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5. 9. 00:20
반응형



. 

이 사진도 페이스북에서 7월 5일 올렸다고 뛰어나오는 군요. 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 원예농장에서 음력 1961년 6월 11일 태어났습니다. 사진의 모습이 농장에서 한강 쪽으로 기찻길과 한강을 배경으로 제 어머니 품에서 인형을 가지고 재롱을 떠는 제 모습입니다.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3번지이고 조상의 세 거지는 경기도 동탄면 석우리이고 서울서 여러 대가 살았으니 서울 토박이가 분명합니다. 

어느 날 족보와 조상님들 공부를 하다 보니 구한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며 일본에 저항했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농업을 천시하듯 저 역시 농업을 천시했습니다. 특히 꽃 농사꾼인 아버지 뒤를 이어 농대를 갔다가 재수 없게 농대 입학 1달 반만에 못 볼 꼴 보며 잡혀가 죽다 살아났습니다. 그 이후로 더욱 원예업을 하는 제 부친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창경궁 식물원장을 했고 청량리 원예연구소 서울분원장을 했고 경무대 조경담당자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 제 눈에는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의 증손자 윤준선(JoonSun Yoon)씨 말마따나 윤유경과는 일면식도 없을 창경궁 식물원 일꾼에 청량리 온실과 경무대 조경 일하는 흙만 지고 거름 지는 일꾼이라는 아주 자존감 없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러다 황해도 연안 군수에 내장원경에 궁내부특진관을 지내다 일제에 암살당한 고조부 이명직 대감과 일제 초기 1919년까지 금광국 기수를 지내다 일본 헌병에 참살당한 증조부 이철규 기수를 알고 난 후, 난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고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청파동에서 쌀장사와 복덕방을 하다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는 고아로 만주국 농림국 미곡 검사관의 삶을 살며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을 도왔고 내 아버지는 창경궁 초대식물원장에 6.25 참전 부상 상이용사에 청량리 원예연구소 서울분원장에 경무대 조경담당관을 지내고 부천에서 근교농업을 확산시킨 선구자로 살다 가셨다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해서 같은 모습도 부정적으로 보느냐 긍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쌀장수에 복덕방에 온실일꾼에 다친 졸병에 정원일꾼에 꽃 농사짓는 농사꾼에서 독립운동가에 식물원장에 분원장에 참전 상이용사에 조경담당관에 도시 근교원예농업의 선구자로 보인다는 걸 알았습니다. 

더 일찍 젊은 시절에 족보공부를 하고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처절한 삶을 알았다면 가난하게 살며 나에게 원하는 과외며 학비를 대주지 않는다고 내 할아버지 아버지를 원망하고 무시하며 살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눈물 어린 참회가 없었을 터인데 정말로 아쉽습니다.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