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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2_한국역사

부천이야기 - 깊은구지(기픈구지) - 콩나물신문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8. 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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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구지엔 아이들 불장난에 타 죽고,
벼락에 맞아 죽은 할아버지 느티나무도 있어
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 2017.03.28

깊은구지엔 아이들 불장난에 타 죽고,
벼락에 맞아 죽은 할아버지 느티나무도 있어

▲ 1960년대 깊은구지 주변 지도(최영철 제공)

◆ ‘깊은구지, 기픈구지’로 부르면 좋겠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니 시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

용비어천가 제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종 대왕 당시에는 ‘깊은’에 대한 표기가 ‘기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깊은구지는 성주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심곡본동으로 불린다. 아마도 마을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기픈곶이’였을 것이다. 이게 표준어로 옮겨 쓰다 보니 기픈고지에서 깊은고지로 바뀌고, 이게 깊은구지’로 바뀐 것이다. 표준어로 자리잡기 전인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때에는 ‘기픈고지, 기픈구지’였을 것이다. 그 이후 60년대, 70년대 부터는 깊은구지로 표기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픈구지로 불렀지만 이를 표기하면서 깊은구지가 된 것이다. 그럼, 깊은구지로 쓸까? 아니면 기픈구지로 쓸까? 옛어원을 살린다면 기픈구지가 더 좋아 보인다.

한자로는 심곡(深谷)이라 한다. 이를 우리말로 표기하면 ‘깊은골, 깊은굴’이다. 그런데 골짜기는 ‘고지, 구지’로 부르지 않는다. ‘고지, 구지’는 곶(串)으로 산이나 바다나 강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을 가리킨다. 부천에선 송내역 근방에 있던 마을인 구지말, 약대의 꽂구지 등이 있다. 꽂을 가리킬 때도 곶으로 쓰였다. 위의 용비어천가에서도 꽂을 곶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한자로 옮기면서 ‘꽃 화(華)’로도 쓴 것이다. 깊은구지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우고개를 한자로 표현했는데 화오현(華梧峴)이다. 여기 ‘꽃 화(華)’도 곶(串)에서 기인했다.

이 구지는 ‘골 곡(谷)’하고는 반대 개념이다. 작은마니골 골짜기는 성주산 쪽으로 깊게 파 들어간 것이지만 깊은구지는 성주산이 툭 튀어나온 곳을 가리킨다.

1919년 지형도를 보면 깊은구지 마을의 위치가 성주산 자락이 길게 툭 튀어나온 곳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정명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곳까지 마을집들이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성주산 산자락 바로 아래에는 겨우 한 두채의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깊은구지는 깡시장이라고 불리는 곳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소사경찰서가 위치해 있는 산언덕이 마을 뒤로 위치해 있다. 지금도 소사경찰서가 있는 곳은 언덕빼기이다.

깊은구지 마을이 위치해 있는 곳의 골짜기 이름은 심곡(深谷)이 아니라 마니골이다. 인천 남동구에 있는 성주산의 마니골하고 그 이름이 같다. 인천의 마니골은 골짜기가 크다. 깊은구지 마니골은 작다. 그래서 작은마니골이다. 작은마리골로 표기하고 있다. 마니골이 마리골이니까...

만약에 깊은구지가 이 마니골에 위치해 있어서 생긴 마을이라면 마니골로 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구지가 마니골 끝 부분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주산 산자락이 길게 튀어나온 곳이 있어서 이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깊은구지처럼 구지를 ‘골 곡(谷)’으로 표기한 예를 부천하고 이웃인 시흥 관곡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곡지(官谷池)가 있는 마을을 ‘베실구지, 벼슬구지’라고 한다. 한자로는 직곶(織串)이다. 베실구지에서 구지가 곶(串)이었음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깊은구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심곡(深谷)이 아니라 ‘심곶(深串)’이라야 옳은 표기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심곡(深谷)으로 표기해 왜곡이 되었다.

여기서 ‘깊다’는 뜻은 골짜기가 깊은 것이 아니라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음 나타내준다. 아주 오래된 고목이 세 그루나 있고, 소나무들도 많아서 숲이 아주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도 지형도에도 깊은구지 마을 뒤쪽 산자락에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많았음을 표기해 놓고 있다. 이후 복숭아밭이 대단지로 조성이 되었다. 아주 무성한 숲을 파내서 과수원을 만든 것이다. 반면 전국에 있는 심곡(深谷)은 대부분 깊은골짜기를 가리킨다.

▲ 깊은구지 마을에 있던 1520년 경에 심어 495세 정도 된 손자 느티나무

◆ 깊은구지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 세 그루

깊은구지 정확한 위치는 정명고등학교 아래에 있는 심곡 604번지에서 624번지까지 그 일대이다. 경인로 194번길, 성주로 176번길에 해당한다. 이 길이 옛길이다. 그 위쪽에 큰 길은 심곡로(深谷路)이다. 사실 깊은구지 마을을 이어준 길은 성주로이다. 이 성주로에서 진말을 거쳐 겉저리로 갔다.

