도와 여수에서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다. 얼핏 국군·경찰·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학살의 배후에는 이를 용인하고 조장한 미국이 있었다.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1948년 6월, 제주도 9연대에서는 문상길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달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문상길은 "부하들이 암살했다.… 내가 주모자가 됐다. 어쨌든 박대령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감옥해서 말했다고 한다.

박진경 일본 외국어학교 출신으로서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군정장관 딘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인권옹호연맹이나 법학가동맹은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동기를 참작하여 감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상길은 몇 달 뒤 사형되었다.


전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처형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총살형은 수주일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 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하우스만이 한 짓이 여기에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황석영이 최근에 펴낸 {손님}이라는 소설에는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벌어진 좌우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상세히 그려지고 있다. 빨갱이를 사탄으로 생각한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과의 투쟁을 성스런 십자군의 활동으로 여기면서 가솔린을 부어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여자들은 능욕하는 등의 빨갱이사냥을 감행한다. 그 형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학살이 등장하여 더욱 충격적이다. 여자들을 술자리 노리개로 쓰는 것에 화가 난 한 사람이 놀고 있던 자기 친구에게 면박을 주고 자리를 파했는데, 이 친구는 분풀이로 자기에게 면박을 준 친구의 친척을 죽여버린다. 비슷한 시간에 딴 곳에서도 똑같은 보복 살인이 이루어진다. 인간 심리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심리의 저 밑바닥은 숙군 과정을 주도한 김창룡이라는 인물에서도 확인된다.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경력이 있고, 북한에서 소련군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남하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진행되었다. 그것도 국가권력이라는 이름 밑에서. 김창룡은 이승만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맘놓고 자행했다. 단지 정치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마음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없이 숙청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군내부의 숙청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악명은 하우스만에게도 해당되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은 적이 있었다.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 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 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이는 것이 진보인 것으로 믿었던 사람이 자랑스럽게 '역사를 진보시킨 일'들은 계속 밝혀질 것이고 또 밝혀져야만 한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하우스만이 일반인과 연구자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하우스만 증언}(한국문원, 1995)이 출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이 책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던 전쟁 직후에 자신이 목격한 학살사건이 적혀 있다.

 

 

6월 27일 밤 안소위라는 포병대위는 한 떼의 서북청년단원들을 태우고 노량진 쪽에서 한강 다리를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폭파계획이 하달된 때였으나, 그는 헌병을 권총으로 위협하고는 곧장 서대문형무소로 직행했다. 청년단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최상급 악질 빨갱이'들을 끌어냈다. 트럭은 강기슭에 세워졌고 수감자들은 한남동 모래사장에 끌려와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총살당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하우스만은 이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훗날의 회고에서 이 사실을 담담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우스만은 한남동 모래사장 학살에서와 같이 단지 '목격'만 하고 자신의 손은 하얗게 남겨두었을까? 한강교폭파가 하우스만의 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때도 담담하게 아니라고 말할까?

한남동에서 학살이 있었을 때는 남하하기 시작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압박했을 때였다. 대통령은 라디오로 서울을 지킨다는 허위방송을 전국민에게 떠든 채 몰래 달아나 버리고, 참모총장은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비워가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미8군에 의하면 국군 9만 8천 명 가운데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천 명 뿐이었고, 경찰 병력 중 피난 간 사람은 4,500명에 불과했다. 다리 위에서는 피난 가려는 시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가던 국민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어떤 미군 장교는 이 폭파로 인해 5∼800여 명이 죽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대 육사교장이었던 이형근은 현장을 목격한 뒤, 유엔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인민군이 선수를 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누가 한강교를 폭파했는가? 이승만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최창식 공병감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64년 재심청구소송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5·16군부 쿠데타 뒤에는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하우스만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이 당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고문단장은 퇴역차 한국을 떠나 있었고, 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또한 선임 통신장교는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공병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고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5. 하우스만 - 일그러진 얼굴

