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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젊을 때 넝마주이 생활도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16.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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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젊을 때 넝마주이 생활도

미당 서정주 시인 탄생 1백년, 동생 서정태 시인 인터뷰

글 | 조성관


▲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에서 생을 받았다. 올해는 미당 탄생 100주년이다. 
   
   선운리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와 하나의 담을 사이에 두고 아담한 한옥이 한 채 서 있다. 생가의 별채에는 미당의 동생 시인 서정태가 홀로 기거한다. 젊은 날 전북에서 기자생활을 30년간 한 그는 2013년 두 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를 펴냈다. 미당에게 시를 쓰는 아우가 있다는 사실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거목(巨木)의 그늘에 가려졌던 것일까.
   
   지난 1월 13일 미당이 태와 뼈를 묻은 부안면 선운리를 찾았다. 생가는 미당시문학관에서 50여m 거리에 있다. 생가의 뒤쪽에는 소요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마을 양옆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아늑하다. 마을 저 멀리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바로 아래까지 파도가 밀려오곤 했단다. 미당의 육신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태어난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을 찾았다.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미당시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찬찬히 둘러보아도 1시간 반이면 미당의 삶과 시 세계가 이해되기 쉽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육필 원고, 파이롯트 잉크, 마라톤 타자기, 원형 책상, 옷장, 모자, 지팡이 등 시인의 혼과 체취를 물씬 풍기는 물건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봄 여름 가을에는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문학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중에서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문학평론가와 시인들이 미당을 평가한 내용이었다.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다’(고은), ‘우리는 미당 선생의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바다의 것, 하늘의 것, 우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이어령), ‘서정주의 손에서는 우리 일상생활의 무엇이든지 그대로 시가 되어 버린다’(김우창),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의 혼’(문정희),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미당의 시이다’(이남호).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생가 옆의 별채로 찾아갔다. 문패에는 ‘우하(又下) 서정태’라고 되어 있었다. 우하정(又下亭)이다. 서 해설사가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여닫이 창호문이 열렸다. 손으로 뜬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백발의 노시인이 “어서 오세요”라며 씩 웃었다.
   
   서정주는 5남매의 장남. 둘째인 서정태는 1923년생이다. 큰형 정주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93세인데도 혈색이 좋았고 말할 때 발음이 거의 새지 않았다. 황토로 벽이 마감된 방은 13㎡(4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침대, 책상, 좌상, TV, 그리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혼자 다 해먹어요”라고 말했다.
   
   미당은 2000년 12월 24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부인 방옥숙 여사와 사별한 직후 2개월 반 동안 곡기를 끊고 맥주만 마시며 연명하다 부인 곁으로 따라갔다. 서정태 옹은 2000년 12월 24일 그날 미당을 임종했을까.
   
   “삼성의료원 형님 병실에 있다가 오후 6시쯤 거처로 왔어요. 오후 9시쯤 질부가 전화를 해서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해요. 그래서 내가 ‘내가 보니까 2~3일은 더 살 것 같던데’ 하고 끊었지요. 그러고 있는데 11시쯤 운명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그날 눈이 무지하게 많이 내렸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병실에서 형님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형님이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주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데요. 돌아가시기 전날에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형님이 아프기 전에는 제가 형님을 찾아갈 때마다 맥주 한 박스를 사들고 가곤 했죠.”
   
   여덟 살 위의 형은 어린 동생에게 형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형제만이 간직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랑 미당이랑 여덟 살 차이요. 형님이 열세 살 때부터 다섯 살 동생인 나를 데리고 잤어요. 나는 형님의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랐지요. 내가 자다가 깨어 귀신이 보인다며 무서워할 때마다 형님은 저를 안아주시곤 했지요.”
   
