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장인환·전명운 의거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10. 6.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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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전명운의거 107주년' (上)1908년 美신문 스티븐스저격 대서특필
기사등록 2015/03/23 13:21:34
최종수정 2016/12/28 14:44:52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사진은 1면기사.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샌프란시스코 콜' 1면부터 3면 도배 현장 그래픽까지 소개 눈길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정적을 깼다. 50대의 미국인 남성이 쓰러졌다. 그 앞에는 20대 동양인이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한 명의 동양인이 권총을 쥐고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 최초의 '의혈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쓰러진 미국인은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 부상당한 동양인은 전명운(田明雲) 의사(25), 총을 쏜 동양인은 장인환(張仁煥) 의사(33)였다. 긴급 후송된 스티븐스는 치료를 받다가 이틀 후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 숨졌다.

당시 대한제국 고문이었던 스티븐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모종의 밀명을 받고 미국에 들어온 지 사흘만에 저격당한 사건은 커다란 파장 속에 국권 회복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피를 끓게 했고 이듬해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으로 이어졌다.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 월요일자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저격 다음날인 3월24일자는 1면부터 3면까지 이 사건 기사로 도배할만큼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1856년 창간한 샌프란시스코 콜은 당시 16면 발행이었고 한 부 가격은 5센트였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해외 거주 한인 최초의 의거였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잔혹한 압정을 펼친 일본과 이를 방조 묵인한 미국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 그때까지 미국 국민들은 코리아를 은둔의 미개국으로, 일본의 보호가 불가피한 나라로 인식했다.

특히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거액의 봉급을 받으며 한반도를 병탄에 빠뜨린 일본의 앞잡이로 활동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사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그가 3월20일 미국에 돌아온 것도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정당화하고 이로 인해 조선 내 미국 기업가들의 손실이 발생한 것을 조율해 달라는 이토의 부탁 때문이었다.

스티븐스가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일본 선박 니혼마루(日本丸)에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코리아는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떠들었고 3월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후 기자회견을 열어 "코리아에서 새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본을 반대하지만 지방 농민 등 대부분 사람들은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아 모두 일본인을 환영한다"고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3월21일 토요일 신문이 나오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격분을 금치 못했다. 다음은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에 'Slurs on Korea End In Fight(코리아 비방 싸움으로 끝나다)'의 기사.