하우스만은 커밍스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보다는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로 역사에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 쪽이 비교적 공식적인 역사였다면, 하우스만이 관여한 학살의 역사는 지금까지 은폐된 어둠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반공체제의 굳건한 지원자이자 형성자이기도 했던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보면 꼬맹이 같은 인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반공극우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와 50년간 이루어졌던 민간인학살의 핏방울이 그가 뿌려 놓은 유산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군사정권이 수십 년을 지배했던 한국에서 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배후 실력자'로서 활동했고, 미국과 한국에서 수많은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훈장들은 그가 흘린 땀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아니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의 대가였을까?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떠나면서, 하우스만은 한편으론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 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에 죽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미군으로 들어와서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으로 제대했군요.

그럼  미군 = 유엔군???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고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남로당 프락치로 숙군 대상에 오른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정희 = 빨갱이???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

아니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다

건군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군생활하신분은 아시겠지만 일반군인이 이렇게 활동할수있을까요?

이런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은  보안이나 첩보관련 직책이

아닐런지요

 

초기 국방경비대 창설과정에서 하우스만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을 갖고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대했다. 당시에 군대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자 일본군 출신들은 영달을 꾀할 수 있는 두 번째 호기를 맞았다.


이승만대통령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한국군 장교들에게 하우스만은 작전과 군대 운영을 '조언(실제로는 지휘)'하는 고문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직선 코스였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친일파를 흔히 이승만이 등용했다고 하지만 그 속내를 알수있는 위 글에서는

미군정이 있었다 할수있네요.

능력이나 가치관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고 오로지 충성.........

윗 글에서는 제임스 하우스먼 개인의 마음이라 기술했으나

그가 군인의 신분임을 감한하면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자명합니다.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마치 80년 광주의 현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저만의 감정일까요? 

 

여순사건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1주일만에 진압된다.

제임스 하우스먼 = 전두환과 신군부???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제주 4.3사건.

통설로 제주 남성들의 씨가 말랐다던 그 사건....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 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신이상자  아니면 인간백정 혹은 극단적 인종주의자...

지 생각으론  위 세가지가  골고루 섞여있다 여겨집니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하우스만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이 당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역사에서 진실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결국은 밝혀지네요...

 커밍스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보다는

 

시카고대 교수이며 한국통으로 알려졌고 확실친 않으나 한국인 출신

부인을 둔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시 가재는 게편이군여ㅉㅉㅉ.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 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1945년에서 1955년 사이에 그 자신이 행한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잘 표현되있습니다.

그러니 1800년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인디언(잘못된 표기임) 즉 아메리카대륙의 원래주민들.
그들이  어떻게 학살되어 갔을지  짐작해볼수있는  단서라 생각됩니다. 





글과 이미지 출처는 모두 구글.



하우스만(전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최초 인터뷰(1)

한국서 35년간 정보·군사 고문




인터뷰 도중 차길진 편집위원(좌측)과 포즈를 취한 하우스만씨

하우스만 전 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

제임스.H.하우스만(73세).

35년간 한국에서 살았던 미국인 노인이다. 타향살이 10년이면 몸도 마음도 변하고, 타향도 고향처럼 여겨진다고. 하지만 적어도 하우스만씨에게만은 이 말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긴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지만 결코 「한국화」될수도, 또 되어서도 안되는 독특한 「그 무엇」이 하우스만씨에게는 있었다.

한국군총참모장의 특별고문, 미육군성 정보과 한국담당관, 주한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등 그가 맡았던 직책과 직위가 너무나「미국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섣불리 한국적시각으로 맞닥뜨리는 사안을 분석하거나 처리해서는 안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적인 것에 동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파악한다면 그는 미국편에 서서 국익(國益)을 위해 한국을 이해했던 것이 정확하다고 하겠다.

