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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던 전 서울대 교수의 고백을 사석에서 들었다. 평준화 이전 경기고와 서울대를 수석 입학·졸업한 그는 의외로 자신이 느꼈던 열패감(劣敗感)을 말했다.
"나는 공부에선 한국의 대표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미국 학생들에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이 교수는 논문 자격시험에서도 역시 1등을 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발견해내는 과정인 논문 작성에 들어가자 길을 잃고 헤맸다고 한다. 정답만 찾는 한국판 교육 트랙에선 챔피언이었는데, 정해진 길이 없는 지식의 벌판에 던져지자 열등생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1% 엘리트들이 공부의 메이저리그에 가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유학 간 한국 학생이 영어는 떨어져도 수학을 잘한다는 소리를 흔히 듣지만, 최상 단계에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울대를 나와서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딴 A 대학교수는 "대학원 초기에 미국 학생들의 수학을 보면 이런 것도 모르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개념을 잡고 들어오니까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국내에서 '수학 천재'라는 칭찬을 들으며 프랑스에서 유학한 또 다른 교수는 "어디에 쓰는지, 왜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미적분을 풀었던 나와, 개념을 터득한 뒤 접근한 외국 학생은 고등 수학에서 차이가 났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DB
기계처럼 정답을 찾고, 무조건 외우는 한국 교육은 매우 비효율적이지만, 그럭저럭 중간 단계 인재는 배출해왔다. 중 3~고 1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PISA(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우리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PISA 2000년 읽기 영역 성적을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6위지만, 이는 중간 등급인 3등급 이상 학생 비율이 76%로 높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이 세계 2위다. 하지만 읽기 능력의 최상위 단계인 5등급 비율은 6%에 불과하다. 세계 20위로 떨어진다. 엄청난 사교육비와 교육열로 모든 학생을 '압력밥솥' 같은 교육 시스템에 넣어 평균은 올리지만, 창의적 사고로 새로운 길을 여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는 결함이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 시스템을 극찬할 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학교에서 낙오하는 학생이 많은 미국 교육 관점에서 보면, 졸업 다 하고 평균 성적도 높은 한국 교육의 장점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 사교육에 없는 돈을 쏟아붓고, 학생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만 해서 얻은 결과가 이 정도라는 걸 알까. 질문을 하지 않는 교실에서, 시험 기계처럼 하나도 안 틀리는 반복 훈련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A 학점을 받으려고 교수의 토씨까지 베끼는 현실도 알까. 16년간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한국 졸업생들이 다국적기업 인사 담당자들에게 "토익 점수는 높은데 회사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공지능이 일자리 절반을 없앨 수 있는 대변혁 시대에 이런 교육을 받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알파고를 만드는 허사비스 대신 기계에 대체될 싸구려 인력만 양산하는 시대착오적 교육을 해놓고, 우리의 미래를 기댈 수 있을까.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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