   미당은 부안에서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열다섯에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에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 지지 주모자로 연루돼 퇴학을 당한다.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형님이 아버지와 겸상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형님이 퇴학당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땡그랑’ 하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밥을 드시다 숟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미당은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회 사건’에 몰려 또다시 퇴학을 당한다. 독서회 사건이란 일부 학생들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사회주의 사상 관련 책을 돌려 읽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두 번씩이나 퇴학조치를 당하자 미당은 아버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다.
   
   그러나 동생에게 형은 전혀 달랐다.
   
   “나에게 형은 ‘절대’여. 우리 형님이 절대 최고였어요.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형을 미워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그런 형을 왜 미워하실까 생각했어요.(웃음)”
   
   미당을 아는 모든 이들이 미당을 천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생은 형을 어떻게 느꼈을까.
   
   “내게는 천재보다는 절대적인 대상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눈칫밥이 계속되자 미당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아버지 돈 300원을 훔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한 겁니다. 그런데 친구집에서도 하루이틀이지 계속 있을 수 없잖아요. 친구들이 학교 간 시간에는 부립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기 시작해 문학에 빠져든 겁니다. 열일곱에서 열아홉 나이에 문학의 세계에 들어간 겁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미당이 젊은 시절 넝마주이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연이 궁금했다.
   
   “(웃음) 문학에 빠져 살다 바로 톨스토이주의에 심취한 결과지요. 톨스토이주의가 바로 휴머니즘 실천 아니요? 거기에 영향을 받아 넝마주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요. 그때 마포다리 밑에 거지들이 많았는데, 거기 가서 거지들과 어울렸지. 겉멋이 잔뜩 든, 옷도 멀쩡하게 입은 사람이 넝마주이를 하고 종로길, 정동길을 다녔으니 어땠겠어요? 그래서 한때 형님은 장안의 명물로 불렸소.(웃음)”
   
   ‘이상한 넝마주이’ 소문은 장안에 퍼졌다. 조선불교 대종사 석전 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대종사가 미당을 보자고 했다. 열아홉 살 청년이 당돌하게 톨스토이를 얘기하는 걸 듣고는 석전 스님은 불교 공부를 권한다. 이렇게 되어 머리를 깎고 참선과 함께 불교 공부를 시작한다. 
   
   문학 천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유년기에 가족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그런 경우다. 미당의 경우는 외할머니 영향이 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2001년에 복원된 미당 생가. photo 조성관


   “틀린 말이 아니여. 생가에서 개울을 따라 70m쯤 가면 외갓집이었어. 형님은 보통학교 때 서당을 다녔는데, 서당도 외갓집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 형님은 틈만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외할머니께선 ‘우리집 강아지 왔능가’ 하면서 누룽지, 고구마 같은 것을 주셨지. 그런 거 받아먹는 재미에 형님은 외갓집을 들락날락하셨고. 우리 외할머니는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유충렬전 등을 전부 외우고 있던 분이셨지. 형님이 가실 때마다 이런 구전설화를 얘기해 주셨고, 형님은 전날 다 듣지 못한 것을 또 들으려 외갓집에 가곤 했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머리에 다 박힌 거겠지.”
   
   고창군 흥덕읍에서 부안면 선운리로 가다 보면 고갯길이 나온다. 질마재다. 미당은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어린 시절 각인된 고향의 이야기와 고향의 땅, 바다, 바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질마재 신화’의 해일 편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서정태 옹의 설명이 계속된다.
   
   “선운리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지. 일종의 풍류(風流)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유년기부터 소년기·청년기를 거치면서 머릿속에 들어간 이런 풍류가 시로 나오는 것이라고 보면 될 거야.”
   
   알려진 대로 1936년 미당은 동아일보에 시 ‘벽’이 당선되어 일약 시인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미당은 20대 중반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 김기림의 부탁으로 ‘조선일보 폐간 시’를 쓰기도 했다. 1941년에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을 냈다. ‘자화상’ ‘귀촉도’ 등은 ‘화사집’에 수록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미당은 이른바 친일시 6편을 쓴다. 70년 시작 활동 중 쓴 시 1000편에서 6편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동생은 형의 ‘친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지가 궁금했다.
   
