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월간조선 2013년 3월] 北畵 전문가 申東勳 내가 만난 북한 최고의 화가 鄭昶謨와 鮮于英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3. 1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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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韓中수교 전 중국에 北畵 전문 갤러리 오픈 후 20여 년 동안 100여 차례 북한 왕래

⊙ 북한 거장의 낙관이 찍힌 작품이 1만 달러 이하에 거래되면 僞作일 확률 99%

⊙ 전북 전주 출신 정창모 화백의 노래방 18번은 ‘꿈에 본 내 고향’, 남으로 난 창문 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기 즐겨

⊙ 한국, 중국, 미국에 보관 중인 수백 점의 그림은 좋은 주인 나타나면 기부할 터


申東勳

⊙ 65세. 1977년 도미(渡美) 후 워싱턴에서 사업.

⊙ 워싱턴에 북한미술 전문화랑 ‘새스코갤러리’ 개관(1988), 중국 베이징에 ‘사시고(思是高) 화랑’

    개관(1989), 서울 순화동에 ‘갤러리 北’ 설립(2006).

⊙ 현 조선미술협회 회장.


  지난 1월 중순 《月刊朝鮮》 사무실에 60대 중반의 한 신사가 찾아왔다.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신동훈(申東勳). 짐작대로 한국말 표현이 서툴렀다. 그는 자신을 “미국에 사는 북화(北畵) 전문가”라고 소개하며 봉투에 고이 접어 온 산수화 한 점을 펼쳐 보였다. 금강산의 봄을 화사하게 표현한 작품이었는데, 발색이 강하고 터치가 거칠지만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화면(畵面) 왼쪽 하단에 찍힌 효원(曉園) 정창모(鄭昶謨) 화백의 낙관이 보였다. 신씨는 “정 화백뿐 아니라 선우영(鮮于英) 화백의 작품 수백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北畵에 미친 남자

 

  정창모와 선우영 화백은 북한의 김상직·리석호(李碩鎬) 화백과 더불어 북한의 4대 조선화(朝鮮畵) 거장으로 불린다. 조선화는 조선시대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전통을 분단 이후 북한식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장르다. 미술평론가 윤범모(尹範模) 가천대 회화과 교수는 조선화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화라 함은 ‘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채색화이면서 사실적 묘사, 그러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기초로 한다.>(<風景南北 전> 해설 중에서)

 

  2011년 신동훈씨를 인터뷰한 《르몽드》지의 일본 특파원 필립 퐁스(Philippe Pons) 기자는 <북녘의 미술가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 미술가들이 선전용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그린 조선화는 암시장을 형성할 만큼 미술 애호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퐁스는 “조선화의 주제는 목가적 풍경이나 동물 등이다. 중국의 서화와 비슷하나 한민족 특유의 미감을 지니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 수묵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시킨 것이 바로 조선화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신씨는 “조선화의 거장인 정창모와 선우영 선생님은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운명과 싸우며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살랐던 인물들”이라며 “남한 화가로 치면 박수근(朴壽根)이나 이중섭(李仲燮) 정도 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두 작가는 북한 특유의 조선화로 2005년 제8회 베이징국제미술제에서 나란히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우리에게는 서울, 베이징, 워싱턴, 뉴욕 등지에서 가진 <북화 전(展)>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작년 여름에는 경기도 고양시가 <고양 600년 기념-풍경남북 전>을 기획해 이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현재 이들의 작품은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위작(僞作)이 돌아다닐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씨는 “지난 20년 동안 100여 차례 북한을 드나들며 작품을 모았다”며 《月刊朝鮮》에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북화는 남북분단 시대가 낳은 한반도의 그림입니다. 북화는 우리의 문화요, 역사요, 유산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우연한 계기로 북화에 눈을 뜬 후 제 인생과 재산을 북화에 올인했습니다. 그 덕에 북한에서 국보급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림을 수백 점 소장하고 있지요. 이 작품들을 평범한 제가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더군요. 국가나 혹은 기업이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소정의 보상만 받고 기증하고 싶습니다.”

 

  ‘소정의 보상’에 대해 그는 몹시 부끄럽고 겸연쩍은 듯 “그동안 작품을 찾아 멀리 오가느라 경비가 참 많이 들었지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쯤 되고 보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수업료만 50만 달러



평양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오른쪽부터 선우영, 정창모, 신동훈씨(사진=신동훈씨 제공).


