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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2_한국역사

대국민 사기극 - IQ210 김웅용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1. 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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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지티비에서 아이큐 210으로 측정되었고 세계 기네스에 등제되었다고 하지만 기네스사에 문의하자 아예 김웅용이 등록되어있지 않다고 답변

 
 
[강인선 LIVE] 神童의 굴레 벗으려… 난, 50 평생을 싸웠다
어릴적 'IQ 210'으로 유명세… 51세에 교수의 꿈 이룬 김웅용
 
강인선 부국장 - 입력 2014.01.21 17:45 | 수정 2014.01.21 18:16
 
어린 시절 천재는 괴롭다. 김웅용 신한대 교수가 갖고 있는 ‘신동(神童)’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50대가 된 지금도 사람들은 그에게 “천재가 왜 그렇게밖에 못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김 교수는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냐”고 했다.
 
"저는 평생을 저에게 덧씌워진 '신동(神童)' 이미지와 싸웠어요. 사람들이 제가 실패한 천재래요. 하지만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하늘이 내려준 그런 재주가 제겐 없어요. 천재가 아닌데 어떻게 실패한 천재가 됩니까."
 
'IQ 210의 신동' 김웅용의 이름이 최근 언론에 다시 등장했다. 51세에 드디어 교수의 꿈을 이뤘다는 내용이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동이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지는 늘 궁금한 법. 가까스로 전화 연결이 됐을 때 그는 "온종일 전화기에 불이 났다.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 잊지 않는 것일까"라고 한탄했다.
 
김웅용은 1967년 일본 후지 TV의 '만국 깜짝쇼'에 출연했다. 후지 TV는 김웅용과 도쿄대생 2명을 무대에 등장시켜 칠판에 적분 문제를 내주고 풀게 했다. 생후 4년 8개월의 김웅용은 도쿄대생들보다 먼저 문제를 풀어 환호를 받았다.
 
김웅용의 신동 퍼레이드가 멈춘 건 1970년께였다. 그의 아버지 김수선 교수(건국대)는 그가 미국에 유학 갔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유학 간 지역이나 학교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웅용은 미스터리의 인물이 됐다. '집에 가둬 키운다더라', '바보가 됐다', '정신병원에 갔다더라' 등 온갖 소문이 돌았다.
 
김웅용이 거의 10년 만에 다시 등장한 건 1979년,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검사에서였다. 신동이 평범한 소년이 돼 대학 입시 준비한다는 게 또 화제였다. 이후 그는 충북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진학해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충북개발공사에서 근무했다. 시간강사도 하면서 교수 자리가 날 때마다 지원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가 지난해 의정부에 있는 신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이번 학기부터 공업수학을 강의한다.
 
"그동안 시간강사 하면서 논문을 100편도 더 썼어요. 하지만 외곽에서 돌아다닌 거니까요. 이젠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논문도 쓰고, 학생들도 잘 가르치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숨어 살 수는 없다"
 
한때 '김웅용'이란 이름은 '신동' 또는 '천재'와 동의어였다. 그에게 쏟아진 찬사는 너무나 많았다. '인류의 보물'이자 '살아 있는 피타고라스'라 불렸고, 그의 IQ 210은 괴테(190)와 아인슈타인(180)을 능가한다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 명단엔 요즘도 그의 이름이 오른다.
 
14일 오후 신한대를 찾아가 연구실에 들어서니 '왕년의 신동'이 구부정한 자세로 다가와 인사했다. 아쉽게도 사람을 압도하는 천재의 후광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본에선 "20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기적의 소년"이라고 했다던데, 이제 그는 거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50대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언론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최근엔 가끔 방송에 출연해 "나는 천재가 아니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나이 50줄에 들어서니 평생 이렇게 숨어서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신동으로 사는 일,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세상은 제게 '너 같은 사람은 노벨상을 타야 하는데 왜 허송세월하느냐'고 하지요. '왜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다 걷어차고 나와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반인도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냐'고도 합니다. 이게 영재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거다. 그러니까 당신은 '실패한 천재'다. 이렇게 말하죠."
 
―'실패한 천재'란 말이 굉장히 아팠나 봅니다.
 
"천재도 아닌데 왜 실패했다고 하느냐는 거죠. 왜 올려놨다가 내려놓느냐고요. 실패란 뭘 하려고 하다가 못한 거지만, 저는 지금 뭔가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심지어는 제가 교수가 됐다니까 '왜 서울대 교수가 안 되셨어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어릴 때 천재 소리 들으면 뭐든 잘해야 하나요. 김연아 선수는 스케이트만 잘 타면 돼요. 하지만 저는 뭘 해도 '천재가 왜 그거밖에 못하느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1966년 한양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천재소년 김웅용.
 
―이제 신동의 자질은 다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죠. 자라면서 사회생활을 잘 못해봤기 때문에 저는 뭐를 해도 어눌했어요."
 
―어릴 때 IQ 210이란 평가를 받은 이후 검사를 다시 해봤나요.
 
