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이승만 정권의 필요에 따라 가려진 김종오 장군의 춘천대첩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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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친 방원 선생은 이 6사단에서 6.25를 치루시다 페를 관통하는 수류탄 부상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상의용사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탱크가 없어서 수세에 몰렸다는 걸 홍보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이 사라질때까지 춘천대첩을 은폐하고 숨기기에 혈안이었다. 마땅히 무공훈장을 받아야 할 나의 부친이 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가 이승만 정권의 후안무치에 있었다.]

2015.10.26

북한군 중동부전선 전력의 절반을 소멸시킨 춘천대첩

신화가 탄생한 춘천

개전 초기 인제 관대리 일대를 경계하던 1대대의 경우 6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으나 소양강 마노진 나루터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해 냈고, 현리를 방어하던 3대대도 30퍼센트 정도의 손실을 입었지만 진지 사수에 성공하였다. 특히 Su-76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주공이 신남으로 내려오자 20여명으로 구성된 특공조는 어론리 아랫다무리고개에서 적 자주포 2대를 파괴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아군 6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북한군 2군단은 당황하였다. 특히 북한군 2사단의 춘천공략 실패는 이후 북한의 남침 전략 전반을 흔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다급해진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인제를 거쳐 홍천방면으로 진격하던 12사단과 603모터찌크연대의 주력을 빼내 북한강 북쪽으로 회군시켜 춘천에 투입하였다. 이것은 북한군 2군단의 몰락을 가져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북한군 2사단이 춘천공략에 실패하자 홍천을 향해 남진하던 북한군 12사단 주력이 회군하여 춘천으로 향했다. 덕분에 위기에 빠진 국군 2연대에 대한 압박이 감소되었다. /남도현

인제 방면으로의 압박이 감소되자 2연대는 한숨을 돌렸고 마침 지원하러 원주에서 올라온 19연대와 김종오의 명령으로 춘천에서 긴급 전개한 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연대는 말고개에서 적 자주포 10대를 노획 및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고 동시에 후방에 방열하고 있던 16포병대대가 일제히 불을 뿜어 고립된 북한 12사단과 603모터찌크연대의 잔류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전선의 단절을 우려하여 6월 29일 충주로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였지만 6사단은 이처럼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와중에도 중동부전선 일대의 북한군 전력의 반을 일거에 소멸시켜 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6·25전쟁 초기 국군이 이룬 유일한 승리로 '춘천대첩'이라고 하는데, 국군 6사단이 중과부적 상태에서 이룬 대승이어서 그 찬란함이 더 하다.

낙동강 전투 당시에 격파된 북한군의 Su-76 자주포. 전차를 본 적이 없었던 국군 장병들은 종종 이를 전차로 오인하고는 했다. 6사단 19연대는 말고개 전투에서 10대의 자주포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춘천 전투의 대미를 멋있게 장식하였다. /남도현

그러나 춘천대첩의 의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북한의 전략을 완전히 틀어버린 것이었다. 원래 북한군 2군단은 서부전선의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공략할 동안 재빨리 남진하여 수원을 점령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만일 이 작전이 실현되었다면 서부전선 일대 아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일거에 섬멸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 같은 의미였다.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용납하지 않은 6사단

국군의 자부심

그렇게 침략자는 춘천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다. 5대 1이상의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작전을 실패한 치욕적인 결과에 대하여 김일성이 2군단장 김광협을 비롯한 예하 사단장들을 개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질하여 버리는 초강경 문책 인사를 단행하였을 만큼 분노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개전 초기에 2군단의 역할에 대해서 기대했던 것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였을 때 편제를 유지한 부대가 제1, 6, 8사단과 (급편)수도사단이었는데, 춘천대첩으로 인하여 1, 수도사단이 포위당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고, 퇴로가 차단되었던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와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결국 6사단의 분전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후 충주축선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후퇴를 한 6사단은 충주, 수안보, 음성 등에서 수시로 반격을 가하여 북한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음성 전투 승전 기념 충혼탑. 대승을 거둔 6사단 예하 7연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

특히 음성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2,186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어 전선 중앙을 순식간에 공백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김종오의 6사단은 후퇴는 있어도 패배를 모르는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신임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金武亭)이 "6사단을 박살내어야 한다. 남조선 사단은 그것 하나다.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릴 수 있다. 밀어 족쳐서 6사단을 격멸하고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 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무렵 6사단은 신령을 중심으로 하는 돌출부를 담당하였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북한군은 청성부대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음성에서 굴욕을 겪으며 이를 갈던 북한군 15사단은 물론 함께 협공에 나섰던 북한군 8사단은 6사단의 강력한 방어망에 걸려 신령에서 하염없이 녹아내렸고 그렇게 1950년의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갔다.

준장으로 진급하여 낙동강 방어전을 이끌던 1950년 7월 당시의 김종오.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1950년 9월 15일, 6·25전쟁의 향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피로써 낙동강을 막아내던 위기의 순간에 적의 뒤통수를 강타하여 순식간 전세를 역전시켜 버린 거대한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이와 동시에 낙동강가에서 분전하던 방어부대도 진지를 박차고 나와 반격을 개시하였다. 김종오가 지휘하는 6사단도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남도현
DHT AGENCY 대표
E-mail : knclogix@yahoo.co.kr
젊은 시절부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사에 관한 공부를 하다가 온라인에 연재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 학술지인 계간『본질과 현상』, 시사지인 주간『시사저널』, 공군 발행 월간『공군』, 부정기 간행물『기상』, 대중지인 월간『Den』, 월간『MAXIM』등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현재 네이버캐스트, 국방부 정책블로그, 육군 발행 월간『육군』, 방위산업진흥회 발행 월간『국방과 기술』, 전쟁기념관 발행 월간『전쟁기념관』에 기고를 하고 있다.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책도 많이 썼다. 주요 저서로는 『잊혀진 전쟁』,『GUN』,『숫자로 풀어가는 세계 역사 이야기』,『전쟁, 그리고』,『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끝나지 않은 전쟁』,『히틀러의 장군들』,『히든 제너럴』,『발칙한 세계사』,(공저)『무기 바이블 2』,(공저)『BEMIL의 비밀스런 군사이야기』등.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등 근무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5/20151025007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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