  신동훈씨는 경기도 일산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군에 입대해 육군수송학교에서 정비 기술을 익혔다. 군복무 중에는 월남전에 참전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죽음의 그림자는 좀 더 잘살기 위해 선택한 미국 이민 후에도 그를 수시로 위협했다.

 

  “군에서 익힌 정비기술 덕에 1977년 미국 워싱턴으로 취업이민을 갔습니다. 그곳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델리숍을 운영했는데, 연거푸 세 번이나 무장 강도가 들어 저와 아내가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그 충격으로 첫아이를 임신 중이던 아내는 예정일보다 무려 한 달이나 늦게 출산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둘 다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무장 강도가 침입할 때마다 그는 ‘이러다 어느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식구들의 안위가 보장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일단 거주지를 치안이 좀 더 잘되는 곳으로 옮겼고, 이왕 새로 시작하는 일이라면 오래 전부터 꿈꾸던 사업을 하자는 생각으로 화랑을 오픈했다. 그게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그림을 좋아할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오픈 초기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국화 전문 갤러리라는, 나름의 차별성을 갖고 시작한 것이라 서울을 수차례 왕래하며 그림 보는 안목을 키워 나갔죠. 그러다 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북화야말로 남북을 하나로 이어 줄 소통 창구이자 매듭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잘 모르는 북화를 취급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듬해에 베이징에도 화랑을 하나 열었다. 그러곤 북화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정창모 화백과 선우영 화백의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옌지, 만주, 선양 등지를 누볐다. 당시 중국에서 거래되는 이들의 그림 값은 10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좀 있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이들 작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가짜였다. 그는 “북화 공부에 무려 50만 달러가 넘는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 작가의 작품이 지나치게 낮은 가격에 거래된다면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가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죠. 심지어 전후(戰後) 화가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정창모·선우영 선생님의 보통 크기 그림이 1만 달러 이하로 거래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급의 한국 작가 작품이 10만 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1년여 동안 다리품 팔아 수집한 작품이 전부 위작이라는 걸 알고 불살라 버렸다. 화상(畵商)이나 소장자들은 만수대창작사에서 공수한 것이라거나 조선미술박물관에서 떼어 온 작품이라는 말로 그를 속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판다면 투자금의 절반 정도는 건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태워 버렸다. 그것이 작가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창모 作 <분계선의 옛집터> 99×88cm, 2008년.

 

  화가 찾아 訪北

 

  이후 그는 작품 구매에 신중을 기하는 한편 북화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평양에 들어갔다. 북한미술의 산실인 만수대창작사에 들어가 정창모 화백과 선우영 화백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는 “북측이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아 1년여 동안 중국에서 쌓은 인맥을 총동원해 겨우 방북(訪北)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방북 때는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에 호텔 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이후 몇 차례 더 방북했지만 두 분 선생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북측이 두 화백을 보여줄 듯 말 듯 애만 태우는 바람에 방북 횟수만 늘었죠.”

 

  신씨가 두 화백을 만난 것은 이듬해인 1990년 봄 만수대창작사에서였다. 평양시 평천구역에 위치한 만수대창작사는 북한 내 최고 화가들을 모아 놓은 집단 창작기지다. 이곳에서는 1000명이 넘는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데, 이 중 개인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가 방문했을 때는 정 화백과 선우 화백 단 두 사람만이 개인 작업실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만수대창작사에는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화가가 100명에 이릅니다. 정창모 선생님과 선우영 선생님은 이 중에서도 초특급 대우를 받고 있는 조선화의 거장들이었죠. 다른 작가 여럿이 공동으로 작업실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 두 분은 개인 작업실이 따로 있었는데, 공간이 꽤 넓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165m²(50평)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방북 1년 만에 어렵게 대면한 자리였지만 제한시간이 5분으로 짧은 데다 안내원과 지도원이 지켜보고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신씨는 두 거장을 보는 감격에 겨워 큰절을 여러 번 올렸고, 두 화백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고 한다.

 

  “우리 미술의 우수성과 더불어 두 분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알려주고 싶었는데, 안내원과 지도원의 존재에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자칫 말실수를 했다가는 바로 추방당하거나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죠. 선생님들 역시 별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다 알고 있다는 듯 ‘우리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찾아온 것으로 안다’는 말씀만 하시더군요.”


정창모 作 <매화> 67×77cm, 2004년.

