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대한민국을 망친 이승만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2. 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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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친이 경무대에 조경담당관으로 근무할 때, 이승만 박사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꽃 화분을 잘 배치한다고 따로 불러 꽃 화분 남는 건 내다 팔아 애들 분윳값에 보태라고 했단다. 꽃 화분 살만한 국민이 일천했던 시절, 나라 사정도 모르는 이런 영감이 대통령이란 게 참 걱정되더란다. 이런 독대가 있고 나면 특무대 김창룡이 부하들이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온종일 닦달을 하더란다. 결국, 나의 부친은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 경무대에서 도망 나오셨단다. 4.19가 일어나기 한참전에….

 

 

 

 

[[진실은 불편합니다. 불편해도 이만 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을 직면했을때 도망가고 싶고 외면해 버리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진실을 가리는 악마들에게 비굴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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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망친 이승만의 목숨을 구명하여준 지운 김철수 선생과 조소앙 선생이 원망스럽다 ㅠ] 아래 일제시대 이승만의 악행은 전체 악행의 1/100도 안된다. 관심있는 자들이여. 미국국립문서보관서에 rhee syngman의 자료를 요청해서들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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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의거에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으나 이승만은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할 만큼 기회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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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 여론의 악화만을 걱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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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대하여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았다면서 이승만은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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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의 한인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

"1918년 이대위 목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들의 영사업무를 보는것에 시셈을 한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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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박용만과 국민군단을 비난하며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들에겐 가혹했고 지지자들에게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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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목사가 국무부장관에게서 확보한 대한국민회의 영사업무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국무부에 서신을 보내 조선인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고 미 국무부에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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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미국에서 대통령 행세를 하던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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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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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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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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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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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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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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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자서전 내용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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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search.archives.gov/search?expression=Syngman+Rhee&pg_src=group&data-sourc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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