개인적인 비즈니스나 선교목적을 위해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들의 경우는 오래지않아 한국인 못지 않은 언행을 하고 또 그것을 자랑삼아 겉으로 드러내기 마련인데도, 하우스만씨는 기자와의 장시간 인터뷰에서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적습관」을 끝까지 숨기려는 치밀한 면모를 보여줬다.

이런면에서 그가 얼마나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며 35년간 수행해온 직책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었다.


한국史의 산증인

하우스만씨는 한마디로 한국현대사의 변천과정을 역사의 중심부에서 지켜본 몇 안되는 외국인 중 한사람이다. 어쩌면 거의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는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사(韓國史)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에 군사 정치적 정보자료를 공급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한몫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한국내 군사 정치적 상황판단이 그대로 미국의 한국정책에 반영돼 한국역사의 맥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은 일을 수행해 오는 동안 하우스만씨의 주변에는 수많은 한국내 요인들이 맴돌았으며 그들로부터 여러가지 「상황」을 수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달 28, 29일 이틀간 이었고, 그자리에는 부인도 함께 배석해 있었다.

텍사스주 주칭사가 있는 오스틴의 하우스만씨 자택에서였다. 그의 자택근처에는 미육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군인들을 위한 병원도 있다.

이 병원은 은퇴한 군인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퇴역군속은 물론 은퇴한 정보원출신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기자와의 인터뷰에는 임선하씨가 통역을 맡아주었다. 임씨는 지난 1946년 하우스만씨가 한국에 처음왔을 때부터 그와 친분을 맺어온 사이이기도 하다.

기자는 이 인터뷰에서 하우스만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그가 한국내에서 해온 일과 친분을 맺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나라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된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한미유대 증진에 공헌

하우스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가 한미유대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한림씨(전 건설부장관)는 그를 평가하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는 우리의 길손이 되어 이끌어 주었으며 이제 황환이 된 지금은 묘지로 가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한국)건국의 산 증인으로 지금 이자리에 참석하신 한분한분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날 때 있었던 송별연에서 이한림씨가 한 송별사 중에서)고 했을 만큼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또 전 대통령 노태우씨(당시 보안사령관)도 그에게 극찬의 감사문을 써주기도 했다(임선하씨가 받아적은 내용-사진참조)

그러나 그는 분명 미국인이고 한국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일한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때문에 그로부터 어떤 자료를 얻으리라는 기대보다는 인간 하우스만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성장과정이나 학력 배경을 통해 실질적으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친 사람인가를 추적해 보았다.

한국식 장롱과 하와이무궁화 그리고 한국무궁화가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7월 28일 황혼무렵이었다.

그의 「완벽한 성품」은 차고(車庫)에서부터 읽을 수 있었다. 차고에는 노란색 테니스공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차를 주차시킬 때 차창에 공이 닿을 때까지만 파킹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우스만은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방어적 자세로 일관했으며 이같은 그의 태도를 예상하고 우회적으로 그의 부인 버트여사(78세)와 먼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듯한 동양매듭과 이승만 정일권 박정희씨 등과 찍은 사진 그리고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문관에게 주는 최고훈장등이 장식된 거실에서 버트여사와 마주앉았다.

버트여사의 건강은 매우좋지않아 보였다. 그녀가 앉은 소파옆에는 2년 전 암으로 죽은 딸의 사진이 꽃다발에 묻혀 있었다.

버트여사는 남편 하우스만보다 다섯살이나 많은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결혼 초기를 회상했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하우스만의 감춰진 부분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본 기획특집은 (사)후암미래연구소 차길진 대표의 1991년 기고문을 바탕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작성일: 2014년 12월 26일 글쓴이: 김 관후
<김관후의 4·3칼럼> (38)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통’ 제임스 하우스만

‘조선인민에게 고함/….(중략)….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중략),…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 미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포고 제1호

