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1_黃薔年譜稿

이상원(李相遠, Samuel Lee) 년보고(年譜稿) [24세~29세]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3. 6. 17:39
반응형
이상원(李相遠, Samuel Lee) 년보고(年譜稿) [24세~26세]

"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의 피비린내나는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여러달의 감옥생활과 잔인한 고문을 당하여 민주유공자가 되었습니다. 2학년때 농공학과 농토목전공을 택하여 토목환경공학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군대는 현역으로 50사단 전투공병대에 입대하였지만 잔인한 녹화사업 덕분에 군생활 중 오랜 기간을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하여야만 했습니다. 잔인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냈다고나 할까요. 그곳에서 국군간호사관학교 4학년생도였던 지금의 제 아내를 만났습니다. 제대 후에는 한국잡지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전공과는 다른 저널리즘을 연구하였지요"

(1)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이상원 박사 (http://blog.daum.net/enature/11767168)

[24세 - 1984년, 대구50사단] 태백공사 녹화사업, 구타등 가혹행위. 군복무 대신에 대학선배 통일운동가 한상열 목사등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수없는 요구를 번번히 거부하여 고문과 구타가 더욱 심해짐.

[25세 - 1985년, 대구50사단] 태백공사 녹화사업 중 잘못 맞아 무릅연골이 파괴되어 국군대구통합병원에 후송되어 장기입원. 대구통합병원 성당에서 간호사관생도 4학년 김영신 만남.

"녹화사업이라고 불렀다. 데모꾼 빨갱이 학생들을 파랏케 바꾼다고 살인마 전두환이 붙였다는 작전명이다. 1985년 군복무시절 보안대에서 맞아 무릎연골이 망가져서 엉덩이처럼 부어버린 무릎을 질질 끌고 입원했던 대구통합병원 성당에서 지금은 은퇴하신 당시 군종신부 박유식 안드레아 신부님이 끼고도신 덕분에 더는 보안대의 시달림에서 피할 수 있었다. 그때 작은 보답이라도 할 양으로 신부님을 도와 복사도 서고 새로 꾸며진 성당 축성식준비도 하고 주일학교 선생도 하고 열심히 성당 일을 했다. 그때 '반딧불'이라는 성당 잡지도 발간했다. 지금의 내 각시 김영신 로사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에게 시도 하나 받아 실었다. 그때 군종병 임석수 바오로 학사님은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노래 등 2곡의 노래 악보를 그 '반딧불'에 남겼다. 나는 시 2편과 '평화 소론'이라는 단상을 남겼다. 안칠라 수녀님은 그 잡지를 출판사에 넘기고 무거운 책을 들고 오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으셨다."

(2) 신검받으러 온 전재국을 위한 환자들의 대청소 (http://blog.daum.net/enature/15852385)
(3) 기적: 옵타다 수녀님과 안드레아 신부님 (http://blog.daum.net/enature/15853763)
(4) 임석수 바오로 신부님 (http://blog.daum.net/enature/15853895)

[26세 - 1986년, 대구50사단] 태백공사 녹화사업 후 육군병장 전역.

이상원(李相遠, Samuel Lee) 년보고(年譜稿) [27세]

[27세 - 1987년] 대구 LGO 문화원 개설, 원장 취임. 무역오퍼상, 해외각종 정보제공, 전세계유학정보서적 발간. 미국 12개 명문대학원 연구조교 임용 및 대학원 입학허가 취득.

(5) Ioseph Samuel의 연애 편지(戀愛 便紙) (http://blog.daum.net/enature/15852532)

(6) 전세계대학 유학가이드 (http://blog.daum.net/enature/15851848)


이상원(李相遠, Samuel Lee) 년보고(年譜稿) [28세]

[28세 - 1988년] 한국잡지현회 부설 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 서울 88올림픽.파라림픽 잡지기자풀기자단 총무역임. 88올림픽공로기장 획득.

