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평양 심장부에 침투한 미국 간첩? |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 이야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2. 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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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5일

김일성(왼쪽)과 박헌영. 

쌀장사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서산이씨1900년5월1일 충남예산군신양면신영리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이 정권의 2인자인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고 죽인 지도 지난 12일로 이제 1년이 되었다. 작년에 장성택이 숙청될 무렵에 트위터에 올렸던,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이 자기 밑의 2인자인 박헌영을 숙청하고 사형시킨 과정에 관한 글을 다시 정리하여 올려 본다. 김일성의 이 박헌영 숙청은 북한이 지금처럼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유례없는 독재국가가 되고, 심지어 3대 세습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의 단초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박헌영은 북한정권의 부수상 겸 외상이었고,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다.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낼 때도,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이 서명해서 공동 명의로 보낼 정도였고, 6.25 남침을 의논하기 위해 스탈린을 만날 때도 함께 갈 정도니 진정한 공동정권이라할 만했다(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북한이 남침 후 서울을 점령하고는 박헌영의 심복 이승엽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시장격)에 앉혔으니, 박헌영의 북한정권 내의 위상은 장성택에 못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런 박헌영이었으나 삽시간에 '박헌영·이승엽 도당의 미제(美帝) 고용간첩' 사건으로 '평양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으니 그 과정의 드라마틱함은 장성택 처형에 못지 않았다고 하겠다.

박헌영은 왜 이런 험한 꼴을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에게 당한 것일까? 그 얘기를 하려면 우선 박헌영이란 인물이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부터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1917년 이른바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레닌과 트로츠키는 자신들이 벌인 일을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혁명의 서곡으로 여겼으나 정작 그들의 외침에 가장 크게 공명한 것은 이들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식민지로서 신음하던 아시아 등의 피압박민족의 지식인들이었고 일제하 식민지로 고통을 겪던 조선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박헌영 역시 1920년대 신문기자로 있으며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감옥 안에서 미친 척하며 똥을 먹어서(우웩~) 박헌영이 정신병자가 된 줄 안 일제는 그를 석방시켰다-_-; 이것은 박헌영의 투쟁 경력 중 제일 빛나는 부분인데(쿨럭;) 엄혹한 고문과 모진 감옥살이를 견디고도 끝끝내 전향을 거부하여 처형되거나 고된 수감생활을 거치고 석방된 일본과 중국의 지도급 공산주의자들에 비해서 양광(佯狂: 거짓으로 미친 척함)하느라 똥-_-을 먹어 탈주한 조선의 지도급 공산주의자 박헌영이라니 미학적으로 영 꽝(쿨럭;)이라는 취지로 소설가 이병주 선생님께서 소설 [지리산]에서 개탄하신 일이 있다.

하여간 일제하 35년 역시 엄혹하기 그지 없었고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들이 전향하고 변절했으나 박헌영은 똥을 먹었든 어쨌든(쿨럭;) 꿋꿋히 지조를 지켰음을 기록해 둔다. 특히 일제 말기 그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해 일제에 대항해 투쟁했는데 그 조직(콤그룹이란 코뮤니스트그룹의 약자)이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일제에 투쟁한 조직이었고 그 외의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모조리 변절했음이 당시의 서글픈 풍경이었다.

박헌영은 경성 콤그룹 사건 후에는 광주에 숨어서 노동자로 위장하여 일하다 해방을 맞는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는 장안빌딩에 자리잡아 장안파 공산당이라고 불렸던 정백, 최익한 등이 먼저 공산당 재건의 키를 잡는 듯했으나 박헌영이 상경해 똥까지 먹으며 투쟁한(쿨럭;) 경력 및 경성 콤그룹 투쟁실적을 내세워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장악하였다. 박헌영은 볼셰비키 혁명 전 레닌이 발표한 '4월 테제'를 본따서 '8월 테제'를 발표해서 해방 정국 조선의 현 단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라고 규정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여운형 선생님과 협력한다.