‘1949년 2월 21일/ 경비대 조사업무 개시/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작전: 제주도: 매우 적은 횟수의 활동보고. 게릴라에 대한 작전 계속. 제주도에 대한 경비대의 조사업무가 개시됨./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1949년 2월 28일/ 김정식 중령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대분자: G-2소속 김안일(Kim Ahn Il) 소령은 3개월 동안 애월면에 머문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김정식(Kim Jong Sirck) 중령을 체포하였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대위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은 1918년 2월 28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나이 16세에 형의 이름을 빌어 군에 지원하였다.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었다.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46년 7월 26일, 28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해방공간에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이다. 미군정(美軍政,military administration)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통치 방침인 ‘맥아더 포고’를 발표하였다. 그 전문(前文)에서 맥아더는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선언하였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하였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하우스만은 처음,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하고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군대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 그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베로스 대령이 제주도사(島司)로 발령이 난 후,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가 아닌 가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했다 해도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하우스만은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최종 명령자인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하우스만은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이 만들어지자,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까지 하우스만을 신임하였다.

이승만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국방을 책임질 든든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정일권을 참모총장, 백선엽을 1군사령관에 임명하고는 이형근에게 줄 자리가 없자, 결국 합동참모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이형근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하우스만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군사쿠테타 세력들 정착에도 관여한 인물, 친일파 장교들을 유독 선호하고 그 출세를 도운 인물, 이승만의 동족 대학살 현장 어디든지 나타나 진두지휘한 인물 제임스 하우스만. 박정희 쿠테타를 미국에 가서 설득한 인물, 전두환 쿠테타를 미국에 이해시킨 인물, 그가 바로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유태인 대신에 한국인을 멸시하는 ‘gook’이라 부른 사나이. 제주4·3당시 동족 토벌에 앞장 선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문상길 중위의 머리에다 권총을 한 번 더 쏜다. 군대 좌익 색출작업을 시행하면서,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주도 양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대꾸하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이다.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라는 커밍스의 하우스만에 대한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우스만은 전두환 정권이 안정화되는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그만 두고 한국을 떠나면서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하였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에 죽었다.

‘1949년 3월 21일/ 파괴분자에 대해 재판 / 사면계획/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체제분자:/ 파괴분자들에 대한 재판, 기간 1월 1일~3월 15일/ 피고: 장교 78명, 사병 174명, 민간인 1명, 총 253명/ 결과: 유죄 225명, 무죄 27명, 보류 1명/ 선고: 사형 6명, 6개월에서 종신 노역 9명/ 사면계획: 제주도. 기간 2월 26일 현재: 반체제 민간인 2,200명이 제2연대 본부로 인계되었다. 매일 많은 수가 이 사면계획에 참여될 것이다./작전: 제주도: 게릴라 사망 58명, 포로 27명. 한국군 사망 18명, 부상 4명. LMG 2정, M-1 9정, 카빈 8정 회수./한국 해군: 제주도에 대한 경계강화 명령. 4척이 현재 제주도 해역을 순찰중. 해군 함선들이 제주도에 구호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음. 주요 물품: 신발, 옷감 1,800야드, 다용도 식품 60박스(박스 당 70파운드), 의약품 100파운드./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조사차 제주에 온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왼쪽) 준장1948.6.18)

박진경 연대장과는 절친한 사이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제주4·3 토벌작전 당시 무장대원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진경의 장례는 6월 22일 6월 22일 오후 2시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부대장으로 치러졌다.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문상길은 “부하들이 암살했다.… 내가 주모자가 됐다. 어쨌든 박대령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감옥에서 말했다.