"코리아의 고문인 D. W. 스티븐스와 어젯밤(22일) 페어몬트 호텔로 온 다섯 명의 코리안 사이의 논쟁은 결국 난투극으로 끝났다. 페어몬트 호텔 로비에 놓여 있던 의자들은 공격하고 방어하는 무기로 돌변했다. 일본인들이 코리아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은 스티븐스의 친일본 정서에 반대했다…다섯 명 중 세 명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중년 남성이었다..영어가 유창한 청년이 스티븐스에게 다가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중 한 명이 토요일자 신문에 실린 스티븐스의 인터뷰 "일본은 지금 미국이 필리핀에서 필리핀인을 위해서 한 것과 같은 일을 코리아에서 코리안을 위해서 하고 있다. 주어진 상황이 다소 다르기에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방법을 수정할 뿐이다"라는 내용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일본인이 코리안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다고 묻자, 스티븐스는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중년의 코리안이 스티븐스를 쓰러뜨렸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스티븐스는 즉시 일어났지만 앞쪽에 있는 남자가 내리친 의자에 오른쪽 턱을 맞고 쓰러졌다..곧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티븐스는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다쳤다. 스티븐스가 코리안들이 호텔에서 물러나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체포된 사람은 없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이날 폭행사건의 배경은 23일 스티븐스가 저격당한 이튿날인 3월24일 신문에 상세히 소개됐다. 'Shooting of Stevens Caused by Conspiracy Which Holy War Manifesto Inspired(스티븐스 저격은 성전 선언에 따른 공모에 의해 유발)'이라는 제목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코리안의 공모는 "성스러운 전쟁에 신명을 바쳐 모든 일본인들을 근절하라"는 '의병(Righteous Army) 선언'에 따른 것이다. '의병 선언'을 미국에서 처음 받은 사람은 미국의 코리안연합회 회장이자 '유나이티드 코리안(the United Korean)'의 편집자인 정재관(C. K. Chung)으로 총회를 소집해 스티븐스의 인터뷰 내용을 알렸고 이 중 코리안 5명은 코리아의 친구로 와서 코리안을 잔인한 적의 마수에 넘긴 스티븐스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신성한 행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이 스티븐스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한 대목이다. "스티븐스가 목숨을 건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스티븐스에게 인터뷰 내용을 철회하거나, 그런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할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콜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호텔로 찾아갔을 때 스티븐스는 우리를 우롱하고, 돼지 취급했다. 우리는 모두 애국자들이다. 호텔로 찾아갔을 때 스티븐스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단단한 무기를 갖고 갔을 것이다. 의자는 너무 가벼웠다. 우리는 스티븐스를 공격한 뒤 체포당하기를 원했다"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저격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콜은 1면부터 3면까지 10개가 넘는 심층 취재기사들을 게재했다. 특히 1면엔 '코리안 공모자들의 저격으로 스티븐스 중태(Shot Down by Korean Conspirators Diplomat Stevens is at point of Death)'라는 톱기사와 함께 사건이 발생한 페리호 선착장에서 저격 과정과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그림으로 소개했다. 상단엔 스티븐스의 사진이, 하단엔 전명운 의사의 정면 얼굴과 장인환 의사의 측면 얼굴을 겹친 독특한 편집으로 눈길을 끌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사진은 2면기사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2면엔 전날의 폭행 사건과 저격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사진을 싣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시종 '애국자들(Patriot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행위가 사적인 범행이 아니라 조국을 위한 애국적 응징이라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 명이 한꺼번에 나온 사진은 코리안연합회장 정재관을 비롯, 오창호(Au Chang Ho), 임춘기(Im Choon Ki), 송북천(Song Buk Chun), 이정래(Yi Chung Lai)이고 저격 자들을 체포한 J. M. 맥그래스와 에드워드 오웬스의 사진을 실었다. 이와 함께 장인환 의사이 것으로 보이는 한글 진술서도 게재했다.

"코리안들의 억눌린 일본의 지배에 대한 혁명의 불길은 어제 아침 페리 선착장에서 전명운(M. W. Chun)과 장인환(In Whan Chang), 두 코리안 애국자가 미국의 외교관이자 코리아 정부 고문인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를 암살하기 위해 저격하면서 활활 타올랐다. 코리안들은 스티븐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국권을 탈취한 조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일본의 잔학 행위와 폭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스티븐스는 페어몬트 호텔 버스에서 내렸다. 오클랜드에서 애틀랜틱시티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의 옆에는 배웅나온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 고이케 조조(Chozo Koike)가 있었다. 전날 밤 페어몬트 호텔에서 성난 코리안 다섯 명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스티븐스는 자신의 운명에 지나치게 무심해서 경호원도 없었고 총을 소지하지도 않은 채 나타났다. 스티븐스가 자신의 가방 위로 몸을 굽힐 때 장인환이 리볼버 권총을 손수건에 감싼 채 달려왔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손수건이 막혀 리볼버가 작동되지 않았다. 스티븐스가 놀라서 쳐다보자 장인환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리볼버로 얼굴을 세차게 후려치고 달아났다. 스티븐스 얼굴에서 피가 솟구쳤다. 스티븐스가 공격한 자를 추격하려 대여섯 걸음을 내디딜 때 두 번째 공범인 전명운(M. W. Chun)이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총알은 스티븐스의 등에 박히는 대신 달아나는 장인환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가 등을 돌리기 전에 전명운의 리볼버가 연속 두 번 스티븐스(Stevens)를 쏘았고, 땅에 쓰러졌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이날 기사에서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를 착각한 듯 두사람을 바꿔 묘사했다. 리볼버가 격발하지 않은 것은 전명운 의사였고 스티븐스를 명중시킨 것은 장인환 의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모의한 적도 없고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스티븐스의 터무니없는 인터뷰에 분노한 두 의사가 각기 수집한 정보로 스티븐스 암살을 노렸고 결국 그로 인해 첫 시도가 실패한 후에도 2차 시도로 저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robin@newsis.com

