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001. 캘리포니아 레이들리Reedley를 통해 본 초기 미주독립운동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5. 18.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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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들리(Reedley)는 캘리포니아 중앙에 위치한 샌 호아킨 밸리에 있는 인구 2만5천 명가량의 작은 도시입니다. 농업 중심도시 프레즈노에서 동남쪽으로 22마일 떨어져 있고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삼각의 중간쯤에 위치한 조용한 시골 농촌 마을이지만 초기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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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미국과 외국과는 첫 번째로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을 제물포에서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의 미국 측 목적은 기독교를 조선에 전파하려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문호를 안전하게 개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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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을 근거로 기독교 개종자를 대상으로 1902 년부터 1905년까지 약 7,000명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선발하여 이주시켰습니다. 7,000 명 중 약 2,000명이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 핸퍼드, 비살리아, 디 누바, 레이들리, 델라 노, 윌로우 스, 맥스웰 등 샌 호아킨 밸리의 8개 농장 공동체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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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 이민 사회가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모여지기 시작한 그 근본 이유가 바로 조미수호통상조약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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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남가주 지방 헤밑(Hemit)의 미국 농장에 한인 11명이 노동자로 일하던 중, 일본인 노동자로 오해를 받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 영사는 쫓겨난 한인들을 방문하고, 한인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에 배상을 받아 주려 하자 한인 노동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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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인국민회가 나서 적극적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일본과 조선이 다르며, 일본이 조선을 침탈한 사실을 설명하여 오해를 풀고 손해를 배상받고 취업의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이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이대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미국 정부에 발송해 한인과 일본인간의 대우를 달리 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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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시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이 보낸 전보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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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항 발 전보”
수신: 미국정부 국무장관 Bryan귀하
근일 한인 11명이 Hemit지방에 일하러 갔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축출 당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본영사가 간섭하려고 하나 우리가 일본관리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귀국의 법률 밑에 사는 한인들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니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 사회에 교섭하기 바랍니다.
1913년 6월 30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이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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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미국무부의 윌리엄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아래와 같은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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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성 성명”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 말하기를 재미 한인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 합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하니 이제부터 재미한인에게 관계되는 일은 공이나 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말고 한인 사회를 통하여 교섭 할 것이다.
1913년 7월 13일 미국 국무장관 William J.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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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장관의 성명으로 인해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에서 재미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우국 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서만으로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70여 명의 사진 신부가 미국 이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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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레이들리(Reedley)는 김중진(Charles Ho Kim)이란 분이 김브라더스 농산물 유통회사를 설립하게 되어 한인 초기 이민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이대위 목사와 상해임시정부 안창호 선생과 미국 동부에서 자칭 조선의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오가며 자금을 조달받던 지역 중에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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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목사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선인이 결사할 수 있도록 한 공로로 존경을 받았고 또 안창호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대리인으로서 권위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방문하면 자신도 농장 노동자가 되어 오렌지를 수확하며 초기 이민자들과 어울렸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이민서류에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자술했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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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n J. Cha가 집필한 "센트럴 캘리포니아 (1903-1957)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10)의 한국인" 에 의하면 "이승만은 레이들리(Reedley)지역의 소녀 메리 킴에게 혼인을 제안했지만 메리 킴 부모가 이승만의 친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좋아하지 않아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https://books.google.com/books?id=-kk4Q24h4JgC&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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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승만이 1935년 프란체스카와 결혼하여 방문하자 한인들이 결혼 축하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레이들리(Reedley)에는 170여 개의 초기 이민 한인 묘소가 있고, 작은 크기의 독립문이 있으며 각종 한인 초기 이민 시절의 기념건물과 장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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