깊은구지 마을엔 해방후를 기준으로 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50여가구 였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지형도를 보면 경인선(京仁線)의 소사역이 있는 곳에 몇 채의 집이 있었다. 소사역이 생기면서 새롭게 들어선 집들임을 알 수 있다. 깊은구지 마을 하고는 별개의 집들이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 1905년에 설립된 소사우편취급소가 위치해 있었다. 소사우편취급소는 일제강점기 동안 그대로 유지되다가 1950년에 소사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77년 부천우체국로 개국되었다. 그리고 1996년 부천중동우체국으로 분리되어 개국되었다.

깊은 구지에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다. 이 중에서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살아남아 푸른 잎사귀를 자랑하고 있다.

보통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 손자나무라고 불렀다. 이중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는 고사했고 손자나무만 살아 있다.

할머니나무, 손자나무는 깊은구지 윗말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구지 마을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윗말로 불리는 곳이었다.

최영철씨가 그린 1960년대 깊은구지 지도를 보면 느티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작은마리골이 마니굴로 표기되어 있다. 마니골, 마니굴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마니골 골짜기 서쪽 언덕에는 봉숭아 과수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마리골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은 깊은구지 윗말 입구에 서 있던 두 그루 느티나무 사이로 관통했다. 손자나무 위쪽에는 원명기씨댁, 원응기씨 집이 있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사랑할머니댁이 있던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나무가 할머니나무였고, 동쪽에 위치한 나무가 손자나무이다.

당시에는 윗말느티나무로 불렀다. 할머니나무가 있던 곳은 심곡 623번지이다. 현재 심곡로 71, 부천시 심곡본1동 623번지이다. 이곳에 있는 또와치킨, 사랑방공인중개사무소 사이인 도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자나무에서 서쪽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였고, 정명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부천의 대부분의 오래된 나무들이 도로개설로 사라졌듯이 이곳 할머니나무도 그렇게 잘려서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곳에 할머니나무에 대한 안내 표지석이라도 세워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

개울 동쪽에 위치해 있던 손자나무는 심곡본1동 638-3번지에 있다. 부천시 성주로 176번길 28, 부천시 심곡본동 623-1번지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천시온장로교회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손자나무의 나이는 470(1991년) 살 정도이다. 나무의 높이는 23m(1991년) 정도이고, 둘레는 7.8m 정도이다. 아직은 싱싱한 잎을 매년 틔워내고 있다.

이 개울은 깊은구지 동쪽을 휘돌아 흘렀다. 깊은구지를 벗어나서 벌판을 흐른 뒤 든전물에서 흘러내려온 개울하고 합쳐져 자유시장으로 흘러들었다. 그 뒤 돌내로 합쳐졌다.

▲ 깊은구지 손자나무(겨울)

◆ 불에 타죽은 할아버지나무

할아버지나무는 동네 아래쪽인 심곡 604-1번지 앞 도로에 있다. 할아버지나무는 손자나무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랫말느티나무라고 했다.

1960년대 깊은구지 모습을 그린 최영철씨 지도에는 김연호씨댁이 느티나무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할아버지느티나무 서쪽 언덕에는 복숭아밭이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소사복숭아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멀쩡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나무의 우람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커다란 가지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가지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이 생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가지는 그네를 매기 딱 알맞은 높이로 뻗어 있었다. 이 가지에선 단오날을 맞아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맨 뒤 뛰었다. 여름날에는 잎이 무성해서 동네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와서 한참씩 쉬어가곤 했다. 할아버지나무 아래에서 웃통을 벗고 낮잠을 실컷 자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면 나무 아래를 시멘트로 둘러놓았고, 삼표 연탄하고 가스를 취급한 대리점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집들이 바로 곁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구지 마을에 많은 집들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나무는 당시 700살 정도 나이를 먹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워낙 나이를 많이 먹은 탓에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 텅빈 공간을 즐겨 찾았다. 당시 마을 아이들은 성냥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다.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잘못해서 느티나무에 불이 붙기를 세 번이나 했다. 한 번은 나무에 온통 불이 붙어서 부천소방차 9대의 물을 뿌렸다. 이렇게 했는데도 제대로 끄지 못했다. 소방대원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연신 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불에 탄 뒤에도 살아 있었다.

그 뒤 어느 날인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뒤 완전하게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나무는 죽었지만 그 고목이 된 몸은 현재도 도로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할아버지나무, 손자나무에선 깊은구지 도당제를 마을 축제로 승화시켜 치뤄낸다.