'장인환·전명운 의거 107주년' (下) 전명운 의사 스티븐스와 병원에서 대면
기사등록 2015/03/23 12:26:09
최종수정 2016/12/28 14:44:5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4일 샌프란시스 콜은 장인환 의사의 오발로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 의사와 스티븐스가 병원에서 맞닥뜨린 장면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스티븐스는 저격 이틀 후인 3월25일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사진은 저격 전날인 1908년 3월22일 페어몬트호텔에서 한국인 5명이 스티븐스와 논쟁을 벌이다 폭행한 사건을 1면에 실은 샌프란시스코 콜 기사. 2015.03.21. <사진=샌프란시스코 콜 DB> robin@newsis.com

'한민족의 공적 스티븐스, 한민족의 친구 헐버트'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4일 샌프란시스 콜은 '더 좋은 것을 모르는 꼬마 바보("Little Fool; Don't Know any Better)'라는 기사에서 "스티븐스는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저격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보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장인환 의사의 오발로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 의사와 스티븐스가 병원에서 맞닥뜨린 장면을 소개한 것이다.

"스티븐스 주위는 병원으로 몰려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섰다. 스티븐스 암살을 기도한 전명운(원문엔 장인환으로 오기)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스티븐스는 그 불행한 조선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전명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 암살하려고 했던 희생자가 짓는 경멸의 미소에 대응했다. 마침내 전명운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조선인들이 모두 학살되기를 원하고 있어. 당신은 더러운 일본의 앞잡이일뿐이야. 당신이 일본의 앞잡이라서 총을 맞은 거야…' 간호사들이 그를 수술대 위에 눕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막자 스티븐스는 느릿한 말투로 '불쌍한 꼬마야. 나는 지난 3년 간 네 조국을 위해서 일했어. 너는 어리석은 바보이고, 뭐가 더 좋은 건지 알지 못해. 너같은 바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깨닫게 될 날이 올거야.”

샌프란시스코 콜에 따르면 당초 전명운 의사는 사망할 가능성이 높지만 스티븐스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St. Francis Hospital)으로 이송된 다음날인 25일 총탄 제거 수술을 받던 중 급속히 상태가 악화돼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스티븐스의 사망 소식을 병상에서 접한 전명운 의사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4일 샌프란시스 콜은 장인환 의사의 오발로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 의사와 스티븐스가 병원에서 맞닥뜨린 장면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스티븐스는 저격 이틀 후인 3월25일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사진은 스티븐스의 죽음을 전한 1908년 3월27일 뉴욕 타임스 기사. 2015.03.21. <사진=뉴욕 타임스 DB> robin@newsis.com

한편 뉴욕 타임스는 1908년 3월27일 3면에 '스티븐스 사망 일본 애도'라는 제목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4월2일 도쿄에서 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토 백작이 토마스 오브라이언 일본주재 미국 대사와 장시간 대화 후 "스티븐스의 죽음은 국가적 재앙이다. 충성스런 친구이자 일본과 미국의 공복인 그의 죽음을 양국 국민들이 애통해 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을 착취와 부패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위해 한국에 갈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븐스 암살은 결과적으로 이토의 적극적인 개입과 이듬해 10월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결행한 '세기의 저격'으로 이어진 셈이다.

또한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민들로 하여금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압정을 본격 조명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짜 샌프란시스코 콜의 '일본의 서울 침략(Aggression of Japan in Korea)' 기사가 좋은 예이다.

"지난 3년 간 일본은 한국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일본의 은행가는 재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한국에 파견되었다. 또한 판사 14명을 재판을 관리하고 집행하게 하도록 파견했다. 과거 국민들이 싸우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던 한국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전보, 전화, 편지를 소유한 일본은 엄격한 검열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폭동과 전투, 대규모의 학살 등이 매일같이 발생하였지만, 바깥세상에서는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침략군들이 농민들을 착취하고 강탈자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토지의 정당한 소유자들을 내몰았다. 한국 국민의 이권은 모든 방식으로 박탈당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의사의 저격으로 치료를 받다가 이틀 후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사진은 1908년 5월16일 한국의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한 호머 헐버트의 기고문. 헐버트는 스티븐스의 대척점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한국인의 친구로 깊은 신뢰를 받았다. 2015.03.21. <사진=뉴욕 타임스 DB> robin@newsis.com

스티븐스의 대척점에 섰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rlburt 1863∼1959)의 존재도 부각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스티븐스가 일본인 독재자 가운데 하나가 된 이래로 미국 선교사이자 교육가 호머 헐버트는 줄곧 스티븐스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용감하게 대항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헐버트를 몹시 싫어 했다. 하지만 헐버트는 조선인의 신뢰를 받고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다"라고 소개했다.

