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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단독] 살인마 전두환 ‘6월 민주항쟁 진압’ 軍 투입 검토했다 / 2016-06-29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6. 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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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정부 기밀해제 문서 단독 입수 <9>


‘6·29선언’이 나오기 닷새 전인 1987년 6월 24일 살인마 전두환이 청와대에서 개스틴 시거 미 국무부 차관보를 면담하며 대화한 내용을 배석한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문서. 살인마 전두환은 공공안전이 무너질 경우 무력을 동원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내전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며 미국이 반란세력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출처=미국 디지털 국가안보 기록보관소

살인마 전두환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 동원을 검토했던 사실이 미국 정부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6·29선언’ 닷새 전인 87년 6월 24일, 살인마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개스틴 시거 미 국무부 차관보를 만나 “공공안전이 완전히 사라지고 무정부 상태가 발생할 경우 정부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또 내전으로 치닫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거론하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국가를 파괴하려는 반란세력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군대 동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공공안전의 완전한 소멸’, ‘무정부 상태’, ‘내전으로 치닫는 최악의 시나리오’ 등 표현을 사용했다. 만약 살인마 전두환이 군대를 투입했다면 ‘5·18민주화운동’을 초월하는 유혈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정권 내부의 이견 등으로 최악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국민일보가 28일 입수한 ‘시거 차관보와 살인마 전두환의 회동’이라는 제목의 미국 정부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회동에 배석했던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국무부에 보고했던 문서다.

‘6월 민주항쟁’ 당시 군대 동원과 관련한 살인마 전두환의 발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서에서 살인마 전두환은 반정부 세력에 대해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으며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했다. 

87년 6월 23일 방한했던 시거 차관보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90분 동안 만났다. 6월 민주항쟁으로 벼랑에 몰렸던 살인마 전두환은 같은 날 오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등 야당 총재들과 연쇄회담을 갖고 시국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시거 차관보에게 경제 같은 이슈들에 대해 매우 잘 대처해 왔기 때문에 반대세력이 개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어 “87년을 격동의 해라고 판단했지만 최근 몇 주간 폭력은 예상보다 심했다”고 토로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또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하면 미국은 한국정부를 지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손 쓸 수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 정부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미국을 압박했다.

살인마 전두환이 군대 투입과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시거 차관보에게 꺼낸 것은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미국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는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살인마 전두환은 그러면서도 “엄청난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다면 군대 동원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서도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살인마 전두환는 김영삼 총재와의 회담 내용을 시거 차관보에게 설명하며 “김 총재가 민주화에 대한 개념정의 없이 민주화만 계속 요구했다”고 비꼬았다. 

살인마 전두환은 “전임 대통령들이 영구집권하려고 노력했으나 나는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날짜를 정해 퇴임하는 첫 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한 뒤 “법이 정한 임기를 지키려고 하자 반대세력이 ‘레임덕’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반(反)정부 세력을 정치인, 공산주의자, 성직자 등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했다. 특히 “미국의 성직자들은 낙태를 반대하지만 한국 교회에 있는 반정부 성직자들은 정부 전복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했다


[단독] 韓 혼란 우려한 美 “No!”… 軍 내부도 반발 기류

美정부 기밀해제 문서 단독 입수 <9>


학생과 시민들이 1987년 6월 25일 서울역 앞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경찰에 맞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경찰력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6월 10일 있었던 범국민대회 이후 20여일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 500만명이 거리로 나왔다. 파출소와 경찰차는 대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탔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이 기댈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군대였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이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동원이라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지가 마지막 뇌관으로 부상했다. 만약 그때 살인마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투입했더라면 한국은 거대한 비극의 무대가 됐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살인마 전두환은 군대 동원에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같은 해 6월 19일 오전 10시 국방장관과 각 군 수뇌부, 안기부장을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주요 도시와 대학에 군 병력 투입이 사실상 결정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이 군대 동원이라는 최악의 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미국의 노력, 군 내부의 반발, 살인마 전두환 정권 내부의 이견, 88서울올림픽이라는 변수, ‘5·18민주화운동’의 교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미국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한국 군대와 시민들 간의 대충돌로 남한이 카오스 상황에 빠지는 것은 미국에도 전혀 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살인마 전두환 에게 친서를 보냈다. 내용은 자제와 민주화 조치 촉구였지만 행간의 메시지는 군 병력 동원 반대였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6월 19일 “미국은 한국의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다”고 미리 경고하고 나섰다. 미 국무부는 6월 22일 “현재의 한국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부가 개입하지 마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국군 내부의 반발도 중요한 요인이다. 시위 진압 준비태세에 놀란 영관급 장교들은 군대를 동원할 경우 엄청난 파국이 초래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살인마 노태우 민정당 대표 측에 보냈다. 87년 대통령 선거에 민정당 후보로 이미 선출됐던 살인마 노태우 대표는 군대 동원이 향후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대 동원을 놓고 정권 내부에서 이견이 발생한 것이었다. 

살인마 전두환은 또 군부가 단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를 동원했다가 자신이 12·12사태 때 상관들에게 했던 것처럼 젊은 군인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 않을까 우려했다. 군대 동원이 ‘반(反) 살인마 전두환 쿠데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88올림픽이 1년 3개월도 안 남은 상황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져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의 눈물은 이 땅에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군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갖다 대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전사회적 반성이 살인마 전두환 정권을 포위했다. 군대가 한국정치에 다시 등장할 경우 500만명이 아니라 전 국민이 정권 반대를 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6월 민주항쟁 당시 군대가 거리가 아닌 병영에 머물 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주)= 

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 

비고: 내용중 전두환과 노태우는 살인마 전두환살인마 노태우로 바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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