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호주판 러시아 스파이 사건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8. 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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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기자협회보인 아시아엔에도 컬럼이 있는 호주에 살고있는 장영필(YoungPhil Jang)후배의 글입니다. 한국에 있을때는 잡지기자활동도 했던 숨은 필력의 소유자 입니다. 본인의 페친들만 읽을수 있는게 아쉬워 제가 다시 갈무리해왔습니다. ......


"지금부터 “사랑” 앞에서는 볼세비키도 다 필요없고, 철저한 사상 무장으로 훈련된 간첩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증거를 보여드리갔습네다. 반대로 “미인계”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남성이라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호주 역사책에도 나오는 호주판 “거 뉘기야, 6.25전에 미군 장교와 동거하면서, 북한 스파이 노릇한 남로당 간부 이강국의 애인 이대 나온 여자, 내레 여성 동무들 이름 외우는데에 익숙치 않아서리… ㅎ” 우좌지간, 기거와 거의 같은 신파조 사랑 타령입네다.


전쟁이 끝났다. “페트로브(Petrov)”는 2차 대전 종전 직후 연합군의 입장에 섰던 조국 소련(Soviet Union)의 정치상황에 더욱 민감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종전후 벌어진 조국의 내부적 정치 갈등은 새로운 전쟁이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였다. 호주 켄베라 주재 소련 외교관 신분인 페트로브의 속내는 더욱 더 복잡해졌다. 얼마후, 페트로브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베리아(Lavrentiy Beria)”또한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사태는 페트로브에게 더욱 더 심각하게 돌아갔다.


“Beria가 실각하다니…..”
페트로브(Petrov)는 망연자실했다. 어쩌면, 스탈린에 이어, 흐루시초프가 동독에서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무력진압한 이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이 낌새를 눈치챈 Petrov의 폴란드 친구, Bialoguski가 페트로브를 찾아온다. 그러자 페트로브는 고민에 빠진다. Beria가 실각한 이상, 소련으로 돌아가 보았자, 자신이 Beria 라인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결국 Petrov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


“망명한다. ASIO(호주 안기부)에 선을 대 다오. 내게는 전 호주 소련간첩망 자료가 있다. 오픈하겠다. “
“와이프는 ? “
“ 혼자 간다 “
이미 “페트로브”는 당의 명령에 따라 살게된, 아내 Evdokia가,자신을 감시해 온 MVD(소련 기무사)의 연락책이었음을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54년 4월 3일, 1951년 부터 호주 캔베라 주재 소련 영사관이었던 페트로브는, 제 세계 2차 대전 이후 호주에서의 첫 소련 망명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호주의 멘지 수상은 의회에서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1920년 소련 볼세비키 혁명의 불길을 타고 창설된 호주 공산당(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의 정치적 약화를 가만히 볼 소련이 아니었다. 멘지 수상의 발표 즉시, 소련 KGB 는 예상한 대로, 2대의 비행기를 시드니 공항에 착륙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호주 ASIO보다 한발 더 빠르게 움직여, Petrov의 아내 Evdokia를 강제로 소련행 비행기에 태운다.


드디어, 2차대전 종전후 호주는 물론 전 서방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트로브 사건(Petrov Affairs)”이 터진 것이었다. 당시, 연방선거를 앞두고 있던, 호주 여당 측 수뇌부에서는, 페트로브의 망명신청을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호주가 미국과 군사적 동맹관계이기는 하나,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소련의 정치적 압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 높아진 실업율과 사회 불안은 곧 있을 총선에서 노동당(The Labour Party)의 압승을 충분히 예상케 하였다. 소련과의 어떤 협의도 없이 호주 의회에서 페트로브의 정치적 망명을 선제적으로 발표한 것은 자유당(Liberal party)의 정치적 약세를 우려한 멘지 수상이 발휘한 신의 한 수였다.


1950년까지 호주 공산당은 1920년 창설된 이후 그다지 민심을 크게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Evdokia가 KGB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맨발로 끌려가는 신문기자의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여론은 이미 강력한 반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이 흐름을 간파한 멘지(Menzies) 수상은 중간 급유를 위해 호주 북쪽 Darwin 비행장에 잠시 머물고 있는 소련 비행기의 이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페트로브의 아내 “이브도키아(Evdokia)”의 정치적 망명을 허락한다. 그리고 페트로브와의 전화 통화를 지시한다.


