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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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학 7.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7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6. 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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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WrEcjTUgc

[Ⅰ] 문학 7.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7

작년 2015년 6월 한국엔 메르스 전염병 창궐을 숨겨 무고한 국민이 줄줄이 죽어났갔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In Search of Lost Time)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의 아버지가 마침 프랑스의 전염병 예방의학의 권위자로 위생국 총감과 파리대학교 의학부 교수를 역임한 아드리앵 프루스트라는게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이 작품은 프루스트가 1913년부터 1927년까지 14년간 총 7권으로 집필한 대하소설급 장편입니다. 프루스트는 1871년 7월 10일 전염병 예방의학의 권위자인 아드리앵 프루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사는거 걱정없이 집필하는데만 몰두할수 있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의 심리학' 책입니다. 인간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경험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망각이라는 잔인한 파괴를 느끼고 그 파괴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되는겁니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지난시절을 기억해 내는 글쓰기로 망각의 파괴력과 대결하는 기억력이라는 무기를 제공합니다. 실재는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작품을 통해서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 내는 그 시간들이 마치 4차원의 세계처럼 그 시간이 속해 있었던 공간과 융화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도 지난 세월을 회고하면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합니다. 작품속에서 주인공이 질베르트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도 우리의 어린시절 아쉬움과 동일합니다. 결국 기억 속의 추억이 우리가 가진 귀한 자산인 겁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7/10~1922/11/18, 파리 출생)는 프랑스 소설가. 부친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전염병 예방의학의 권위자 모친 잔 베이유는 유대계 부유한 집안 딸. 9세의 천식 발작 시작 평생 고통. 1882년 콩도르세 고등학교 입학 일찍부터 문학작품 가까이 학교에서 작문과 논문으로 수상. 졸업(18세)후 군대지원입대 1년간복무 파리대학 법학부 1893년 법학사 이때부터 문학 살롱과 사교계에 자주 드나드는 한편 직업은 갖지 않고 문학에 열중. 최초의 저작 《즐거움과 나날(Les plaisirs et les jours , 1896)》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인지 그 밖에 발표했던 소품과 단편을 모은 것. 1895년부터 1899년에 걸쳐 3인칭 형식 자서전적 장편소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를 시도 미완으로 그쳤다.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1904, 1906). 후에 《모작과 잡록(Pastiches et mélanges, 1919)》과 《시평집(1927)》에 수록될 평론을 신문 잡지에 발표. 이러한 문학활동은 모두 '유일하고 참다운 글'을 쓰기 위한 준비. 1906년 양친을 여읜 정신적 타격을 넘어 《생트뵈브에 반대한다(Contre Sainte-Beuve, 1954)》을 쓰기 시작,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집필로까지 이어진다. 이후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몰두, 총 7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판.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로 1919년 공쿠르상을 받아 일약 유명, 이 걸작으로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27]의 소개 - 전체 7개의 소제목으로 만들어져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라 불리는 '나'가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이며 話者인 '나'는 등장인물 마르셀이 되기도 하고 작가 마르셀의 분신이기도 하며, 배경인 콩브레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일리에 마을이다.  제 1권의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마르셀 일가(一家)는 시골 콩브레의 숙모 레오니가(家)에서 여름 방학을 보낸다. 저녁에 문의 금색 방울을 울리며 주식 중매인의 아들 스완이 방문한다. 귀족 사교계 출신으로 영국 황태자, 프랑스 왕자의 친구이지만 편협한 계급 관념을 가진 중류 계급의 마르셀 일가는 스완의 화려한 교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어린 마르셀은 잠들기 전에 언제나 잠자리에서 어머니의 입맞춤을 받곤 했다. 어느날 밤 스완의 방문 때문에 그 습관이 사라지고 마르셀은 자지 않고 어머니를 기다린다. 허약하고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마르셀의 그 의지를 고쳐 주려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교육 방침은 변하게 되고. 그 날 밤은 아버지의 권유로 어머니는 조르쥬 상드의 소설 『프랑소와 르 샹피 François le Champi』를 읽어 주어 마르셀을 위로한다.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소년의 성격은 모든 가족들에게 체념과 더불어 받아들여지게 되고 소년의 병자로서의 어리광의 생활과 비극적 성격은 서서이 싹트게 된다. 콩브레에서의 의식적 기억은 거의 그것뿐이었으나 성인이 되어 살아가던 어느날 프티 마들렌느라는 과자를 차에 담가서 먹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기쁨으로 넘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맛과 냄새가 계기가 되어 콩브레에 관한 기억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콩브레의 교회, 콩브레의 남녀가 한잔의 차로부터 마술의 세계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콩브레의 산책로에는 두 개의 상반되는 방향이 있다. 하나는 교양 높은 유태인인 스완 씨네 쪽이며 다른 하나는 왕가의 대귀족인 게르망트네 쪽으로서, 이것은 후에 마르셀이 지니게 되는 감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의 방향을 상징하고있다. 이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은 이 소설을 일관하는 큰 줄기의 길로서 주인공 '나'의 성장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기 생-루 Saint-Loup와 질베르트 스완 Gilberte Swann으로 대표되는 이 두 방향은 제 7편에 이르러 그 두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생-루 양 속에서 결합하게 된다. 콩브레의 교회의 미사에서는, 사회의 명사가 되려고 시골 귀족들과의 교제에 집착하는 기사 르그랑당 Legrandan이라든가 할머니의 피아노 교사로서 천재 작곡가인 뱅퇴이유 Vinteuil 등을 만난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거의 독립적인 장편인 「스완의 사랑」이 삽화 형식으로 들어 있음이 뜻밖일 수 있다. 그러나 작가 프루스트가 묘사하는 사랑의 감정이 항상 주관의 투사(投射)임을 전제한다면, 독자는 스완이 작가 마르셀의 또 다른 분신일 수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스완의 사랑이 더듬는 경로 -욕망, 공상, 불안, 애착, 고뇌, 질투, 망각- 는 그 후에 주인공이 밟게 될 길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성격을 두 인물에게 나누어 준다든가, 현실적으로 알고 있는 몇 사람의 성격을 가지고 한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 낸다든가 하는 소설 기교를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교묘히 구사하고 있다. 실제로 스완의 사랑의 이야기가 끝나고서부터는 작가 자신의 사랑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어느날 '나'는 몽즈방에서 뱅퇴이유의 딸이 여러 친구들과 동성애와 새디즘에 탐닉하고 있는 장면을 엿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도 메제글리즈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탕송빌르 Tansonville의 스완 댁 딸로서, 첫 사랑의 대상이 되는 질베르트를 만나게 된다. '나'는 파리의 샹젤리제 Champs-Elysées에서 다시 질베르트를 만나게 되고 끼어들 수 없는 질베르트의 생활 주위에서 공상만을 그리는 모습이 주인공의 어린 첫사랑의 모습이다.