▲ 깊은구지 아래 마을에 있던 고목이 된 할아버지나무(700살)


▲ 깊은구지 손자나무 표지석


▲ 깊은구지 마을에 있던 1520년에 심어 495세 정도 된 손자 느티나무


▲ 깊은구지 고목이 된 할아버지나무


▲ 1960년대 깊은구지 주변 지도(최영철 제공)


▲ 1970년대 깊은구지 모습. 오른쪽이 거마산이고 왼쪽이 성주산이다.


▲ 1963년 지도(깊은구지)



고려 후기부터 격년제로 이어져 온 깊은구지 도당제 - 양기(陽氣)인 홀수 해에 열리는 깊은구지 도당제

깊은구지에선 격년제로 도당제가 열린다. 해년마다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한 해를 걸려서 홀수 해에 도당제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절기를 보면 홀수를 양기라고 하고 짝수를 음기라고 한다. 양기가 가장 왕성할 때 도당제를 연다. 홀수인 양기가 두 개가 겹치면 더욱 좋은 길수(吉數)이다. 한마디로 길한 날인 길일(吉日)이다. 우리 민족은 먼 곳으로 여행을 하면서도,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서도, 집을 이사하면서도 이런 길일을 택했다. 그러기에 길일은 우리네 일상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접목되었다.

설날인 1월 1일, 삼월 삼진날인 3월 3일, 단오인 5월 5일, 칠월 칠석인 7월 7일, 중굿날인 9월 9일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음력 5월5일이 단오(端午)라고 하고 수릿날이라고 하는 이유는 양기가 겹치는 일중에 가장 1년 중 중간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수리는 으뜸이라는 뜻이 갖고 있다. 일년 중 양기가 으뜸으로 많은 날이 바로 단오날이다.

우리 민족은 이처럼 홀수를 성스럽게 생각하고 길일(吉日)로 삼아 다양한 제사(祭祀)를 지내왔다. 깊은구지 도당제가 홀수 해에 열리는 것은 이같은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시작

깊은구지 도당제(深谷 都堂祭). 깊은구지에서 지내는 도당 제사이다. 이 깊은구지 도당제는 그 기원이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오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전기, 중기, 후기까지 불교국가였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는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주자학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주자학이 도입되기 전에는 유교적인 제사가 정착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고려 때는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절에서 화장을 한 다음 제사를 지냈다. 이때의 제사는 현재 우리가 지내는 제사하고는 그 형식, 내용이 다르다. 고려시대 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절에다 시주를 해야 했기에 서민들의 부담은 그만큼 컸다. 절에서는 장례를 치는 곳이 있었고, 화장을 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 뒤 안향에 의해 강화도 옆에 있는 교동 섬에 교동향교가 1127년(고려 인종 5년)에 최초로 세워졌다. 이 교동향교에서 진행된 주자학 강의로 인해 불교식 화장은 사라지고 매장문화가 일반화 되었다. 더불어 집에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도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깊은구지 역사를 정밀하게 탐색해보면 고려 후기부터 깊은구지 마을이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오랜 세월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뒤 깊은구지 주변이 급격하게 번창한 것은 경인철도가 놓여지고, 경인로가 개설되면서부터이다. 철도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경인로를 따라 집들이 들어서면서 번창 일로를 걸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소사역 주변에 우체국이 들어서고, 성주산 등성이엔 일제신사가 세워지는 등 도시화가 진행된 것이다.

해방 후에는 부천 깡시장, 부천 수영장, 소사극장 등이 들어서면서 명실공히 부천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천군청이 깊은구지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가 부천이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시청이 구원미구청 자리에 세워졌다가 현재의 시청 자리로 옮기면서 시청을 따라 도시의 변화가 따라갔다.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까지 깊은구지인 심곡으로 포장되었다. 깊은구지 마을이 아닌데도 그렇게 했다. 깊은구지 전통 마을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깊은구지 마을은 전통 마을로 남아 있었다.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깊은구지 전통마을은 사라지고, 도시 건축물들만 세워지게 되었다. 깊은구지에 있던 마을 집들은 모두 도시 건축물로 뒤덮인 것이다.

깊은구지 마을의 토양은 척박해

깊은구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성주산 산등성이가 길게 내려온 지역이었다. 든전물 골짜기가 길게 늘어서 있지만 물을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17년도에 측도(測度)를 한 지형도를 보면 현재의 부천역 근방에 논이 조금 있었다. 깊은구지 마을 아래에도 조금 논이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조, 콩, 메밀 등을 심는 밭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 밭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외에는 황무지로 방치되어 있었다.

성주산 산등성이 근방으로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때 과수원은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개간을 한 복숭아 농장이었다. 복숭아 농장은 깊은구지 마을 위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솔안말로 가는 능성이에도 얼마간의 복숭아 농장이 조성되었다.

