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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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시인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3. 1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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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1917년 함경남도 함주 ~ 2013년 6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시인이며 재야 민주화 운동 인사이다.[1]


생애

일제 강점기 활동

1917년 함경남도함주에서 태어났다. 12세때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에 접하게 되고, 1933년 이후 작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작가 이기영 등을 만나 조선독립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모색하였다.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하였으며, 1942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하협동단사건','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수차례 피검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였고, 1945년 8월 해방 소식을 접하였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1945년~1947년까지 '동신일보'와 '중외신보' 정치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들, 이승만박헌영김삼룡이주하 등을 만났다.

1947년7월 19일 그가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왔던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이후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잠깐 하다가6·25 전쟁 때 월남하여 취재 중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 투옥되었다. 이후 엄혹한 분단체제 하에서 구멍가게, 학원 강사, 번역, 사설학원 운영 등의 일을 전전하면서 서울 뒷골목에서 칩거 생활을 지냈다. 1980년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 지인들을 통해 '창작과비평사'의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하에서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사회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1980년부터 1990년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지냈다.

죽음

평소 지병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감기가 폐렴으로 번지면서 2013년 6월 12일 별세했다.[2]

작품

그의 시집은 <망향>,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산하단심>, <봄은 왜 오지 않는가> 등이 있고, 전기집으로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등을 썼으며, 기행문 <시인의 고향>, <통일명시 100선 감상>, <그날의 아름다운 만남> 등을 출간하였다.

시집

  • <망향>
  • <설제>
  • <지리산>
  • <꽃섬>
  • <삼천리통일공화국>
  • <별꿈>
  • <산하단심>
  •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평전

  • <몽양 여운형>
  • <도산 안창호>

기행문

  • <시인의 고향>
  • <통일명시 100선 감상>
  • <그날의 아름다운 만남>

같이 보기

주석

  1. 이동 이기형 시인
  2. 이동 백나리 (2013년 6월 12일). “‘통일시인’ 이기형 별세…현역 최고령(종합)”. 파이낸셜뉴스. 2013년 6월 13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


이기형 시인

△함경남도 함주 출생(1917)
△함흥고보 졸업.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
△《민주조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1947)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80년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하에서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다시 시작활동을 결심
△198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
△1989년 시집『지리산』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은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확정 판결을 받음
△시집『망향』, 『설제』, 『지리산』, 『꽃섬』, 『해연이 날아온다』 외 다수
△전기집『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기행서『시인의 고향』
△통일명시 100선 감상집『그 날의 아름다운 만남』



[나의 生, 나의藝 ] 4. 원로시인 이기형



문학사는 계속 다시 씌어야 한다. 구술사 방법론은 공적 기록만큼 사적 기억과 증언도 중요하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함으로써 한국근현대문학사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출구가 된다. 이 점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한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서 문학 부문은 타 예술장르와 방향이 조금 다르다. 음악·무용·연극 등 공연예술, 미술·건축 등 조형예술처럼 예술사의 기초자료 확보를 위한 구술 채록 정도가 아니라 문자기록 중심의 주류사에 맞선 대항이념적 성격까지 지향한다는 말이다. 기존 문학사의 경우 문학전집이나 교과서에서 보듯이 분단 이후의 남한 주류문학이라 할 순수문학·우파문학·민족주의문학 중심의 이념적 성향이 고착화돼 있다. 더욱이 ‘한국문단사’ ‘증언으로서의 문학사’처럼 기존의 문단측면사나 원로 문인들의 인터뷰·대담 기록을 보더라도 이미 문단적 위치가 확고한 분들의 보조자료로서 일종의 영웅미담용 회상기 구실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구술사 이론과 현장론적 증언 채록을 통해 문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비주류 작가와 주변부 장르를 재조명하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야 할 터이다. 