박진경은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군정장관 딘(William. F.Dean)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총살형은 집행되었으며 문상길과 부하들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참관하고 있던 미군사고문단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문상길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1949년 3월 28일/ 포로 279명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한국 육군/ 작전: 좀더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하여 향후의 작전에 관한 보고는 다음 세 곳의 주요 지역에 대하여 작성될 것이다. 38선, 남한, 제주도/ a. 38선: 이번 주 다섯 차례의 사건에 보고되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적: 사망 18명.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국군: 사망 1명. 부상 1명. 실종 및 포로 없음/ b. 남한: 보고된 사상자는 다음과 같음. 게릴라: 사망 11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36명 국군: 사망 116명. 부상 15명. 실종 및 포로 없음 c. 제주도: 세 차례의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보고. 게릴라: 사망 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279명/ 국군: 사망,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한국 해군/3월 21일 네 척의 함선들이 한국 육군부대를 제주도 근해의 작은 섬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곳에 피신해 있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4척의 배가 제주도 근해를 순찰하고 있으나 잠입자들은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한국정치와 하우스만

하우스만은 국무회의에 미국인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승만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그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宋堯讚)의 고문이기도 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장면(張勉)은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하였다. 하우스만이 장면을 도우면 안 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학생과 혁신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 바로 등장한 박정희(朴正熙)와 육사8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미국에게 확실히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었다.

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일,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다.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작전참모였다. 그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 조직체계를 밀고하고 하우스만과 김창룡·원용덕·백선엽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구명운동으로 생명을 건졌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갔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전두환·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 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한국 땅을 떠날 때,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을 불러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하우스만은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거기에 또 김창룡(金昌龍, 1920~1956)이 있다.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한 김창룡.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육군 특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함경남도 출신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포함이 되어있다.

김창룡은 이승만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자행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제주4·3 현장에서 죽이는 것이 진보인 것으로 믿었던 사람. 이런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 동요하지 말라는 신문과 라디오방송과는 달리 정부요인들은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고 수많은 시민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한강교는 폭파되고 만다. 다리 위에는 4,50 여대의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메우고 있었으나 비명지를 틈도 없이 죽음을 당했다.

누가 한강교 폭파를 지시했는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다음날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하여 ‘서울 사수’를 공언했다. 그 시간 국방부 선무방송 지프차가 서울 시가지를 누볐다. “국군은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적을 격파했습니다. 평양은 내일 중에 함락될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십시오.” 그 시간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을 매섭게 몰아붙이며 서울을 공격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해 왔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생방송으로 호언장담하는 선무방송을 했다. “어제 새벽에 침입한 적은 우리 국군의 반격으로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총반격전을 개시하였던 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우리 민족의 숙원인 국토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전황설명은 뒤로 한 채, 수원 천도가 확정되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 역에서 특별 남행 피난열차를 탔다. 6월 27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들이 정부의 서울 천도 결정도 모른 채 본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결의한 뒤 곧장 의원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참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인 그날 밤 서울중앙방송에서는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이 대통령의 담화가 전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입네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네다. 나 리승만은….” 이승만의 담화를 대전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전화로 서울중앙방송국에 보낸 것이었다.

한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28일 새벽 1시 무렵,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지시를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공병들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의 철교는 큰 폭음과 함께 폭싹 주저앉았다. 그 폭파 시간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 폭파된 한강교량 중 일부의 모습.

한강교 폭파로 허겁지겁 피난봇짐을 싸들고 한강 인도교 위에 몰려든 약 800명의 피난민들은 그 자리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즉사하거나 수장되고 부상을 입었다. 국군은 퇴로를 잃게 되어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었던 병력과 장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치명상을 입었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인민군 선발대는 중앙청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가장 먼저 서대문 형무소와 각 경찰서에 수감된 4천여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고, 즉각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당시 공병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고,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 참모총장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 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여수 14연대 반란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권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철퇴’-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1948년 10월 21일) 중에서

‘로버츠 사령관이 대위 계급에 불과한 내게 이런 중책을 맡긴 것은 한국군 사정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실 경비대의 강점·약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로버츠 고문단장이 내게 부여한 공식 명령은 4가지였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 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직접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 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등이었다. 나는 20일 하오 2시30분 정일권과 함께 비행기로 광주에 내렸다.’-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한국문원, 1995), 172쪽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여수읍 신월리 제14연대에서는 비상나팔 소리와 곧이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시킨 여수14연대 반란사건의 신호탄이었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건. 제주도 진압작전을 더욱 잔혹스럽게 만든 한 요인이 된사건. 그날은 14연대 제1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되는 날이기도 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고, 대토벌전을 앞둔 준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연병장에는 출동준비를 마친 제1대대뿐만 아니라 2․3대대 병사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대 인사계 지창수(池昌洙) 상사가 나타나 대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중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들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 조선경비대1연대 장병들.