그러나 박헌영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남북 분단 및 남북한에의 미소 양군 주둔이 결정되자, 박헌영은 미 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기선을 잡을 요량으로 그리고 레닌이 이용하다 타도했던 러시아의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염두에 두고서는, 이른바 인민공화국 선포를 결행한다. 사실상 박헌영이 대통령에 이승만을 옹립한 이 인공 출범 쇼는 해방 정국 당시에 이승만이 (지금 남한 내 이른바 민주개혁/진보 세력들의 이승만 폄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망을 얻고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그러나 능구렁이 이승만이 케렌스키 꼴이 되겠다고 나설 리 만무했고 미군 진주 후 군정장관 아놀드가 인공부인 성명을 내자 박헌영이 기획한 인공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간다. 해방 이듬해에는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까지 터져서 공산당은 불법화 되기에 이르렀고, 박헌영은 상갓집에서 발인하는 일행으로 위장해 관 속에 들어 간 채 월북하여 체포를 피한다. 시체인 척하고 38선을 넘은 박헌영은 나중에 실제로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처형을 당해 불귀의 객이 되는데 마치 그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한 것 같은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도 나중에도 죽고 죽이는 파국으로 끝났듯이 초기부터 덜컹거린 사이였다. 원래 소련이 소위 10월 혁명 이후에 만든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원칙은 일국일당(一國一黨)이라서 한 나라에는 공산당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군사적 편의'에 의해서 38선이 그어졌지만, 소련은 붉은 군대가 주둔한 북한을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의사가 확고했기에 미군이 주도한 남한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박헌영에게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다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해방 후 불과 두 달 만인 1945년 10월에 소련 군정은 북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게 하고(즉 형식적으로는 분국(分局)이라고 이름을 붙여 일국일당 원칙을 지키며 서울에 있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우위를 인정하는 척하고) 그 책임자로는 김일성을 앉힌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가는 첫걸음으로 공산당의 분당을 한 것이며, 이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북조선 노동당이 되었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행정조직마저 1946년 2월에 갖추고는 해방정국 최대 현안인 토지개혁마저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으로 해치워 버린다.

김일성이 소련 군정 당국으로부터 이렇게 그 입김이 구석구석 서린 보살핌을 받고서 무럭무럭(응?) 커나간 것에 비해 박헌영은 적대적인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다가 결국에는 북한으로 달아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박헌영은 북조선노동당처럼 남한에서도 좌익정당 간의 합당을 추진해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을 결성했으나 당초에 품었어야 할 여운형선생님의 세력과 이른바 사로계(社勞系)는 끝내 합류시키지 못한다. 이런 걸 보면 박헌영은 정적을 포용하고 외연을 넓히는 일에 매우 부족함을 보인 성마르고 편협한 정치지도자란 느낌이다. 남로당이 결성되고 나서도 박헌영의 앞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남로당 결성 무렵 시작된 1946년 10월 폭동은 남로당에서 최량의 투쟁력을 가졌던 이들을 죽게 하거나(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이 때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도 급속히 좌경화된다) 지리산으로 숨어 들게 한 계기가 되었다.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좇아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이의 이행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서 남로당과 그 외곽단체들을 총동원해서 노력했으나 미소냉전에 접어든 국제정세는 그의 힘으로 어찌하여 볼 수 있는 단계를 넘은 것이었다.