이 복숭아 농장은 점점 커져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복숭아 농장을 확대했다. 1930년대에는 150정보(45만 평)에서 연간 30만 관(1,125통)을 생산하는 등 호황을 이루었다. 그 뒤 1970년대 도시화가 되기 전까지 부천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복숭아 생산지였다. 대구의 사과, 나주의 배와 함께 소사복숭아가 우리나라 3대 과일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깊은구지 복숭아 농장에서 생산된 복숭아를 소사복숭아라고 했다. 1960년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했다.

1980년대 초부터 부천의 도시화 과정에서 복숭아밭에다 소사공단·송내공단을 만들기 위해 복숭아나무를 모두 뽑아 버렸기 때문에 복숭아 농장은 사라졌다.

이처럼 깊은구지 주변의 환경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아 주민들은 오래도록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만 했다. 조선시대 때는 논에서 생산되는 쌀이 제일 소중했기에 밭에서 나는 조나 콩 같은 것으로는 먹고 살기가 아주 힘들었다. 메밀은 구황작물로나 심었다.

깊은구지 역사성을 증명해주는 깊은구지 도당제

역사적으로 보면 소새의 역사가 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해 깊은구지 역사는 그 보다는 조금 늦다. 깊은구지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가 대략 700살 정도로 보면 고려 후기인 13세기부터 도당제가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도당제는 무엇인가? 도당신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도당신은 도당굿에서 모시는 신이다.

도당굿은 주로 한양인 서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중부 지역에서 주로 행해지던 굿이다. 일명 경기도 도당굿이라고 한다. 경기도 도당굿에서 가장 유명한 굿은 부천의 장말 도당굿이다.

장말은 깊은구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깊은구지에서 목적골을 지나면 바로 장말에 닿는다. 덕수 장씨의 집성촌이다. 현재 덕수장씨들에 의해 장말도당굿은 전수되고 있다. 그런데 장말도당굿은 격년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진행된다. 깊은구지 도당제하고는 이 같은 차이가 있다.

장말이 중동벌판에 우뚝 선 산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라면 깊은구지는 성주산 산등성이가 뻗어내린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장말은 중동 벌판에 조성된 논들이 제법 많아 깊은구지에 비해선 생활이 풍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일제강점기에는 계양산 남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계남면의 면소재지였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천군이 신설되었다. 부천군의 15개 면으로 현재 인천의 옹진군까지 포함했다.

이 가운데 부천군 계남면은 기존 부평군의 석천면·수탄면·옥산면을 통합였다. 계남면엔 17개의 리(里)가 있었다. 서울의 고척리·개봉리·오류리·궁리·온수리·천왕리가 포함되었다. 부천의 표절리·조종리·벌응절리·항리·괴안리·소사리·범박리·구지리·상리·중리·심곡리가 포함되었다. 아주 큰 면이 계남면이었다. 이 계남면의 중심 역할을 장말이 했다.

이후 1930년 12월에 전국에 걸쳐 읍제(邑制)가 제정되었다. 이 읍제는 1931년 4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지방제도 전반에 걸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41개 읍이 신설되었다. 전국이 13도(道) 14부 218군 2도(島) 41읍 2,423면으로 구분되었다.

이때 부천군 계남면의 명칭이 부천군 소사면으로 개정되었다. 소사면이라는 땅이름은 소새의 한자어이다. 예부터 소새가 부천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남면의 형세가 대부분 소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소사역 근방에 면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사실은 소사면 보다는 심곡면이 더 적합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소사면이 탄생했다.

당연히 장말도당굿은 마을신인 도당(都堂)을 위로하고 달래는 의식이다. 장말도당굿이 마을굿을 통해 도당신을 달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했다면 깊은구지는 굿 대신 제사(祭祀)를 지내 마을민의 대동단결을 추구했다.

그러기에 깊은구지 도당제는 장말도당굿하고 아주 다르게 전개된다. 장말도당굿은 장말을 대표하는 덕수장씨 중에서 선택된 분이 도당할아버지로 신내림을 받아 굿을 주관한다. 이 장말도당굿에서 도당할아버지가 일종의 신격화가 되어 굿을 펼치는 화랭이, 무녀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이 도당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말도당굿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말도당굿은 이 도당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는 아주 독특한 굿이다. 도당할아버지는 윗대부터 세습되어 왔다.

반면에 깊은구지 도당제는 이 도당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없다. 형식도 유교식이 접목이 되어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주산 중턱에 있는 도당나무에서 산신제가 진행되고, 현재 깊은구지 마을에 살아남아 있는 손자느티나무에서 지내는 제사는 목신제이다. 이후 마을 주민들, 부천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한마당인 대동제가 진행된다.

▲ 1917년에 측도한 지도, 깊은구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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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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