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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십여 년 전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곽재구 시인의 '화진포'라는 시를 접한 제 각시는 숨이 먹는 듯멋는듯 하였답니다.
"……. 만세교 지나 함흥 여관집 큰아들 기선이 아재……. "
정확하게 장인어른 함자와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곳의 식구들에게 이골이 나도록 들려준 함흥시 만세리에 있는 함흥여관이 시인의 시에 있었습니다.
제 각시 6살 때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함자가 '기'자 '선' 자를 쓰셨습니다. 함흥 만세교지나 함흥여관집 외동아들이셨고 함흥고보를 나온 수재셨답니다.
난리만 피하고 오라는 어른들의 성화에 혈혈단신 바람 찬 흥남부두를 뒤로하고 피난선 '메리디스 빅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답니다.
거제도를 거쳐 속초에 자리를 잡은 어른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술과 눈물로 뻥 뚫린 가슴을 달래다 한 많은 생을 마치셨지요.
이 시는 장인어른의 삶을 그대로 녹여놓은 한편의 인간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제 각시는 시인이 근무하는 순천대학교로 전화를 걸어 안식년으로 인도여행을 하고 있던 시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곤 몇 년 뒤 한국 여행에서 곽재구 시인에게 순천의 별미라는 칼국수와 팥죽을 대접받고 안식년에 여행했다는 인도에 관한 수필집도 한 권 선물 받았답니다.
"
화진포
곽재구
대전차장애물 징검다리처럼 코스모스 꽃길 위에 놓였습니다
만세교 지나 함흥 여관집 큰아들 기선이 아재
이곳 바다에서 사십년 동안 소주병 붙들고 울며 살았습니다
돈은 벌어서 뭐해 고향에 다 있는데 밤이나 낮이나
지나는 사람 붙잡고 소주 한잔씩 권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헌 오징어처럼 파도에 떠밀려 죽었습니다
대전차장애물 구렁이처럼 코스모스 꽃길 휘감았습니다
너두 한잔 해라 이놈 얼룩무늬 콘크리트 장벽 향하여
고래고래 소주 한잔 따르던 기선이 아재 꽃길 속에 설핏 보았습니다.
"
바로 이 '화진포' 시가 장인어른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주었고 또 곽재구 시인과 인연을 맺어준 거지요.
살다 보니 미국에서도 함흥여관을 기억하는 나이 드신 함경도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어떤 분은 공산당의 검문을 피해 함흥여관 다락방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고요.
이시는 곽재구 시인이 세월이 한참 지나 1980년대 초반 포구에 관한 연작시를 구상할 때 속초지역을 취재 여행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날 저녁 여관방 온돌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쓴 시라고 합니다.
시를 통해 이산의 아픔을 간직하고 떠난 작품 속의 인물의 후손과 시인이 만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참고:
대전차장애물 - 얼룩무늬 콘크리트 장벽
함흥 여관집 외아들 기선이 아재 산소 가는길 - 통일전망대 가는길에
함흥 여관집 외아들 기선이 아재 산소 묘비
함흥 여관집 외아들 기선이 아재 산소 묘비 - 함흥시 만세리 155 번지
DMZ 박물관 입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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