이런 점에서 원로 시인 이기형(李基炯·87)의 증언은 구술사 방법론이 문학사 재구성에 어떤 보탬이 될지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 이기형 시인은 다른 원로 예술인처럼 문단의 대표성을 지닌 유명한 분이 아니다. 1980년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에다 문단에서 소외된 좌파 원로였기 때문에 기존 연구가 거의 없었고 월남한 분이라 학연·지연과도 무관하다. 이 점은 역으로 기존의 문단권력관계나 문헌자료의 제약에 매이지 않는 비주류의 새로운 증언을 통해 구술사의 개가를 올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기형 시인은 1917년 11월11일(음력)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를 다니다 귀국하여 ‘지하 협동단 사건’ ‘학병 거부사건’으로 피검되기도 하였다. 시인의 생애는 이 땅에서 소외된 비주류 좌익의 역사적 운명을 보여준다. 그는 카프 작가 한설야의 소개로 상경하여 몽양 여운형에게 배우고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문석준과 교유하였으며 이기영·임화·박세영 등 카프 출신 문인과 이태준·안회남·지하련 등 훗날의 월북 문인들과 어울렸다. 이기형 시인의 기억은 매우 구체적이다. 여운형의 첫 인상을 말할 때는 “눈은 검은 눈은 아니고 약간 누르스름한데 아주 빛나고 인자했어.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그 전체 인상은 귀족적인 거는 있으면서도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호남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식으로 실감나게 묘사한다. 특히 시인이 감격해하는 장면은 44년 여름 몽양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의 육촌 여동생과 결혼할 때, 몽양이 주례를 서고 카프 비평가 임화와 국문학자 김태준이 축사를 했다는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좌파 지성들이 서울 가회동 골목에서 젊은 시인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장면의 회상을 거듭하였다. 

또한 40년대말 월북 문인의 북한에서의 행적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카프 시인 박세영이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할 때 김일성의 지도를 직접 받고 긴장했다는 증언을 전하는 대목이나, 안룡민의 압록강변 집에 머물면서 밤새 정담을 나누었다는 회상에서는 당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반면 40년대초 석관동의 임화·지하련 부부 집을 방문했을 때 만난 작가 안회남이 그즈음 막 징용에서 돌아와 초췌해보였으며, 47년 월북 후 평양 민주조선사에서 조우했을 때는 남쪽 출신이라 홀대받아서인지 아니면 두고온 가족 때문인지 쓸쓸해 보였다는 대목에선 시인의 섬세한 상황 파악이 돋보인다. 

임화의 소개로 좌익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장 김남천의 가회동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곰팡이 핀 ‘자본론’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신인이 이시인에게 그맘때 매일신보에 기고했던 ‘8·15’란 소설의 표제를 한글로 표기할까 한문으로 할까를 의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해방 직후 서로 견원지간으로 알려졌던 좌우익의 친분을 증언한 것도 특이하다. 김남천은 우익 한민당 간부인 장덕수와 평양 대동면 동향 출신이고 동서지간이라 친했다는 내용은 냉전체제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시인은 “당시에는 좌·우익 인사들의 관계가 오늘날처럼 극악스럽지 않고 부드러웠다”면서 “김남천과 장덕수는 이념적으로는 상극이었지만 동서지간이 될 만큼 절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내가 우남 이승만이 귀국할 당시 동신일보 기자였는데 45년 10월18일 하지와 이승만을 인터뷰했거든, 그 이승만하고 내가 모셨던 몽양 여운형 선생도 이념은 달랐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주 친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분단 이후 너무 경직되고 과장된 교육 탓에 오히려 요즘 이념이 다르면 인격적으로도 능멸해버리는 풍토가 돼버렸다”고 한탄했다. 

