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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의 領域이 대동강유역에 한정된다고 보았으나 요동.만주지방까지 확대된걸 청동기와 철기를 발굴함으로서 고고학적으로 입증한 세계적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 박사]
군부독재가 판치던 학창시절, 우리는 월북작가나 납북작가의 시나 소설은 금서로 지정하여 보질 못했고 꼭 보아야 할 경우에는 정X용, 임X 하는 식으로 누구인지 알수 없도록 한 후에 접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민주화되고 선진국이 되어 자유롭게 정지용과 임화의 작품을 접할수 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은 단지 문학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문학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우리의 반쪽 북한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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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히 러시아 폴란드 독일등 떠돌며 파란만장한 삶의 역경을 펼친 김상경 대령의 이야기를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소개했다. 그 자료중에 1940년 함께 입국한 도유호(都宥浩) 박사의 기사가 눈에 띠었다. 문득 만주에 풍문으로 떠돌던 고대유적을 평양의 고대유적과 연결시켜 우리 고조선의 역사가 평양을 넘어 만주에 이르르기까지 폭 넓게 분표했음을 밝힌 '조선원시고고학'의 저자 그 도유호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 砲煙彈雨의 歐洲를 九死一生으로 脫出 卅年 만에 도라온 金相謙氏[寫]//都宥浩博士도 昨日橫濱에 到着 - (동아일보 1940년 1월 25일)
▲ 참고: 도유호(都宥浩, 1905년7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 ~ 1982년)는 북한의 고고학자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독일 여성과 결혼한 이후 귀국하였으나 1946년에 월북하여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맡는 등 정계에서도 활약하였다. 굴포리, 지탑리, 궁산리 등의 북한 고고학 유적 발굴을 주도하였다. 그의 1960년 논문 '조선원시고고학'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북한에서 고고학 연구의 기초 논문이 되었다. 또한 황기덕과 공동으로 '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1905년 함흥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도유호는 함흥 영신학교와 함흥 영생학교 4학년을 마치고 1922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23년 졸업하였다. 이 해 신흥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4년 사직하고,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해 1929년 졸업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서 연경대학문학원(燕京大學文學院)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하다가 이듬 해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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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입학해 사회철학과 사회사를 공부하였고, 1933년 오스트리아의 빈대학 사학과로 옮겨 고고학을 전공, 1935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빈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문화적 연관 속의 한국사 문제’다. 그는 그 뒤 바로 빈대학 선사연구소에 들어갔다가 히틀러 정권에 의해 잠시 투옥됐다가 석방돼 1939년 김상경과 함께 난리를 피해 귀국했고, 해방후 경성대학에서 가르치다 월북해 김일성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귀국 후 일제의 탄압으로 아무 일도 못하다가 1942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대학선배인 오카(岡正雄)를 도와 멩힌(Menghin, O.)의 『Weltgeschichte Der Steinzeit』(Wien, 1931)을 번역해 『석기시대의 세계사(石器時代の世界史)』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잠시 함흥시립도서관장과 함흥의과대학 강사를 지내다가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월남하였다.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해 인민당 외교부장(人民黨外交部長)과 과학자동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리자 가족과 함께 다시 월북하였다. 북한 고고학의 제1세대를 이끈 것은 도유호와 체코 프라하 대학 출신의한흥수다. 두 사람 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한흥수가 주로 추상적 이론 중심의 논문을 썼던 데 비해 도유호는 고고학적 발굴에 기초한 실제 중심의 논문을 써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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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는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와 고고학연구소장, 1949년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원시사분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되자 물질문화연구소의 초대소장직에 오르고, 1959년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로 개칭된 뒤에도 그대로 소장직을 맡았다.도유호는 1959년에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문화의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고구려의 고분 문화가 서역과 무관치 않음을 주장했는데,그의 이 주장은 뒷날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서 고구려 고분의 것과 같은 사신도가 발견돼 그 정당성을 획득했다.
그가 20년간 평양에서 행한 유적의 발굴조사는 대단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중요한 유적으로는 1947년 송평동패총, 1949년 안악3호분·나진 초도유적, 1950년 용강 궁상리유적, 1954년 회령 오동유적, 1955년 승호 금탄리유적·강남 원암리유적, 1956년 영흥 용강리토성·사리원 상매리석관묘,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 1959년 강계 공귀리석관묘, 1963년 의주 미송리동굴유적·웅기 굴포리패총 등이 있다.