헐버트는 논평인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와 '코리아 견문록(The passing of Korea)'의 편집자였다. 서울에서 출판된 그의 매체는 사실상 유일한 한국의 옹호자였다.

1908년 5월16일 뉴욕 타임스는 헐버트가 기고한 장문의 글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한반도 상황을 곡해한 조지 래드(George Trumbull Ladd)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고문이었다. 헐버트는 "최근 비극적 죽음을 당한 스티븐스씨가 미국에 온 것에 대한 얘기는 잘못됐다. 그 누구도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르는 방법을 연구할 기회가 없다. 일본은 소수의 무역업자들을 중국 광동에 보내 전쟁의 이유로 삼고 마찬가지 방법을 한국에서도 실행했다.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삼았다. 이토가 한국을 병합할 의향이 없다고 말한 게 사실일까. 일본은 최소한 4번의 약속을 번번히 위반했다…스티븐스의 죽음은 무척 유감이지만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방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해 11월 한 달 서부 해안에서 보냈는데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물리력에 의존하지 말 것을 충고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귀국해 일본과 싸우는 게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그들에게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난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온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잔혹한 일들을 알고 있다. 스티븐스에게 이토 백작이 이러한 일들에 귀를 기울이면 일본 정부에 반하는 언론 활동을 중단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거부됐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의 악행과 잔혹함을 조금이라도 얘기한다면 미국인들은 피가 끓어 분노할 것이다. 일본은 자신을 위해 일해줄 힘센 사람들을 갖고 있지만 사실들을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Japan has come powerful men working for her but the facts cannot permanently be concealed.)..난 내가 말한 증거들을 누구 앞에서도 공개할 준비가 돼 있다."

일본이 한반도 합병의 걸림돌로 간주한 또 다른 세력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용기를 보이라고 자극하며 여러 차례 일본의 계획을 방해했다. 그들은 헐버트의 한국 캠페인을 도와주었고, 일본은 줄기차게 그것을 억압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게 일제는 법정최고형이 내려지도록 로비했지만 전명운 의사는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이 선고됐다. 장인환 의사는 1875년 3월30일 평양 출신으로 1905년 2월에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이듬해 8월 미 본토로 이주했고 전명운 의사는 1880년 5월 서울 태생으로 역시 1905년 하와이로 이민와 1906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장인환 의사. 2015.03.21. <사진=ko.wikipedia.org> robin@newsis.com

샌프란시스코 콜은 헐버트와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탄원할 목적으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들을 파견하는데 기여한 사실도 언급했다.

"밀사들은 탄원서를 가지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도착했고 전 세계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후원을 받는 조심성 많은 스티븐스가 눈치 못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인 밀사들이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계획은 성공하였다. 스티븐스는 방심했고 헐버트는 세계가 한국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계는 한국의 문제들을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스티븐스를 겨눈 총성이 다시 전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두 의사의 재판이 시작된 것은 3월28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4월11일 "한국인 장인환이 3월23일 페리 선착장에서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한 혐의로 보석금 없이 콘랜(Conlan) 판사 주재로 재판을 받았다. 장인환의 동료이자 총상을 입은 전명운은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교도소로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두 사람이 법정 최고형을 받도록 안간힘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장인환 의사의 변호사 존 바레트(John J. Barrett)가 예심 진행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고 사무엘 나이트(Samuel Knight) 변호사는 기소 과정에서 일본을 지원하도록 고용되었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게 일제는 법정최고형이 내려지도록 로비했지만 전명운 의사는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이 선고됐다. 장인환 의사는 1875년 3월30일 평양 출신으로 1905년 2월에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이듬해 8월 미 본토로 이주했고 전명운 의사는 1880년 5월 서울 태생으로 역시 1905년 하와이로 이민와 1906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전명운 의사. 2015.03.21. <사진=ko.wikipedia.org> robin@newsis.com