"아니요. 당시 일본에서 7시간 걸려 IQ검사를 받았어요. 일본어로 된 문제를 통역이 한국말로 알려주면 제가 답을 말했죠. 도형은 그냥 그림만 봐도 됐고요."
 
(※영재교육 전문가인 오영주 박사는 IQ는 논리적·전략적 사고와 기억력을 체크하는 검사로 여기서 측정한 잠재력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교육환경이 적절치 않거나 정서적·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을 수는 있다고 했다.)
 
―당시 4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고요.
 
"유창은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인데. 중요한 건 양보다 질이지요. 사실은 지금 영어도 그렇게 잘하지 못해요. 그냥 간신히 알아듣는 정도지요."
 
―어릴 땐 어떻게 자랐습니까.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밤에도 눈 뜨고 있어야 했어요. 낮엔 언론에 너무 시달려서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림 그리고 공부하는 걸 밤에 해야 했거든요. 지방 신문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면 저희 집에서 자고 갔어요. 외국 기자들은 한번 오면 몇날 며칠을 취재했어요. 저는 계산하고, 외우고, 똑같은 걸 수없이 반복해서 보여줘야 했어요."
 
―아버지에게서 미적분을 배웠습니까.
 
"아버지 전공이 물리학이니까요. 처음엔 덧셈 뺄셈 구구단 이런 걸 가르치다가 제가 곧잘 하니까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르치신 것 같아요. 장난감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런 걸 풀면서 놀았어요. 아버지가 갱지를 1000장씩 사다주시면 동생들이랑 거기 글 쓰고 그림 그렸어요."
 
―어릴 때 지능이 남다르다는 걸 부모님이 어떻게 아셨을까요.
 
"한 살이 되기 전에 어른들이 장기 두는 걸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 '차(車)'와 '포(包)'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더랍니다."
 
그는 세 살 때인 1966년 한양대 물리학과에 청강생으로 다니면서 66학번들과 공부했다. 나이가 열다섯 살은 더 많았던 동기생들은 꼬마 김웅용을 안고 미팅에 나가기도 했다.
 
◇미국에 정말 갔던 것일까
 
―김 교수가 1970년대에 미국에 가서 콜로라도주립대에서 공부하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들 하던데요.
 
"갖가지 의혹에 대해 변명처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 말고도 삶의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아요. 자료를 찾아놓고 대비는 하고 있으려고요. 하지만 제가 말하면 믿어줄까요? 설사 내가 미국에 안 갔다고 쳐요. 미국이라고 착각할 만한 어떤 곳에 있었다고 합시다. 제가 미국에 가고 안 가고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실은 그보다 더한 의혹도 많죠. (신동은) 아버지가 만든 거다, 기네스북에 올라간 것도 사실이 아니다…. 별별 이야기가 다 있어요."
 
김 교수는 1970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휴스턴의 NASA에서 근무하다가 사춘기가 되자 고립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1977년 7월 돌연 귀국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 1979년 8월과 9월호, 또 비슷한 시기의 신문 보도를 보면 김웅용은 당시 외국에 가지 않았고 한국에서 사회와 격리된 채 은둔해 있었다고 한다. 출입국 기록도 없다고 한다.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도 이를 인정했다.
 
 
 
'신동' 김웅용의 어린 시절. ①1966년 4월 세 살 때 한양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중학생 형들과 같이 공부하던 시절. ②한양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천재 소년을 대학생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③1966년 9월엔 한양대학교에 특별 입학해 청강생 자격으로 다녔다. ④기네스북에 실린 IQ 210의 천재 소년 김웅용의 모습. 다섯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4개 국어를 구사하고 시를 쓰며 미적분을 할 줄 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⑤1967년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칠판에 적분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
―과거 보도를 찾아보니 아버지도 김교수가 미국에 안 갔다는 걸 인정했던데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어요. 일일이 반박하며 대응해볼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살까. 그 두 가지 중에서 전 후자를 택한 거예요. 이젠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놔두고 싶어요. 네, 나는 천재가 아니에요.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그대로를 사는 것이죠. 이게 최선이에요."
 
―과거로 돌아가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겠습니다. 1966년에 한양대를 다니지 않고 그냥 제 나이에 맞게 초등학교를 갔더라면 이 모든 일들이 없었겠지요."
 
―자신이 신동 신화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릴 땐 나가 놀지도 못하고 힘들었지요. 늘 혼자라 고립돼 있었고요. 지금도 이런 의혹을 받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어릴 때 신동이었다는 걸 이용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어요."
 
◇다시 세상 속으로
 
신동의 삶은 화려하고 요란했으나 성적표는커녕 졸업장 한 장이 없었다. 또래 친구도 없었다. 그는 "초·중·고등학교 어디도 다닌 일이 없는 '무학(無學)' 상태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2년에 걸쳐 초·중·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입 준비를 시작해 충북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때는 서울에 살 수가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어요. 지도를 보다가 시선이 닿은 곳이 청주. 그래서 충북대학으로 갔어요."
 