이시인의 공식 경력에 의하면 47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후 33년 동안 “일체의 공적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서울 뒷골목에서 칩거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여럿 드러났다. 비록 다 공개할 순 없지만 그 시기에 북한에서의 기자 활동과 당에 대한 호감, 6·25전쟁 때의 빨치산 활동, 재야 민주화투사로 활동한 뒷이야기를 녹취할 수 있었다. 그는 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취재 중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 투옥된다. 이후 엄혹한 분단체제 하에서 구멍가게, 학원 강사, 번역, 사설학원 운영 등의 일을 하였다. 만약 그가 문단 및 학계에 영향력이 지대한 유명한 권력 문인, 대표 인사였다면 세상에 이미 알려진 생애와 증언 이외의 새로운 사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을까 싶다. 

이기형 시인은 80년대초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을 통해 창작과비평사의 이시영·신경림·백낙청을 만나고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면서 진보적 민족문학 진영의 원로로 공적 활동을 재개한다. 89년 7월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이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적도 있다. 

이후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99년 ‘4월 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민예총·범민련 등의 고문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등 재야 민주화운동에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기형, 늦깎이 등단 ‘통일시인’- 

구술사의 이념에 따르면 주류 담론에서 소외된 비주류 문학담론의 담지자가 주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남한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한설야·임화·이기영 등 카프 작가와 이태준·안회남·오장환 등 문학가동맹 출신, 북한문학의 주류가 된 박세영·박웅걸·박산운·황건·안룡만·리동규·천세봉 등에 대한 이시인의 귀중한 증언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사의 기초자료가 될 터이다. 

구술사의 본래 이념대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대항 담론을 제시함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문학사 내지 구술 문학사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여러번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서 시인은 미수의 나이에도 여전히 빨치산을 기리고 통일운동에 열을 쏟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첫 시집 ‘망향’(1982)부터 ‘산하단심(山河丹心)’(2001), ‘봄은 왜 오지 않는가’(2003)에 이르기까지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시정신을 열정적이면서도 일관되게 보여준 바 있다. 특히 ‘가시밭 약전(略傳)’ 연작시에서는 직접 만나 취재한 수십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겪었던 고난과 신념의 편린을 장강대하처럼 토해낸다. 이는 단순한 취재의 산물이 아니라 동지애의 발로였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북한에선 유명한 시인 이동규와 빨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지리산 57사단에서 만났다는 극적 증언이 한 증거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 할머니가 시편에서 누락된 이유를 증언한 대목이다. 시인 생각에는 노영호야말로 투쟁을 한 진정한 마지막 빨치산이고 정순덕은 단지 산에서 연명만 하다가 하산했으며 더욱이 나중에 전향했기에 ‘가시밭 약전(略傳)’의 반열에 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진행되던 지난 4월 정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시를 써서 낭독하는 동지애를 보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워낙 연로해서 수전증으로 떨리는 두 손을 한데 그러쥐고 어렵게 원고지에 한자 한자 각인하듯 육필시를 쓰는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처연할 지경이었다. 

〈김성수/ 문학평론가·한신대 연구교수〉 


통일 염원 이기형 민족시인, 부디 영면하소서!
[추모]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의 위대한 발자취, 분단조국에서 지다
 
윤영전 
이기형 민족시인, 부디 영면하소서!


선생님은 금년 초 까지만 해도 조국의 평화통일에 관련한 행사에 꼭 참석하시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항상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던 여민(與民) 이기형(李基炯) 선생님이었다. 올해 96세수로 천수를 다 하셨지만 오직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조국의 통일을 보고 떠나시겠다며 건강을 지키시던 민족시인 이시며 민중의 스승이셨다. 

언제나 초노처럼 정정하시고 약속을 철저히 지킨 성의는, 칠순을 갓 넘긴 나에게도 따라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선생님의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새삼스럽게 여쭈면, 단 1초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신다는 비법을 알려주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그만 걷기가 힘드시고 약속이 한두 번 어겨지기도 하였다. 