 

  가짜 北畵 출현 빈번

 

  두 화가 면회시간은 신씨의 방북 횟수가 쌓일수록 늘어 갔다. 그가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에 북한 미술을 소개한 것에 따른 보상이었다. 그는 “서울과 뉴욕에서 <북화 전>을 가진 후 그에 대한 각종 방송과 신문 보도 자료를 만수대창작사에 갖다 주었더니 민족애가 있는 동포라며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방북 3년 후부터 면회시간을 제법 길게 주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작업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음은 물론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지요. 덕분에 조선화의 흐름을 공부할 수 있었고, 진작(眞作) 여부를 감정할 만큼의 안목도 생겼습니다.”

 

  그 사이 조선화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한·중·일 중심의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조선화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가치가 올라간 만큼 위작 거래도 기승을 부렸다. 그 여파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2000년 ‘8·15 남북 이산가족상봉’ 북측 명단에 정창모 화백이 이름을 올렸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 화백이 문화예술인 중심으로 구성된 북측의 서울 방문단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정 화백의 서울 방문에 때를 맞춰 정창모 화백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개관 하루를 앞두고 전면 취소됐다. 준비된 작품의 절반 이상이 위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측이 전시회 오픈 하루를 앞두고 정창모 선생님께 전시회 도록을 보여주기 위해 이산가족상봉 현장에 온 것으로 압니다. 한겨레 측에서는 내심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정 선생님께서 도록을 펼쳐 드는 순간 큰 화제가 될 것으로 알았던 전시회는 취소되고, 주최 측은 망신만 샀지요. 정 선생님이 자신의 도록에서 절반도 넘는 작품을 골라 내며 ‘가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007년에는 한 미술품 경매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북화 중 대부분이 가짜인 것으로 추정돼 미술계가 시끄러웠다. 이미 300점씩 판매된 정창모·선우영 화백의 작품에 대해 당시 위작 의혹을 제기한 이가 바로 신동훈씨였다. 그는 이 경매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의심돼 두 화백에게 직접 진작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했다. 두 화백은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작품이 가짜”라고 감정했고, 그는 감정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 경매회사 측은 “우리는 국내 공신력 있는 감정사에게 감정을 받고 북한 화가가 직접 자신의 그림을 확인하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작품과 함께 공개해 왔다”며 “위작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해당 사이트에는 정창모·선우영 화백의 작업 과정이 담긴 사진들이 올라와 있는 데다 이 업체에 작품을 공급하는 곳이 민족경제협력연합회(북한의 대남 민간부문 경제협력 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공식 창구)라고 공개돼 있었다.

 

  국내 조선화 애호가들로서는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충분히 혼란스러워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신씨는 “두 선생님의 작품은 북한 내에서도 위작이 많이 돈다”며 “북화 전문 화상이라면 누구든 위작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건은 관계자들의 양심 문제였다”고 말했다.

 

 

  두 거장 연달아 작고

 

선우영 作 <칠보산 솔바위> 125×45cm, 2003년.


  정창모·선우영 화백은 이제 더 이상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생전에 친형제처럼 다정했던 두 거장은 2009년과 2010년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정 화백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선우 화백이 먼저 하늘로 갔다.

 

  “선우영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2009년 5월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불과 석 달 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믿기지 않아 정창모 선생님을 찾아뵈었지요. 선생님과 저는 만나자마자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내원과 지도원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곤 지도원에게 ‘선우 선생님 묘소가 애국열사릉이냐’고 물었더니 ‘잘 모셨으니 걱정 마라’고만 하더군요. 끝내 산소를 알려주지 않아 참배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신씨는 벗을 잃은 정창모 화백이 걱정돼 이듬해 봄 평양을 다시 찾았다. 무슨 일인지 정 화백의 작업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 화백은 최근작 5점에 낙관을 찍어 그에게 건네며 “힘내라, 우리 그림 널리 알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씨는 “그게 유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해 여름 사업차 인도에 머물던 정창모 선생님 외조카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며칠 전 《흑룡강신문》을 봤는데 외삼촌 함자 앞에 고(故)자가 붙어 있다’며 외삼촌의 안부를 챙기더군요. 기자가 뭔가 실수한 것일 거라 확신하면서도 걱정이 묻어 나는 어투였습니다. 저 역시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걱정이 돼서 곧바로 중국에 나와 있는 평양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인했죠.”