"어느 날 한겨레 문화부 기자 고종석이 날 찾았다. 그리곤 언론통폐합 당시 소멸한 잡지사들의 목록을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잡지사들은 언제나 영세했다. 그러기에 잡지기자 교육도 잡지협회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영세하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초라한 신세일 뿐이었다. 나는 잡지계를 언론계의 한 형제로 대해준 한겨레 문화부 고종석 기자가 너무도 고마워서 꼭꼭 숨겨져 있던 잡지계 통폐합자료를 고종석 기자에게 넘겨주었고 1988년 일간지 중에는 유일하게 한겨레신문에서 잡지계의 통폐합문제를 기사화했다."


20대중반 총각시절 어느날, 퇴근후 낵타이를 풀고 ...

"오늘도 직장으로 얌치같은 중절모를 쓴 종로서 정보과 형사가 또 찾아왔다 ... 
에이 유학이나 가버려 ..." 
조국을 등질 고민에 싸여있었습니다.

1988년 7월 16일 - 서울 여의도성당에서 간호장교 김영신(로사) 중위와 결혼미사를 거행. 결혼이후 제 각시 김영신은 강원도 양양에 있는 동해경비사 산하 동해병원으로 전출을 갔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오전 일과가 끝나면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속초가는 비행기를 타고 속초로 가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며 신혼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국비로 국군간호사관학교를 다녔기때문에 1992년 대위때 까지는 의무복무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외기러기 유학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제대할 3년 뒤까지 미국 유학을 가서 인류를 위한 공부를 해보겠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선뜻 동의를 해주는 바람에 저는 결혼한 지 5개월만에 서러운 눈물을 뿌리는 간호장교 아내를 뒤로 한채 1988년 12월 홀홀 단신 외기러기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환경공학 공부를 하는 동안 제 아내 영신은 남편 없이 혼자서 우리의 아들, 이경환 마이클(1989년 9월 9일생)을 출산해야 했고 의무복무를 마친 1992년에는 제 미국 유학에 동참하여 저의 힘든 짐을 많이 덜어 주었습니다."   

(8) 인물과 사상사간 MOOK [살류쥬] 4호 화제: 나의 삶과 사랑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 p110~121 (http://blog.daum.net/enature/2472178)

1988년 9월 미국대학원에 가을 학기 입학예정이었지만 88년 서울 올림픽 취재를 마치고 떠나달라는 부탁을 저보릴수가 없었습니다. 잡지계를 위해 잡지풀기자단을 만드는 일부터 취재하는 일까지 도 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유학을 한학기 늦추어 겨울학기부터 시작하느라 

1988년 12월에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편도 김포발 오레곤 포틀랜드 도착 델타항공을 타고 >>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아이오와 신시네티까지 갈아탄뒤 >> 아이오와 신시네티에서 버지니아 로아녹까지 비행기로 이동한뒤 >> 버지니아 로아녹에서 서틀버스를 타고 버지니아 공대(버지니아택)가 있는 블랙스버그까지 가서 근처 호텔에 묵으면서 미국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9) 잡지협회 잡지연구소 연구원 시절 - 1988 (http://blog.daum.net/enature/15851300)

"군시절 녹화사업중 무릎연골이 으겨져 무릅이 엉덩이만큼 부어 대구통합병원에 장장 6개월간 후송된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나의 각시를 만났다. 비록 몸은 망가졌지만 ‪#‎살인마‬ ‪#‎전두환‬ 이 중매한 셈이다. 그래서 녹화사업 가지고 투덜거리지 않는다. 내각시는 내가 혼자 유학나온 사이, 전방 인제와 원통을 지나 최전방 동경사 동해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대위때 나의 아들을 혼자서 생산했다. 이틀 산통끝에 결국 시섹션으로 힘들게 남편없이 산고를 겪었다."

(10) 아빠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을텐데 ... (http://blog.daum.net/enature/15853673)

이상원(李相遠, Samuel Lee) 년보고(年譜稿) [29세]

[29세 - 1989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 대학원생

+++


이상원7.docx


이상원7.pdf


이상원7.pdf
0.38MB
이상원7.docx
0.2MB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