수많은 유적발굴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발표하는 한편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위치비정설’과 『조선원시고고학』의 출간이다. 도유호는 1960년대 초 북한 학계에서 뜨겁게 전개된 고조선 강역에 관한논쟁에서 고조선의 중심을 랴오허(遼河)라고 본 주류 학설에 맞서 그것이 평양이었다고 주장한 뒤 학계의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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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어 약 10여 년간 토론을 거듭하면서, 1961년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한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재만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한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출토된 유물에 근거한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으나 평양유물과 만주유물의 같은것임을 임증하여 고조선의 ‘재만주설’ 이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도록 이끌었다.
1960년 그 때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조선원시고고학』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아직 굴포리 구석기유적을 발굴 조사하기 전이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에 관한 것만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원시고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북한 고고학의 전범이 되고있다.
그리고 즐문토기 유적은 신석기시대, 거석문화 유적은 청동기시대, 또 압록강·두만강유역의 유적은 초기철기시대로 각각 규정하고, 유적 상호간의 관계, 종족의 기원과 구성문제, 편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금석병용기설을 수정한 것은 가장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지탑리원시유적발굴보고』·『궁산원시유적발굴보고』 3책으로 1961년 과학원으로부터 국가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63년 『조선원시고고학』에서 문화의 전파이론을 채용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배되는 반동적 이론이라 하여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비판이론이 그대로 북한학계의 기본원칙으로 굳어지게 되자, 도유호와 같은 넓은 시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고, 대신 편협한 국수주의이론이 원칙화되었다.
도원철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지식사회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에 가깝다고 하겠다. 1965년 이후 북한학계에서 사라진 그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의 중학교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1982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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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강인구의 도유호 연구를 많이 참조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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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역사학자 하담을 돌아보다 / 2017-05-0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창균 연대 교수 10년간 연구성과 모아 <하담 도유호> 출간
유학 거쳐 해방 뒤 월북한 인물
한반도 구석기~철기 입증·체계화
일제 ‘금석병용기론’ 반박
남한 학계에도 막대한 영향력
한반도 구석기~철기 입증·체계화
일제 ‘금석병용기론’ 반박
남한 학계에도 막대한 영향력
분단 이후 남녘 학계에서 월북 인사들은 잊혔다. 그러나 단 한명, 예외가 있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고고학자 하담 도유호(1905~1982)다. 46년 월북한 뒤 김일성대 교수와 고고학·민속학 연구소장을 지낸 그는 60년 국내 첫 고고학개론서인 <조선원시고고학>을 통해 한반도의 선사, 고대사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로 구분한 편년체계를 처음 세웠다. 이 저서의 편년체계는 지금도 남북한 학계에서 연구의 기본틀이다. 한반도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금속기를 같이 쓰는 시대만 있었다는 일제의 악명 높은 금석병용기 학설을 처음 뒤엎고,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이도 하담이다.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90년대까지 남한 학계는 학문적으로 그를 극복하지 못했을 정도로, 분단을 넘어 그가 학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말한다.1세대 고고학자로 한반도 고고발굴의 아버지였지만, 정치사상 투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60년대 말 숙청당한 하담의 평전이 처음 나왔다.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최근 펴낸 <하담 도유호>(혜안)는 그의 삶과 학문을 상세히 살피고 분석한 역저다.하담은 함흥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유학해 조선사 전공으로 처음 현지 학위를 받았다. 월북한 뒤 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고고학을 이끌며 남한 학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지은이는 그가 프랑크푸르트대학 재학 중 스승인 사회사학의 거장 만하임을 독일 나치 정권이 축출하면서 그도 투옥과 추방을 겪고 빈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던 정황을 언급한다. 문화권 전파와 이동을 중시하는 빈 학파의 영향 아래 35년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세계 문화사의 넓은 시야에서 한반도 역사를 파악하려 했고, 이런 지론은 월북 뒤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고 책은 적는다.
40년 2차대전 발발로 귀국한 그는 일제 감시 속에 자리를 못 잡다 해방을 맞는다. 46년 3월 서울에 간 그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당, 조선공산당에 적을 두고 6달간 정치적 활동을 벌였다.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정치 이력은 월북 뒤 김일성대 교원 임용에 요긴한 근거가 됐다고 책은 서술한다. 47년 10월 역사문학부 ‘고고학 강좌장’으로 임명된 하담은 49년 고구려 벽화무덤인 안악 3호분을 필두로 한반도 구석기~철기시대를 입증하는 기념비적 발굴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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