   “미당을 보고 친일했다고 하는데, 왜정 말기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땐 경찰서를 주재소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일본 경찰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아세요? 일부러 주재소 앞을 안 지나고 빙 돌아가곤 했을 때여. 미당이 고창경찰서에 붙잡혀 가 49일 만에 풀려난 적이 있어. 왜 붙잡혀 간 줄 알어? 학생들이 연극을 하다 불온하다고 붙잡혔는데 조사해 보니 서정주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거야. 그래서 잡혀간 거지.” 
   
   서 옹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친일은 일제와 친하게 지내면서 군수, 경찰부장, 경찰서장, 고등계 형사를 지낸 사람들을 친일이라고 해야 맞지. 형님은 목에 칼을 들이대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를 쓴 것이지. 그런 시를 안 썼으면 오지게 좋았겠어. 하지만 안 쓰곤 못 배기니까. 힘 없는 나약한 시인이니까 쓴 것이지.”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당은 마포구 공덕동 301번지에서 어머니, 아내 방옥숙, 아들, 누이동생, 그리고 서정태와 살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당은 조지훈, 서정태 등과 함께 육군 소속 정훈국에서 활동하다 가족을 피신시킬 겨를도 없이 동생과 함께 한강을 건너게 된다.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며 정훈 활동을 한다. 그러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부산으로 후송되었고 동생과 재회한다.
   
   “형님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건 아마도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계속 들리니까 죄책감으로 그리 되었겠지요. 그러다 9·28 서울수복 때 서울 공덕동 집으로 가서 가족이 무사한 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으셨어요. 그리고는 정신착란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지요.”
   
   미당의 가족 사랑은 유별나다. 아내 방옥숙을 모델로 쓴 시만도 여러 편이 된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있다. 시인 동생은 형님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특히 좋아할까. 그는 “다 좋아하는데(웃음)”라며 특정하지 않으려 했다. 서정태 옹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거북이에게’ ‘귀촉도’ ‘국화옆에서’….”
   
   서정태 옹은, 기자가 ‘거북이에게’는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자 시를 암송했다.
   
   “거북이여 느릿느릿 물살을 저어/ 숨 고르게 조용히 갈고 가거라. / 머언 데서 속삭이는 귀속말처럼/ 물니랑에 네리는 봄의 꽃니풀,/ 발톱으로 헤치며 갔다 오느라….”
   
   그는 미당 생전에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시집도 한 권 냈다. 미당은 동생의 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1948년도 당시에 우리나라 유일한 문예지가 ‘문예’였어요. 매월호에 내 시가 게재돼 솔찬히 인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형님은 한 번도 칭찬해 준 적이 없어. 내가 66살에 첫 시집 ‘천치의 노래’가 나올 무렵이었지. 형님이 ‘너 시집 낸다고 하던데 서문은 누구한테 써 달라고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김광균씨에게 부탁할 거라고 했더니 형님이 ‘내가 써주마’ 했지요. 제 시를 형님이 다 읽고는 처음으로 ‘야, 니 시 좋더라’고 하셨어요.”
   
   부모가 큰 성취를 했을 경우 때로는 자식에게 부모 명성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어땠을까.
   
   “어렸을 때는 조금 그랬지요. 누구한테 나를 소개할 때 ‘서정태’라고 하지 않고 ‘서정주 아우’라고 했으니. 사실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런데 50이 넘고부터는 그걸 다 초월했지. 훌륭한 형님이 있으면 좋은 거지, 안 그래요?”
   
   1시간40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기자는 서 옹의 기억력에 놀랐다. 그는 유년기부터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시와 등장인물까지. 오히려 너무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답변이 곁가지로 빠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가히 천재적인 기억력이었다.
   