그래도 박헌영이 범한 두 가지 중대한 과오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고 박헌영 입장에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게 되는 일로 결국 이어졌으니 특기할 만하다. 그 하나는 박헌영의 남로당이 1948년 5.10 총선거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는 단정단선(單政單選)에 반대하더라도 내밀적으론 남로당에 우호적 인사들을 뽑아 국회에 진출시키지 못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실격 사유 중의 하나는 의회를 업신여기는 것인데(심지어 소위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레닌조차도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라도 싸우라며 짜르가 허용해준 허수아비 의회 두마라도 활용하라 하였다) 의회에 들어가 그 의회가 내게 유리한 법을 만들게 하거나 불리한 법을 만드는 것을 저지하거나 하다못해 그 의회가 엉망이라는 것조차 폭로하지 못하면 그 의회는 결국 그 정치인을 파멸시킬 도구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남한의 주요 정파들은 이승만과 친일파 지주들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으니 김구, 김규식 선생님 같은 우파 본류나 조소앙, 안재홍 선생님 같은 중간파 세력도 보이콧에 합류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일제 35년간 울결(鬱結)된 민중들의 정치참여의사, 즉 내 손으로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의 일본식 속칭)를 뽑아볼 수 있다는 흥분은 이러한 명망가들의 분단 저지 명분마저 훨씬 뛰어넘어서 90% 이상의 유권자 등록 및 투표로 이어졌다. 하지만 남로당은 선거에 불참했고 내밀적으로 교두보라도 잡아두는 전략도 구사하지 못했으니 완전 폭망하고 만다. 박헌영의 남로당의 무분별한 혁명 전략에 쉽사리 동의할 당시 대중들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좌익, 반(反)이승만, 반(反)한민당 세력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이들 후보들을 선출할 만한 정도의 분위기는 분명 존재했다고 보여진다. 예컨대 이렇게 주요 정파가 불참했음에도 제헌의회에서는 이승만이 내세운 부통령후보와 출마도 하지 않은 김구선생님이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고, 미군 철수 동의안이 제출되었다가 아슬아슬하게 부결될 정도였다. 심지어 북로당에서 남한 국회의 활용가치를 깨닫고(응?) 별도의 공작팀을 보내서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박헌영의 대 의회 전략은 정말 완전 실패였던 것이다. 대중들이나 의회 의원들의 관심을 비록 낮지만 확실하게 견인할 수 있는 의제들이 있었음에도 박헌영의 남로당은 좌익 모험주의에만 빠져 이를 다 놓쳐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남로당과 같이 선거를 보이코트했던 우파와 중간파인사들도 1950년의 5.30 총선거에는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대거 출마한 것도 선거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어쨌거나 대중정당을 지향했던 남로당을 폭력투쟁에만 의존하는 비합법정당으로 만들어 입지를 아주 좁힌 것 외에도 박헌영은 또 하나의 결정적 실책을 저질렀으니 이는 여순반란 사건이라고 불렸던 14연대 반란 사건. 해방정국에서 친일파들이 많이 남고 들어갔던 경찰과는 달리 군대는 좌우가 비교적 골고루 포진하고 있었고 남로당은 군내에 꽤 탄탄한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5.10 총선거가 유일하게 열리지 못한 제주도에서의, 남로당 김달삼 등이 주도한 폭동(이와 제주도 내 민중들의 무고한 희생은 분명 구분되어야 함)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을 준비 중이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남로당 세포인 지창수 등이 출동을 거부하며 일으킨 게 14연대 반란 사건이다. 이들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 지역까지 일시적으로 장악했고, 과거에 이 사건은 여순사건이라 불렸다.

14연대 반란사건에 대해서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니(비록 그 시각은 전혀 동의 못하지만) 거기 맡기고, 박헌영과 남로당의 best interest가 무엇이었겠냐는 관점에서만 지적하고자 한다. 국군 내의 남로당 세포들과 좌익 세력이 6.25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북한군의 남침시에 국군끼리 총부리를 겨누어 적전 붕괴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미군이 남한을 돕기 위해 한반도에 상륙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승만은 군대 내에 상당수 좌익 세력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지막지한 숙군(肅軍)을 단행한다. 생각해보면 이승만은 미국에 수십 년 살면서 미국의 앞마당인 남미에서 군부쿠데타가 밥먹듯이 일어나는 것을 익숙하게 보아 온 이다. 이승만은 북한과 한판 붙게 되었을 때 국군 내 남로당 세포들이 계속 존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군 내에서 좌익 연루/의심 인사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철저한 숙군을 단행한다. 심지어는 총살 당하는 순간에도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대통령 만세"를 외치던; 이들까지 가차없이 처형했다고 하니 그 가혹함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남로당의 국군 내 세포로 있으면서 발각된 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동료들을 샅샅이 밀고하였던 박정희의 공-_-;이 아주 컸다. 하여간 덕분에 중국의 장개석군이나 남베트남군을 닮을 뻔했을 국군에서는 이 14연대 반란 사건이 계기가 된 숙군으로 말미암아 6.25 때 대규모 적전 분열이나 이반이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박헌영으로서는 지창수 등의 좌경 맹동주의(盲動主義)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탓에 6.25의 양상을 아주 다르게 만들었을 절호의 기회(아울러 자신의 죽음을 피할 기회)를 놓쳤다고 하겠다.