스티븐스 암살이 알려진 후 미주는 물론 멕시코,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에서 재판을 위한 한인들의 성금이 답지했고 통역을 돕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도 주요한 통역으로 추천됐으나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이승만의 이 같은 행동은 많은 한인들을 실망시켰고 그가 벌이는 독립운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장인환 의사의 첫 재판엔 한국인과 일본인들로 가득 찼다. 이날 출석한 증인은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 윌리엄 반 보스(William Van Voss)를 비롯, 린든 크레인(Lyndon D. Crane) 헨리 섹스톤(Henry A. Sexton), 루돌프 스프레클스(Rudolph Spreckels)와 경찰관인 번스(Burns), 맥그래스(McGrath), 오웬스(Owens) 등이 나왔다.

장인환 의사의 변호사 네이단 코글랜(Nathan Coughlan)은 피고가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애국적인 광기에 의한 것이라고 관대한 처분을 호소했다. 판결은 그해 12월이었는데, 두 의사는 애국심을 토로해 법관들까지도 감탄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게 일제는 법정최고형이 내려지도록 로비했지만 전명운 의사는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이 선고됐다. 장인환 의사는 1875년 3월30일 평양 출신으로 1905년 2월에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이듬해 8월 미 본토로 이주했고 전명운 의사는 1880년 5월 서울 태생으로 역시 1905년 하와이로 이민와 1906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출소 후 뜻깊은 만남을 가진 장인환 의사(오른쪽)와 전명운 의사. 2015.03.21.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robin@newsis.com

결국 전명운 의사는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이 선고됐다. 장인환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케 하려던 일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장인 환의사는 미주 한인들의 지원과 모범적인 수형 생활로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는 1903년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노동자 18명을 모아 설립한 공립협회에 각각 가입해 어려운 생계 속에서도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애국애족 활동에 힘썼다.

장인환 의사는 1875년 3월30일 평양 출신으로 1905년 2월에 하와이로 이민왔다가 이듬해 8월 미 본토로 이주해 철도공사장, 알라스카 어장 등에서 노동을 했다. 전명운 의사는 1880년 5월 서울 태생으로 역시 1905년 하와이로 이민와 1906년 5월에 본토로 이주해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1년의 복역을 마친 장인환 의사는 1927년에는 귀국해 고향에서 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고 평북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일제의 학정 밑에서는 살 수 없다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 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전명운 의사는 훗날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하고 1920년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1929년에 부인을 여읜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자녀들을 양육하며 살다가 1947년 11월18일에 타계했다.

해방을 맞고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전명운 의사는 평생 일본 음식은 먹지 않았고 일본인을 증오하며 살았다. 한인사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삼일절이 되면 강연을 하기도 한 전 의사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의 캘버리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1994년 4월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robin@newsis.com

[장인환 선생]


친일 외교관 듀함 스티븐스는 1908년 3월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국민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 가입한 한인 노동자 4명은 페어몬트 호텔로 찾아가 정정을 요구하며 구타했습니다. 이승만이 살인자라며 통역을 거부한 재판에서 장인환 의사가 사형을 면하고 25년형을 받은 이유는 탁월한 미국 변호사를 선임했고 변호비가 충분히 모금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형법에는 불완전한 정신상태 (Insane) 에서 저지른 행위는 형을 면제받거나 적게받을 수 있다는 진보적이 조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7천여 미주의 초기이민자와 멕시코 농장의 1천여 한인 이민자가 장인환 의사의 애국재판 변호비용을 자진해서 냈는데 8,390 달러의 변호비가 일시에 모아진 것은 처음있는 역사적인 일이였습니다.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교인들은 1919년 1월10일을 가장 자랑스런 날로 기억합니다. 바로 장인환 의사가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이대위 목사와 교인들이 축하잔치를 베푼 날이기 때문입니다. 장인환 의사는 “대한인국민회의 주선과 황사선 목사의 보증으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합심해서 나라를 찾는 일에 나서주기를 바랍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석방된 1924년 4월13일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모두는 장인환 의사 해방 축하회를 공식으로 개최했습니다. 1927년에 귀국하여 51세의 윤치복과 혼인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세탁소를 운영하다 병을 얻어 고생하다 1930년 5월22일 투신하여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장인환 의사의 장례식은 한인사회장으로 치루어졌고 장례식후 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후 1975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천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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