   시인 동생이 보는 미당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미당도 명예욕은 있었겠지. 그래서 상을 많이 받았잖아.(웃음) 미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남는 영원한 시인이 되길 원했을 것이여.”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서 옹이 말했다.
   
   “4월 13일에서 18일 사이에 한번 꼭 오세요. 그때 여기 오면 선계(仙界)가 따로 없어요. 예전에는 (지금) 논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오죽하면 이 동네를 선운리라 했겠어. 신선 선(仙), 구름 운(雲)을 써서. 내 그때까진 안 죽고 있을 테니까.(웃음)”
   
   선운리와의 첫 만남에서 기자는 천재가 태어나는 땅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영이 그랬는데 선운리도 그랬다. 자신의 마지막을 처음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서정태 옹은 생을 시작한 집 옆에서 시를 쓰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력 : 2015-01-27 오전 9:46:19



미당 아우 90세 서정태 시인 "형님 칭찬 예순에 처음 들었지"

입력 2013-04-14 16:45:25 | 수정 2013-04-14 23:00:16


독자 40여명 고창 문학기행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베스트셀러 10위 올라


“할아버지, 제가 시창작 수업에서 C학점을 받았거든요. 어떻게 시를 써야 할까요.”

“시는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해서, 내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써야지. 시는 쓰여야 쓰는 거지. 10년, 20년이 걸릴 수도 있어. 억지로 쓰려고 하지 말고 나오는 대로 써봐. 허허.”

할아버지 댁에 아들딸과 손주들이 찾아간 것 같았다. 전북 고창군 고향 땅에 두어 평 되는 초가집을 짓고 혼자 사는 미당(未堂) 서정주의 아우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90·사진). 27년 만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시와) 출간을 기념해 독자 40여명이 지난 13일 고창을 찾았다. 인터파크도서가 주최한 문학기행을 통해서다. 멀리까지 찾아온 이들이 반가웠는지 그는 오랜 시간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지난 2월 출간된《그냥 덮어둘 일이지》는 시집으로는 드물게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0위(4월 둘째주 예스24)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90년 인생의 통찰을 평화로운 낮잠 속 대화처럼 조곤조곤 들려주는 ‘느린 시’들이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는 것. 하지만 노(老)시인은 판매 부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많은 사람이 시집을 보고 있다”고 하자 그는 지나가듯 답했다. “많이 팔리긴, 요즘 누가 시를 보나. 손해만 안 보면 다행이지. 출판사 사장님한테 미안하니까….”


20대 중반부터 시를 쓰긴 했지만 이제야 두 번째 시집을 냈다. 평생을 ‘미당 동생’으로 불려 온 그다.  

“형님에겐 칭찬을 예순 넘어서 처음 들어봤어. 그래도 속으론 항상 나를 챙겨줬지. 첫 시집 낼 때 ‘너 시집 낸다면서, 서문은 누가 쓰니’ 하고 물으시길래 김광규 시인에게 부탁할까 한다고 했더니, ‘에이, 내가 써주마. 너 시 참 좋더라’고 하시더라고. ‘에이, 좋기는 뭐 좋아요’ 하고 말았지. 살아계셨으면 이번 시집도 칭찬해주셨을 텐데.” 

사실 그가 문학을 배운 것도 미당으로부터였다. 그가 11세 때 19세였던 미당이 하굣길에 항상 동화책을 갖다 줬다. 15세였던 누나 한 명과 함께 ‘형제시첩’이라는 잡지도 여러 번 만들었다.  

그가 기거하는 초가집에서는 미당 내외와 부모님의 묘가 한눈에 보인다. 그는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나도 마찬가지”라며 “즐기면서 시묘살이하는 셈”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형님 묘소 보면서 말을 걸어. 대화를 많이 나누지. 내일 아침에는 이렇게 말을 걸려고 해. ‘어제 사람들과 형님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들으셨소?’” 