아내는 말한다.
“Petrov,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는 당신이 호주에 남기를 바랬어요. “
“아니 ? 그럼 ASIO에 내 정보를 먼저 흘린이가 당신이란 말인가 ? “
소련 비행기에 강제 억류되어있던, 아내 Evdokia는, Menzies 수상의 주선으로,극적으로 연결된 기내 전화통화에서, 당이 지정한 남편이자 감시자였던 페트로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비록 한때 서로가 감시자의 신분이었지만, 이들이 이념의 국경을 넘어 비행기에서 같이 내리던 순간, 다윈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이들은 Menzies 정부의 강력한 정치적 결정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호주에 정착하게 되고, Petrov는 1991년 아내 Evdokia는 2002년 호주 멜번에서 여생을 마친다. 
드라마틱하지요 ? 1954년, 호주에서 벌어진, 1950년대 호주 이념 전쟁의 상징적 사건이었던, 이른바, “페트로브 사건”의 전말입니다."


"
이들은 결국 호주 망명에 성공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크게 호주 사회를 뒤흔듭니다.


1920년 호주에서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의 정치적 후원 아래, 호주 공산당(The Australian Coomunist Party)이 결성됩니다. 그러나, 일찌기 산업 혁명을 겪은 영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프레임이 강했던 호주 사회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호주 공산당의 정치적 입지는 미약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력으로 산업 혁명을 성공시킨 후, 노동자 및 중산층의 사회적 근로 조건과 복지 조건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호주 사회 또한 외부적 정치이념의 수혈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The Intellectual Llife of the British Working Classes”, by Jonathan Rose, Yale University Press, 2001, p. 299 ~ 301, “why was there no Marxism in Great Britain ? “ 요약)


반면, 2차 대전 후 승전국의 자격이었던 구 소련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종전 후, 호주 내 소련의 비밀 노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간파한 멘지 수상은 호주의 공산당 운동을 폐지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합니다. 법안은 통과되었으나 호주 대법원 판사 7명중 6명이 비헌법적이라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멘지 수상은 “호주 공산당 폐지 결정”을 놓고, 국민 투표(Referendom)에 부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Dr. H.V.Evatt이 이끄는 노동당(Labour Party)은,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자유스런 사상의 제지”라고 주장하면서 반대의사를 밝힙니다. 결국, 멘지 수상의 주장대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멘지 수상을 비롯한 자유당 인사들의 예상과 달리, 사회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입김이 강했던 전후 호주 사회는 총 투표 유권자 중 2,317,927명이 찬성, 2,370,009이 입안 반대를 결정하였습니다.


멘지 수상을 비롯한 자유당 노선에서는 이런 결정을 두고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책략의 결과”라고 하면서, “Red Fear”라고 규정을 합니다. 이런 와중에 페트로브가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페트로브 사건(Petrov Affair)”는 멘지 수상과 자유당 노선에게 전세 역전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정치적 여파는 Dr. H.V.Evatt이 이끄는 노동당이 더 컸습니다. 1901년 호주 독립 당시, 온건파인 Irish Catholic과 계급 구조에 익숙한 로마 카톨릭(Roman Chatholic) 세력의 정치적 후원아래 탄생한 호주 노동당은, “페트로브 사건”의 정치적 영향 및 결과를 놓고 내부적인 조직 갈등에 빠졌습니다. 로마 카톨릭 세력이 중심이었던 강경파 호주 노동당 노선은 온건파였던 노동당 당수 Dr. H.V.Evatt의 미숙한 정치적 행보를 공격, 결국 Irish Catholic 이 중심이 된 온건파 노동당 세력은 분당하여, 1959년 “호주 민주 노동당(Democratic Labour Party)”을 결성합니다.


그러나, 호주 시민들에게 비친 “페트로브 사건”을 통한 공산주의 노선의 두려움은 점차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구) 동독 및 소련 체제의 동구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의 반 공산주의 흐름과 더해져, 1972년까지 치룬 총 6번의 호주 연방 선거에서 민주 노동당(DLP)은 연속으로 패배, 집권을 하지 못합니다.


결론: 난데없이 딴나라 이야기, 그것도 1950년대 벌어진 이야기를 왜 하는가 ? 예전 잡설에서 한번 다루었던 이야기인데, 예전 것들 다시 읽어 보면서 그간 제가 잘못 알고 있거나 부실하게 자료를 읽은 것들이 있어, 수정하는 차원에서 다시 씁니다. 외부에 원고도 쓰는 마당에 잘못 쓰면 이 나이에 뭔 망신을 당할 것 같아서리….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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