제14연대는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10월 20일 새벽 5시께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비롯해 여수읍내 각 관공서와 중요기관을 모두 점령했다. 날이 밝자 통근열차 편으로 순천 방면으로 진격, 오후 3시께 순천마저 완전 점령했다. 순천에 파견 중이던 14연대 2개 중대도 반란군에 가세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광양․구례․곡성․보성 등 주변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여수시내 거리에는 ‘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나 ‘인민해방군 사령관’ 명의의 낯선 벽보들이 나붙기 시작했고, 오후 3시께에는 중앙동 로터리에서 ‘인민해방군 환영 시민궐기대회’라는 집회가 열리게 됐다.

반란군의 테러로 말미암아 수백 명의 경찰, 관리, 지주가 죽었다. 미국의 G-2 소식통들은 경찰에 대한 공격이 ‘많은 지역주민들을 만족시켰다’고 보고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정부군은 예상대로 끔찍한 보복을 했다. 반란군은 인근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하며 붉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다. 대중집회에서 읍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었으며, 체포된 많은 경찰과 몇몇 정부관리들, 지주들, ‘우익들’ 등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해 ‘인민재판’이 진행됐다. 연설자들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 대신 1945년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요구했다.

10월 20일 아침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여순사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범석 국방장관,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을 비롯한 몇몇 한국군 고위장교와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참석했다. 반군토벌 사령관에는 송호성 준장이 임명됐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 대위였다. 그는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자격으로 바로 광주에 급파됐다.

하우스만은 선발 진압부대로 광주 4연대를 뽑아 투입했다. 토벌작전에는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이 투입되었다. 결국 반란군 3개 대대를 토벌하기 위해 4배에 가까운 병력이 동원되었다. 기갑연대․항공대․경찰기동대도 투입됐다. 진압군의 개인화기는 일제 38식, 99식에서 모두 M-1 소총으로 교체됐고 미24군 탄약고로부터 81㎜ 박격포와 60㎜ 박격포, 경기관총(LMG) 등이 속속 배급되었다.

진압군은 10월 23일 순천을 탈환했다. 27일 오후에야 여수읍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는 여수지구 1천2백명, 순천지구 4백명에 달했다. 진압군에 의해 상당수의 반란군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주력 1천명 가량이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백운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미 고문단은 게릴라를 섬멸하기 위해서 토벌사령관에게 소위 ‘4F전술’을 시달했다. 하우스만은 이 작전개념에 대해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단어의 첫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 ‘OTS’ 마크를 단 조선경비사관 생도들이 무기점검을 받고 있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숙군의 선풍이 일었다. 특별조사반을 이끈 김창룡(金昌龍)의 ‘활약’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49년 7월에 막을 내린 이 대숙군의 결과 모두 4,749명의 장병이 처벌을 받았다.

여순 반란은 제주항쟁 진압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그 지역 인민들과 좌익들이 자신들의 목표가 계속 좌절된 데서 비롯된 폭발이었다. 한 반란군측 신문은 미국의 점령에 대항해 ‘3년간의 투쟁’을 언급했고, 모든 미국인들이 즉각 한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진압을 조직하는 데 관계한 핵심인물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순천의 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정부 민간인들까지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한 미국 국무부 관리는 수년 후에 쓴 글에서 이승만이 1949년에 창립한 ‘국민보도연맹’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공세’에 크게 이용한 ‘교묘한 장치’라고 기술했다. 사실 그것은 정치범들을 수용할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조금이라도 반정부 또는 좌익활동을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전향’과 ‘재교육’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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