그는 독자들을 위해 시를 낭송했다. “그냥 덮어둘 일이지/봄바람에 옷소매 스치듯/지난 잠시의 눈맞춤/그것도 허물이라고 흉을 보나//대숲이 사운거리고/나뭇잎이 살랑거리며/온갖/새들이 재잘거리네” 평화로운 오후였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두번째 시집 낸 서정태 시인 “이젠 ‘서정주의 아우’라는 말 들어도 상관없어요”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나는 시집 안 내도 상관 없는 사람이야. 그냥 나를 위해서, 내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1923년생으로 올해 만 90세인 서정태 시인(사진)은 환갑을 훌쩍 넘긴 1986년 첫 시집 <천치의 노래>를 펴냈다. 친구였던 동아출판사(현 열림원) 창립자 고 정인명 사장이 10여년 시집을 묶자고 졸랐다. 그 후 두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가 나오기까지 27년이 걸렸다. 이번에도 <미당 서정주 시선집> 때문에 알게 된 시와시학사 최명애 사장이 10여년에 걸쳐 청했던 결과물이다.

서 시인은 미당 서정주(1915~2000)의 8살 아래 친동생이다. 1946년 만주일보에서 시작해 전북일보에서 30년간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퇴직 이후 자식과 손주들이 사는 서울, 춘천 등지에 머물다가 2009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소요산 아래 미당 생가와 미당문학관이 있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산다. 그의 맑고 간결한 시들은 형의 문학관을 돌보며 적막하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의 산물이다.

“여기 소요산 아래 혼자 살고 있는 것은/ 한 사발의 정안수와/ 추석날 성묘길 찾는 마음/ 아아 그 마음 그 마음마저 없어졌다면야/ 다 그만 두어버리고/ 그 어디 섬에라도 가버렸을게다/ 우체부도 안 오는/ 섬에라도 가버렸을게다”(‘소요산 아래 사는 까닭’)

사실 미당은 아우이자 후배시인이던 그에게 너무 큰 산이었다. 두 사람은 고창 고향집에서 정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운데 누이가 있었으나 미당은 남동생을 특히 아꼈다. 어렸을 때부터 압도적인 시재(詩才)를 보인 형을 따라 그도 시인이 되고 싶었다. 미당이 26세에 <화사집>(1941)을 냈던 것처럼 그도 25세 때부터 이미 신문·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8년 ‘바위’라는 시를 발표한 게 처음이다.

“소위 문학청년 시절부터 늘 ‘서정주씨의 아우 되는 아무개’라고 불렸어요. 젊을 때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안들었어요. 나도 독립된 인격을 지닌 아무개인데 늘 미당의 아우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상관없어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생전의 미당은 아우의 첫 시집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란다.” 그 시집은 절판됐으나 아우의 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랐던 형의 정성 덕분인지 자신의 나이와 같은 90편의 시가 실린 두번째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뜰 앞에 심은 다박솔이 커서/ 학이 날아 와 우는 날// 그 하늘 너무나 맑기만 해/ 천상의 피리소리도 들리는 날// 오래도록 참아왔던 나의 노래/ 그때에나 한 곡조 불러보리”(‘학이 우는 날’)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이어트했다고 해야 할까. 밑바탕은 다를 것 없지만 늙었으니까 군더더기가 빠졌겠지요.”

‘독거노인’의 일상을 담은 그의 시는 때때로 쓸쓸하다. 그러나 자연이 곁에 있어 외롭지 않다.

“세월은 가고/ 편지 한 장 쓸 곳 없다/ 편지 한 장 올 데도 없다// 계절이 자꾸 바뀐다/ 나만 혼자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백일홍이 피었다가/ 또 지고 있다”

“4월10일쯤 되면 소요산에 하얀 산벚꽃이 많이 피어요. 파란 산에 하얀 꽃이 얼룩덜룩한 게 참 예뻐요. 내가 죽기 전에 꼭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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