지난 5월 중순에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처지에도 모임에 참가하셔야 한다며 집을 나선 선생님이셨지만 힘이 드셨다. 그리고는 결국 입원을 하셨지만 소식을 늦게 듣고서 6월초에야 찾았던 병실에서 “구암이 찾아왔다”고 하시면 고개를 끄덕이시던 선생님이 곧 회복을 하시리라 믿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난 주 12일 후 결국 한 많은 조국분단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여민 선생님의 생애는 한반도가 비운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식민지하에서 젊음을 보내시며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고 민족해방을 위해 가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1917년 변신의 달인이었던 박정희와 동갑내기로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다.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투쟁운동에 접하게 되고 1933 이후 소설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소설가 이기영 등을 만나면서 조선독립과 문학의 역할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하시고 도쿄일본대학 예술 창작과에서 수학한 후 45년까지 학병거부 지하 항일투쟁 관련협의로 피검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고 해방소식을 접했다. 여민선생은 신문사 정치부 사회부 기자로 있으시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인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등을 만나고 1947년 7월19일 선생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왔던 몽양선생이 암살당하자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취재를 하였으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투옥된 후 부터는 처자식을 위한 구멍가게와 학원운영, 강사와 번역일 등 전전하면서 서울에서 칩거 하였다. 

1980년 시인 김규동 소설가 남정현 등 지인을 통해 신경림 시인 백낙청 평론가 이기영 시인을 만나 당초 분단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꾸어 시창작과 함께 민족평화통일 등 사화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시며 민족작가회원으로 활동하시었다. 1982년 첫 시집 <망향>을 내고 1989년 시집<지리산> 필화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불구속 기소되고 징역1년 집행유해 2년을 받았다. 1999년 4월에는 4월혁명상을 수상하시고 2001년 시집 <산하 단심> 과 2003년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펴내셨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북한 고향하늘아래 2003년과 2005년에 평양을 방문하시고 2009년 10번째 시집<절정의 노래>를 발간하시었다. 선생님은 1980년부터 2013년 1월까지 재야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 단체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석하시어 추상같은 즉흥시를 읊으시며 모임을 축하하시고 격려하시었다.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고문을 지내시면서 중앙과 지방에도 꼭 참석하시어 분단조국의 아픔과 평화통일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언제나 참여하시었다. 분단조국 6.25전쟁으로 인한 100만의 희생자 유족회에서 시를 낭송하시고 격려말씀을 힘차게 해 주시어 유족들을 격려하시곤 하였다. 선생님은 앞에 소개한 시집 말고도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해연이 날아온다>를 펴냈다. 

여민 선생님이 운명하시기 전날에 필자는 병실을 찾아갔었다. 가끔 숨을 가쁘게 쉬시고 음식섭취고 여의치 않아 호스를 통해 공급하였다. 그 때 눈을 감으시고는 좀처럼 뜨지 않으셨다. 89세의 사모님이 곁에서 구암 선생이 왔다고 하셨지만 고개만 끄떡하시었다. 너무나도 슬픔이 차올라 사모님은 흐느껴 우시고 나도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만나신 사모님이신가? 북에 따님을 두고 오셨지만 남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신 사모님을 만나 아드님을 두고 자부를 두어 장손녀로 중학생, 초등생 둘을 두시고 귀여워하시었다. 

재야와 한국작가회의 주관으로 “민족시인 여민 이기형 선생 통일애국장”을 발인이 있기 전날 7시에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각계인사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민중의례에 이어 약력보고 맹문재 시인의 조시, 오종렬 진보연대의장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 그리고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장이 추도사가 있었다. 조가도 노래극단 희망새가 하였다. 유가족 대표로 외아들인 이휘건 한양대 이공대 교수와 자부인 윤석희 변호사가 자리하고 사모님은 내내 눈물을 흘리셨다. 이어서 아드님인 이 박사가 자세한 선생님과의 지난 삶을 담당하게 말해 주었다. 

