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김창준 목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7. 30.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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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중 김창준 목사는 다들 북에서 남으로 피난오는판에 남에서 북으로 갔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의 정신을 따르던 호르스트 카스너 (Horst Kasner 1926~2011) 목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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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공산주의 동독을 피해 서독으로 피난하는 행렬의 반대 방향으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가는 수백 가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회퍼 목사의 정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고백교회 목사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강보에 싸인 딸을 안고 묵묵히 동독으로 향하는 호르스트 카스너 (Horst Kasner 1926~2011) 목사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탄압받는 공산주의 치하를 잘 알고 그 고난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동독에서 목회가 허락되면 허락되는 데로 허락되지 않으면 평범한 동독의 인민으로 성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카스너 목사의 품에 안겨 동독으로 갔던 그 아이가 바로 통일 독일의 수상,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1954~)입니다. 

동독과 서독이 비록 이념을 이유로 갈라져 있었지만 본회퍼 목사의 정신을 따르는 카스너 목사와 같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친 티 나지 않는 민족애가 있었기에 통일 독일의 기적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




정운현

번역(풀이)의 어려움
- ‘김창준 회고록’ 중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은 4명이다. 정춘수, 박희도, 최린 등 3인은 친일행적 때문이며, 김창준(목사)은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한 탓이다. 해방 전 이북에서 활동하던 33인 가운데 대다수는 월남하였으나 김창준은 반대로 이남에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올라갔다.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귀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9년 5월 7일 뇌일혈로 별세했다. 묘소는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정한 남한정권 하에서 그는 현재까지도 금기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계를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변변한 인물연구조차 없는 실정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및 포상에서 그는 응당 제외돼 왔다. 그의 모교인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는 1978년 3월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7인의 부조물을 건립하면서 김창준은 제외시켰다. 그가 월북해 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지난 2007년 10월 10일 개교 120주년을 맞아 '역사의 반성과 미래의 조망'이라는 취지로 민족대표 7인의 부조물을 새로 건립하면서 김창준도 포함시켰다.

김창준의 평양 숭실학교 후배이자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김양선 교수는 2011년 ‘김창준 회고록’과 그가 옥중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29통의 유고를 해제해 <기독교 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집>을 발간했다. ‘김창준 회고록’은 그가 해방 이듬해 ‘3·1운동 기념사’로 방송한 원고 내용으로 1946년 2월 25일 작성한 것이다. 회고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삶의 상당부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33인 일대기를 쓰면서 ‘김창준 회고록’을 살펴보았다. 그가 쓴 자필과 이를 번역(풀이)한 것을 비교하던 중 첫머리에서부터 오류를 접하였다. ‘죄인(罪人)’의 ‘죄(罪)’ 자를 ‘49’로 잘못 풀이한 것이다. 정자로 쓰지 않고 약자로 쓰다 보니 생겨난 실수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49인’은 문맥상으로도 말이 안 되는데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를 보면서 수년 전에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을 풀이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게 이런 실수를 한 것은 없는지 두렵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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