그 후 6.25까지 1년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에 남한 내의 남로당 조직은 궤멸의 길을 걷는다. 조직 내에 경찰의 프락치들이 깊숙이 침투했고 급기야는 박헌영의 월북 후에 지하운동을 지도해 오던 김삼룡과 이주하마저 김삼룡의 비서였던 안영달의 밀고로 체포된다. 남로당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검거되는 바람에 졸지에 남한 내 남로당 최고위직에 오른 박갑동은 그야말로 숨만 겨우 쉬는 처지에 있었던 남로당 조직원들의 한심한 상황을 증언(소설가 이병주 선생님, 소설 [남로당]. 이 괴작을 이병주전집에서 누락한 한길사는 반성하라!!!). 그러나 안전한 북한에 있던 박헌영은 남침을 하기만 하면 자신을 따르는 남로당원들이 봉기해서 삽시간에 '남조선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구라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지원을 애걸하며 그런 약팔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 중국, 북한의 지도부는 남침을 감행하겠다는 파국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여기에는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뿐만 아니라 박헌영의 공명심 또한 크게 작용했으니 그는 김일성과 함께 동족상잔의 범죄를 일으켰던 민족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대죄인이라 할만 하다. 6.25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발발했고 서울이 불과 3일 만에 함락되었으나 박헌영이 호언장담했던 백만 남로당원들의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좌경 맹동주의, 민중의 절실한 요구들에 실현가능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고 오직 모스크바에 보여주기 위한 방식의 운동에만 매진한 것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을 지체한 것은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믿고 남로당원들의 봉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 남한이 구출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원들이야 박헌영의 삽질과 경찰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박멸되었지만 6.25의 양상이 국공내전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내전이 아니게 된 것에는 6.25 직전 이승만이 불완전하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남한 농민들이 이미 자기 땅을 가지게 되어 북한이 "토지를 밭갈이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를 외쳐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탓도 아주 컸다고 하겠다. 박헌영은 서울 점령 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타던 차를 몰수해 타고 다니기까지 하며(이병철회장 증언) 잠시 반짝하는 듯 싶었으나 그의 호언장담들이 모두 공수표로 끝나고 전선이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인천상륙작전을 거쳐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는 지경에 이르자 박헌영도 김일성과 함께 도주한다.

김일성과 박헌영,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킨 이 두 민족사의 범죄자들이 국군과 유엔군에 쫓겨서 압록강변에서 처량하게 중공군이 그들을 구원해 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1950년 늦가을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대판 싸웠다고 한다. 특히 김일성은 술에 취해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며 남침하기만 하면 튀어 나올 것이라던 남로당원들 어디 갔냐고 펄펄 뛰었다고 하며 이에 대해 박헌영은 정치적으로는 수상인 김일성이 최종 책임을 져야지 무슨 소리냐며 받아쳤다고 한다(박명림 교수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사실이라면 이 싸움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의 전주곡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김일성은 6.25 남침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희생양을 찾고 있었고 객관적으로 보아서도 박헌영의 이 민족 대참사에서의 책임은 작지 않았다.

박헌영도 자신에게 닥쳐 오는 먹구름을 감지하고 있었고 일설에 의하면 박헌영은 남한으로 보낼 빨치산 요원들의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생들과 그 교관들을 활용하여서 김일성에 대한 선제 쿠데타를 계획 중이었다가 김일성에게 발각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누군가, 이미 군사경력으로는 박헌영 뺨을 치고도 남을, 무려 중국의 주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던 연안파 무정(아그네스 스메들리,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조차 숙청하였던 자로 모든 무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박헌영과 그의 동지들인 남로당계의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은 곧 굴비두루미처럼 줄줄이 꿰어서 잡혀 들어간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과 범죄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미 제국주의자들의 고용간첩으로 공화국에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그의 남로당계 인사들인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에게 뒤집어 씌운, 미국을 위해 북한에서 세작(細作)(웃음) 노릇을 했다는 누명이 후덜덜한 것이 이 '간첩질'을 시작한 때가 무려 1930년대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그 이후의 남한에서의 박헌영과 그때 같이 재판받고 처형된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의 모든 공산주의, 사회주의 관련 활동들은 깡그리 미국을 위한 간첩활동이라는 어마어마한 결론이 되는 것이다ㄷㄷㄷ 북한 김일성의 이 아슷트랄;한 주장에 의하면 예를 들어 시인 겸 평론가인 임화의 시작 활동이나 이식문화론 같은 도발적 문제제기, 카프 활동 같은 것들도 모두 미국 정부의 꼼꼼한;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니-_-;