“사실 어려서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 진학을 할 때마다 아버님은 괴로워 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공부를 희망했고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니 잘했다는 말씀을 주셨지만 얼마나 학비가 어려운데 승낙을 하실까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대학을 가고 그리고 유학까지 고집해서 갔습니다. 아버님의 가정형편으로 치면 불가한 일이었지만 반대를 하시지 안하셨기에 결국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게 아버지의 신분이 어려움과 가정사의 어려움을 어렵게 토해내는 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참으로 장한 아들이고 며느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민선생님은 이런 아들과 며느리를 두시고도 자랑을 하지 않으셨다. 퍽이나 안정된 효자효부를 두신 여민 선생님이셨지만 정신에는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북의 고향을 찾아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고 이산가족들이 모두 자유롭게 만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하셨다. 필자와 만남은 한 20여 전으로 한국작가회의에서 회원으로 뵙게 되었었다. 특히 여운형선생 건준에 희생된 나의 맏형을 아시면서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고 필자의 몇 번의 출판기념회에서 격려사와 문집에도 축하격려의 시를 꼭 써주시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우리가 보다 더 활발한 평화통일운동을 하자고 언제나 격려해 주시었다. 

통상 여민 선생을 통상 몽양 여운형 선생의 비서로 이해되어 왔지만 비서가 아닌 진실로 조국의 애국자이기에 존경을 해 왔다며 여운형 전기를 썼다고 고백했다. 1991년 “몽양 여운형 전집”발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아래의 축사를 남겼다. 

<몽양을 생각하며> “몽양을 거론다다는 것은 언제나 감격이요 약동이 아닐 수 없다. 몽양을 말한 많은 사람들을 한 결 같이 몽양을 영원한 청춘이라 했다. 몽양은 결코 죽지 않았다. 몽양은 이 땅의 역사와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몽양의 현재성은 재확인 할 때마다 통일 위업을 생각하게 되고 변화하는 세계사에서 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세 가지 주의에서 무슨 새로운 주의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몽양을 앉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라고 적었다. 

그리고 시집을 발간한 “해연(海燕)이 날아온다” 시구를 소개한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 할아버님이 내려다 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 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뻐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여민 선생은 2013년 6월 14일 사랑하는 가족과 언제나 따르는 후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병원에서 발인하고 통일동산 방향에 있는 이북5도청 향민들이 잠들고 있는 묘역 제 62호에 안장되시었다. 선생님은 분단조국에 곧 통일이 다가올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건강을 챙기셨다. 베드로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으시면서 언제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오기를 염원하시면서 하세하셨다. 

여민 선생님! 민족이신 선생님! 이제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부디 천상에 드시어 영면하소서! 저희들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구암 윤영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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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작가( 소설 수필 서예) 칼럼니스트. 한국작가회의 회원. (사) 평화연대 상임고문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평화전문 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 http://www.peacemaking.co.kr 2013년 6월 24일자 (제55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아들

 


Education

연도
학 력
학위
부터
까지
대학교
전공명
지도교수
1980.03
1984.02
서울대학교
화학
 
학사
1984.03
1986.02
서울대학원
화학
김관
석사
1988.09
1993.03
Columbia Univ.
화학
Richard Bersohn
박사
1993.04
1994.04
Brown Univ.
 
E.F. Greene
박사후 연수
최종학위논문제목
Hydrogen atoms in photodissociations and chemical reactions
 Professonal
연도
기 관 명
직위
1994.04
1998.04
삼성전자 반도체
선임연구원
1998.05
2002.08
삼성종합기술원
수석전문연구원
2009.03
2010.02
워싱턴 대학
교환교수
2009.09
현재
한양대학교
교수




현역 최고령 이기형 시인 별세

기사등록 : 2013.06.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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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통일 문제에 천착해 온 현역 최고령 이기형 시인이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함남 함주에서 태어나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수학한 고인은 1947년 ‘민주조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몽양 여운형의 비서였던 그는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몽양 서거 후 절필하고 칩거하다 80년 활동을 재개해 재야 민주화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2009년 열 번째 신작 시집 를 내는 등 최근까지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해왔다. 유족은 아내 방현주씨와 한양대 화학과 교수인 아들 휘건(52)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23호실, 발인은 14일 오전. 장지는 경기 파주 동화경모공원.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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