 

  그해 12월에는 김상직 화백마저 눈을 감았다. 조선화 4대 화가 4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는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 몰골화(沒骨畵)의 일인자인 정창모 화백은 전북 전주 출신으로 6·25 당시 인민의용군으로 월북했다. 1957년 26세의 만학도로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학부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모교 교수로 재직했고,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풍경화실 실장을 지냈다. 1977년 공훈예술가, 1989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2005년에는 ‘제8회 베이징국제미술제’에서 <남강의 겨울>로 금상을 수상해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 생전에 그는 2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중 100여 점이 북한의 국보급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진채세화(眞彩細畵)의 대가인 선우영 화백은 평양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수예가이자 공훈교원(功勳敎員) 칭호를 받은 노정희씨다. 그는 어머니 영향을 받아 경공업대학에서 공예를 공부하다 평양미술대학에 편입학한 후 산업미술을 전공했다. 졸업 후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 작업을 하다 1972년부터 청계(淸溪) 정종여(鄭鍾汝)로부터 몰골화를 사사했다. 1973년부터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에서 작업했고,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 역시 2005년에 열린 베이징국제예술박람회에서 <백두산 천지>로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으며 작품 100여 점이 국보급으로 지정돼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술은 못해도 歌舞 즐겨

 

  신씨는 조선화의 전설이 된 두 화백과 20년 동안 만났지만 북한의 특수 상황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두 화백에 대한 기억은 화선지 위의 낙관처럼 선명하다고 한다.

 

  “고향이 남한인 정창모 선생님은 남쪽으로 난 작업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길 즐겼어요. 분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선생님은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곤 했습니다. 그 애틋하고 절절한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셋은 종종 어울려 평양 시내에 있는 식당에 가곤 했다. 냉면이나 산적 같은 음식도 팔고 노래방 기기가 있어서 노래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두 화백은 공통적으로 술은 잘 못했지만 가무(歌舞)는 즐길 줄 알았다.

 

  “정창모 선생님은 ‘꿈에 본 내 고향’이나 ‘타향살이’를 즐겨 부르셨고, 선우영 선생님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낙화유수’가 18번이셨죠. 두 분 다 민족의 애환이 담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간혹 눈물을 보였고, 흥이 날 때는 서빙하는 아가씨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했어요.”

 

  어느 겨울에는 실컷 노래하고 귀가하던 중 정 화백이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신씨는 “다음 날 작업실로 달려온 사모님에게 엄청 혼이 났다”고 말했다.

 

  선우영 화백은 한국 가요인 ‘사랑의 미로’를 좋아했지만 잘 부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노래방에만 가면 신씨에게 그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신씨는 “선생님께 감동을 주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들려드리지 못했다”고 했다.

 

  “선우 선생님을 생각하면 산책 도중 관람한 <해금강의 아침>이라는 작품이 떠올라요. 어느 볕 좋은 봄날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나랑 산책이나 가지’라며 제 손을 잡고 일어나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작업실을 나와 산책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산책이라고 해 봐야 작업실에서 400m쯤 떨어진 미술전시관까지 걸어가는 것 정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평화로웠어요. 전시관에 도착한 선생님은 제 손을 잡고 건물 3층에 있는 VIP 전시실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 200호 크기의 <해금강의 아침>을 보고 어찌나 감동했던지 울 뻔했습니다.”

 

  해금강의 일출을 담은 대작 앞에서 그는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선우 화백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에게 영문으로 표기한 자신의 이름 ‘SUN WOO YOUNG’을 가리키며 “내 이름에는 태양과 젊음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선우 화백이 신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신씨는 선우 화백이 떠난 후 이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했고, ‘비록 육체는 떠나지만 작품에 담은 예술혼은 영원히 빛나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선우영 作 <백두산 천지> 100×169cm, 2008년.

 

  北畵 수백 점 기부처 물색

 

  신씨는 “두 선생님이 내게 엄청나게 버거운 숙제를 안겨 주고 가신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두 분의 작품을 모아 한곳에 잘 보존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북화에 미쳐 있는 동안 아내와 두 아들은 많이 힘들었다. 식구들은 지하실에 가득한 그림을 보며 남편을, 아버지를 원망했다. 변호사가 된 큰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사이 폭우가 쏟아지면 혹여 그림이 빗물에 젖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고교 교사가 된 작은아들은 남북 간의 긴장감이 전시(戰時) 상황처럼 고조될 때면 북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그가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신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수집한 북화는 수백 점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한국과 미국, 중국 등지에 보관 중이다. 그는 “자식들의 존경을 받아 기분은 좋지만 이 무거운 짐을 식구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보존하는 일이니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도 했다. 좋은 기부처를 찾고 있다는 말을 그는 그렇게 돌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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