―대학 진학 후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지던가요.
 
"세계적 신동이라더니 왜 지방대에 가나, 물리학 한다더니 왜 토목공학과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지요. 그건 제 의지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예비고사(요즘 수능시험에 해당) 점수 나쁘잖아. 그러니까 거기밖에 못 가잖아'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겠지요."
 
―대학친구들은 김 교수의 '정체'를 몰랐나요.
 
"그냥 서울서 온 어눌한 애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어쩐지 좀 느린 충북 정서하고도 잘 맞아서 이젠 청주가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어릴 때 너무 주목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겼습니까.
 
"대학 다니면서 놀았어요. 그 전엔 제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2000명이 넘어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더 만나려고 노력했어요. 주변에서 얘가 왜 이러나 그랬을 거예요."
 
―원주고 동문회에 시험 보고 들어갔다면서요.
 
"재충북대 원주고 동문회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니 동문회가 없잖아요. 교가도 부르고 당시 선생님들 이름과 별명도 외워서 선배들 테스트를 받아 합격했죠. 열심히 활동했더니 후배들은 제가 진짜 동문인 줄 알더라고요."
 
―대학 때 성적은 좋았습니까.
 
"그렇게 잘한 건 아니었어요."
 
―길 가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요?
 
"같은 연배 중엔 가끔 저를 알아보고 '당신 때문에 어릴 때 부모님에게 많이 혼났다'는 얘기를 하는 분도 있죠."
 
 
김웅용 신한대 교수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또래 친구도 적다. 그래서 대학 진학 후엔 못마시는 술도 마시고 동아리 활동도 열성적으로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했다. 그는 "친구가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이덕훈 기자
―어릴 때 명성이 워낙 대단했죠.
 
"저는 연예인도 방송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를 연예인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후 깎아내려요. 마치 지렁이를 반으로 자르는 것과 비슷해요. 지렁이를 자르면 잘려나간 뒷부분이 다시 자라요. 죽을 힘을 다해 잘린 부분이 자라면 사람들은 또 잘라요. 이제 몇 번 잘려보니까 이번엔 또 어느 정도 잘리겠지 하는 걸 알아요. 가만히 있는 게 대비하는 거예요. 나이 50이 되니까 내성이 생긴 거죠."
 
―요즘 부모들도 영재교육에 관심이 많지요. 그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공부 잘하고 어려운 문제 몇 개 더 푼다고 인생이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나씩 성취하면 돼요. 만족한 삶을 살려면 주변에서 도와줘야 하죠."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였나요.
 
"제 인생의 절정기는 대학 시절이었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외톨이로 지내다가 친구가 생기니 정말 좋았어요. 또래 친구를 사귀고 맥주도 마셨지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늘 혼자 있다가 드디어 저랑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난 거죠. 동아리에 7개나 가입했어요."
 
―신동이란 유명세에 짓눌려 외롭게 살다 잃어버린 게 뭔가요?
 
"학연, 지연 같은 인연이죠. 인연을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못 마시는 술도 많이 마시고요.남들처럼 자연스럽게 학교 다녔으면 생겼을 친구들이 제겐 없었으니까요."
 
김웅용 교수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만나 11년을 연애한 조경자씨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두었다. 조씨는 남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자신이 실패한 천재의 사례로 세상에 노출될 때마다 수치심에 치를 떨었고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동으로 잃어버렸던 학창 시절은 대학을 다니며 보상받았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했고, 이젠 원했던 교수도 됐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저를 예전 신동 시절과 비교하면서 제가 평범해졌다고 해요. 하지만 평범하게 평균적인 삶을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특별한 걸 추구하다 고립되면 그게 실패지요.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해요. 그리고 친구가 많아야 하죠. 그게 행복하게 사는 거죠."
 
김웅용 교수는? 생후 3개월 엄마·아빠 말하고 1세에 천자문 떼고 한글 익혀
 
'IQ 210의 신동'으로 알려진 김웅용(51) 교수는 1963년 서울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수선(80)씨는 건국대 물리학과 교수였고, 어머니 유명현(80)씨도 한양대 등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동' 김웅용은 생후 3개월에 "엄마, 아빠"를 말했고 5개월 때는 서서 걸었으며 1세 때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한글은 이틀 만에 익혔고 3세 때는 '별들에게 물어봐라'란 책을 냈다.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김웅용의 부모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다가, 1966년 4월 아들을 한양중학교에 청강생으로 보냈다. 다섯 달 후엔 한양대 물리학과에 특별입학시켜 공부하게 했고, 1969년엔 건국대로 옮겨서 공부를 시켰다. 이후 그의 행적은 10년 가까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웅용은 1979년 대입 준비를 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1년 충북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학부와 석·박사과정을 마쳤고, 충북개발공사에서 근무하다가 최근 신한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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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21/20140121032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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