 

 소년 시절의 '나'가 질베르트에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시민 계급 출신의 딸인 알베르틴느 Albertine를 둘러싼 소녀들에게 대해서 지니는 동경은 그의 대작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이루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푸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지탱하는 뿌리는 시간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경험을 쌓으면서 시간의 흐름과 망각이라는 그 잔인한 파괴 작용을 느끼게 되고 점점 그 파괴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된다. 그런데 푸르스트는 작품을 통해서, 즉 어린시절을 기억해 내는 글쓰기를 통해서 오직 이 파괴력 앞에 대결할 수 있는 길은 기억력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프루스트에 있어서 실재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 내는 그 시간들이 마치 4차원의 세계처럼 그 시간이 속해 있었던 공간과 융화되고 있다. 마르탱빌르 Martinville의 종탑의 움직임을 저녁 놀 속에서 바라보며 황흩한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인상(印象)의 기억을 그린다. 프루스트는 이와같이 인간에게 있어 "무의식의 기억", "시간의 심리학"이라는 새 분야를 열어놓은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신체dml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살롱의 세계이다. 프루스트는 이 두 세계를 미메시스적 글쓰기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기록한다. 신체의 세계에 대한 미메시스는 ‘무의지적 기억’의 경험을 불러들인다.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지적-의식적 기억이고 또 하나는 무의지적-무의식적 기억이다. 의지적 기억이 합리성을 통하는 기억이고 그 기억들은 모두가 주체성을 고수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 기억들이라면 무의적 기억은 합리성의 검열을 벗어나서 떠오르고 그래서 의식으로 구축된 주체성을 해체하고 와해시키는 기억이다. 이 무의적 기억은 프루스트에게 신체를 통해서, 더 정확히 신체에의 미메시스를 통해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 - 반수면 상태속에서 신체와 침대의 접촉감을 통해 떠오르는 기억들의 장면을 통해서 발견되는 이 무의적 기억은 유명한 ‘마들렌 체험’에서 정점에 이른다.

 

또 하나의 미메시스는 부르주아적 귀족 살롱의 세계에 대한 미메시스다. 귀족사회는 순백의 소비자 사회다. 그들 사회의 모든 것들은 그 어떤 생산의 흔적도 지우고자 하는 세련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시선을 칭찬하지만 이 전문 소비자 사회, 스노비즘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프루스트의 진면목이다.

 

살롱의 세계에 대해서 프루스트는 이중의 태도를 지닌다. ‘아첨과 호기심’이 그 태도들이다. 부르주아 출신으로써 귀족들의 살롱을 출입하면서 프루스트는 그 귀족 살롱의 스노비즘적 세계에 편입되기 부단한 노력을 기우리고 그 결과 스스로 스놉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아첨의 육화와 더불어 프루스트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태도는 집요한 호기심이다. 그의 호기심은 미메시스적이다. 식물의 잎과 줄기에 눈에 띠지 않도록 달라붙은 작은 벌레처럼 그는 귀족 사회의 식물들에게 들러붙어 있다. 심지어 프루스트는 귀족사회의 하인들을 부러워한다. 그건 그 하인들이 귀족 사회에 가장 밀착한 존재들로서 그 사회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시선은 아첨과 호기심이 서로 알아볼 수 없는 관계로 착종되어 있는 미메시스의 세계이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귀족사회의 스놉이 되었던 건 귀족사회의 하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병든 나뭇잎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나뭇잎의 운명을 그 나뭇잎에 들러붙은 벌레는 미리 알아챈다. 병든 줄 모르던 나뭇잎은 결국 시들어 죽지만 그 병든 나뭇잎 위에 기생하던 벌레는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다. 프루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귀족 살롱과 부르주아 사회는 몰락의 길을 걷지만 프루스트는 신체에게로, 침대 안으로, 글쓰기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 온다. 그 삶으로의 귀환 과정이 프루스트의 글쓰기이고 프루스트의 문학적 미메시스가 지니는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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