박헌영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어느 시기에는 우리나라의 공산주의 운동 자체였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미국 첩보기관의 사주에 의한 것이란 얘기는 해방 이후로만 잡아도 남한에서의 모든 공산당의 활동들 즉 8월 테제, 인민공화국 선포, 신탁통치 찬성, 조선정판사 사건, 미소 공동위원회 지지, 국립 서울대학교안 반대 투쟁, 10월 폭동, 단정 단선 반대 운동, 김달삼의 제주도 폭동, 14연대 반란 사건,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등이 모두 미국의 사주에 의한 미국 제국주의 고용간첩의 일이라는 말이 된다ㅜㅗㅜ

소설가 이병주 선생님이 당신의 소설 [산하]의 주인공 이종문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김일성의 이러한 주장은 양날의 칼이다. 그의 "박헌영 일당이 미국 간첩"이라는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암만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지지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미국의 앞잡이로서, 미국 정부의 급여를 받는 공산당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박헌영 일당이야 김일성이 뒤집어 씌운 누명 말고도 씻을 수 없이 지은 죄가 셀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쳐도 해방공간에서 자신들의 절실한 생존을 위한 요구를 남로당이 마련한 틀과 공간에 담아 애타게 싸우다 총이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들은 이제 모두 '미 제국주의자의 스파이'인 박헌영, 이승엽, 이강국, 임화의 손에 놀아난 것인가?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남로당의 대구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제 그는 미제 간첩의 하수인이 된 것인가?

김일성이 박헌영/이승엽/이강국/임화 등 남로당계를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처형한 '평양재판'이었지만 김일성이 북한에서 가진 권력과 그 뒷배를 봐주고 있던 소련과 중국 탓에 김일성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은 북한 정권에서의 공식적인 설명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는 당시 남한의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남부군을 지휘하던 이현상마저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했다(이태, [남부군]). 심지어는 1980년대 남한에서 생겨난 이른바 NL들조차 박헌영이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얘기를 나는 직접 듣고 나서 완전히 어이가 상실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역사비평]에 실린, 세밀하게 평양재판기록을 검토해 그것이 조작된 혐의라는 것을 입증하고 김일성을 비판하는 논문을 읽었을 때 남한 진보세력에 남아있는 양심의 소리를 접한 것 같아 정말 뛸듯이 기뻤었다.

그런데 이병주 선생님 말씀대로 김일성이 평양재판의 범죄사실을 날조했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반도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파산선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의 동지를 적대국의 간첩으로 몰아 죽이는 끔찍한 체제라니 오싹하기 그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기록상 박헌영 등 남로당계들은 그들의 '죄상'을 모두 자백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저질러졌을 고문을 통한 자백 강요와 세뇌공작은 상상만 해도 식은 땀을 줄줄 흐르게 할 만한 일이다.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남로당의 간판을 지킨 셈인 박갑동은 박헌영이 결코 자백하지 않았기에 그의 자백을 끌어내려고 김일성이 박헌영을 동굴 속에 가둬 놓고 맹수까지 풀어 놓는 바람에 "네 놈들이 그랬다면 그랬겠지"란 말들을 했을 뿐이라고 하나 이는 박헌영에 대한 최후의 남로당원 박갑동의 마지막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박헌영이 미 제국주의자의 고용간첩이든 아니든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김일성이 그 후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를 계속 제거하고 독재체제를 굳힌 다음 세습체제까지 만들어 내 이제 북한이 3대 세습까지 가게 된 건 이미 김일성이 1950년대에 2인자 박헌영을 그의 손자 못지 않은 방식으로 숙청했을 때부터 예고되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출처:http://www.huffingtonpost.kr/bawerk/story_b_63253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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