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021. 이동휘횡삭부시 - 李東輝橫槊賦詩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7. 1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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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Acg737TCok

 

이동휘 횡삭부시(李東輝 橫槊賦詩)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橫槊賦詩(횡삭부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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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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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에서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수일 전, 보름달이 휘영청 뜨고 하늘은 청명하고 양쯔강은 달빛을 받아 긴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습니다. 조조(曹魏, 155~220)는 흥이 일어 배 위에 큰 잔치를 준비시켰습니다.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습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는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합니다. '()'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은 길이가 긴 창이며, '()' '시문()을 짓는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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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厭,海不厭深(산불염고,해불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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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가 투항하기로 되어 있고 감녕이 호응하고 있으니 이제 승리는 손안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조조는 자신을 인재를 찾기 위해서라면 먹던 밥도 내뱉고 달려 나와 맞이하여 대업을 이룬 周公(주공)에 비유하면서 '단가행'(短歌)을 노래했습니다. 통일을 눈앞에 둔 영웅의 호쾌한 모습은 千古(천고)의 명장면입니다. 不厭,海不厭深(산불염고,해불염심), '산은 흙과 돌을 마다치 않아 높아졌고, 바다는 강물을 마다치 않아 깊어졌네라며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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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星稀,烏鵲南.繞樹三,何枝可依(월명성희,오작남비,요수삼,하지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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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주 자사 유복이 노래 중에 明星稀,烏鵲南.繞樹三,何枝可依(월명성희,오작남비,요수삼,하지가의) '달 밝고 별 드무니 날이 샌 줄 알고, 까마귀가 남으로 날아가는데, 나무를 세 번 돌아도, 앉아서 쉴 가지가 없네'라는 부분이 불길하다고 말했습니다. 조조는 흥을 깬다면서 들고 있던 삭으로 유복을 찔러 죽였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생전에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 6 20~1935 1 31) 선생님 이야기를 그분의 어린 시절부터 마치 자신인 양 많이 회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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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許憲) 변호사와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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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댁은 대지주로 어려움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1900년대 초 김성수 일가가 자신들 선조가 군수 시절 세작을 받았다며 지운 선생님댁의 전답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거처 간 군수가 얼마인데 소유권을 주장하는가 하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1909년경 지운 선생의 부친은 한양에서 허헌(許憲, 1885~1951) 변호사를 초빙하여 사랑체에 머물게 하면서 김성수 일가와 전답 소유권에 대한 송사를 버렸습니다. 허헌 변호사의 노력으로 전답의 절반은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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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許憲) 변호사 첫번째 의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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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변호사는 1908 7, 광무 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하고 그 첫 번째로 지운 김철수 선생님댁과 김성수 일가의 전답 소유권 송사를 맡아 지운 김철수 선생님댁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때 지운 선생은 허헌 변호사에게 자신의 부친에게 권하여 자신을 머리 깍고 신식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인 허헌 변호사가 머물던 사랑방은 함경도 인사들의 사교장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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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김집 선생님과의 첫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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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를 이끌며 신민회를 조직해서 항일활동을 하던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인 이동휘 선생님도 김집 선생님도 허헌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지운 김철수 선생님 댁의 사랑방을 찾은 분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훗날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항일결사체를 만들고 사회주의 혁명 활동을 할 때 함께 한 중요한 동지분들이 허헌 선생님을 찾아왔던 함경도 분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분들은 한 분도 배신하거나 변절한 분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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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인사회당 대표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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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성재 이동휘 선생님은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로 모시기에 충분했습니다. 생전에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이동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신걸 추려보겠습니다. 이동휘 선생님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박진순 선생님 등 러시아 교민 2세 지도자들이 레닌과 함께한 걸 알고 그분들을 모아 엉성하지만 1918 4월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대표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이 판단하기에는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국제형제당이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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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결합 상해파 고려공산당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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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동휘 선생님은 1919년 인정받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동지들에 뜻에 따라 원하지는 않지만 '민족기관과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합니다. 하지만 능력도 없고 덕도 없는 자들이 서로 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이동휘 선생님은 절망하고 있었는데 1920년 서울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사회혁명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집 선생님에게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그 조직원들을 상해로 초청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1921년에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을 결합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결성하고 이동휘 선생님이 당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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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의 형제 국제당 상해파 고려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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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선생님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통해 이미 국제당에서 홀랜드 꾸시넨 당수, 체코 스메랄 당수, 헝가리 벨라준 당수들과 친분이 있어 이미 소소한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형제당에 지급하는 공산혁명 자금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러시아 조선 교민들을 이용해 국제당의 위성 정당화를 하려는 공작으로 인해서 번번하게 거부당했습니다. 그래서 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국제당의 형제당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직 작업을 부탁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동양권 최초의 코민테른의 형제당으로 인정을 받고 거금의 군자금을 지급받았고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 창립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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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이동휘 선생님을 평가한 내용은 모두 14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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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휘 선생은 매사에 열과 성으로 임한다.

2. 이동휘 선생은 한문 실력은 있어도 신학문 지식은 없다.

3. 이동휘 선생은 성의가 없는 사람은 멀리한다.

4. 이동휘 선생은 열변가다.

5. 이동휘 선생은 열변 중 청중을 압도한다.

6. 이동휘 선생은 호가 성재(誠齋)인데 자칭호인 대자유(大自由)로 불리기 원한다.

7. 이동휘 선생은 비위가 틀리면 바로 총을 빼 든다.

8. 이동휘 선생은 시도 때도 없이 울기를 잘한다.

9. 이동휘 선생은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하다가 소리를 놓아 우는 수가 있다.

10. 이동휘 선생은 대하는 사람을 바로 믿게 한다.

11. 이동휘 선생은 돈을 모르고 만지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아니한다.

12. 상해에서 '국무총리 궁둥이'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동휘 선생은 바지가 해어지면 기워입어 궁둥이가 누더기투성일 정도로 검소하다.

13. 이동휘 선생은 잘 성내지 않지만 한번 성내면 그 누구도 억제하기 어렵다.

14. 이동휘 선생이 국무총리 하다가 남 생각 안 하고 지 욕심만 부리는 이야기를 하던 이승만을 테이블 위에 있는 교자로 내리친 일을 모두가 보았다. 고 회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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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첫 승인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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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코민테른 자금과 권한을 차지하려는 유대계의 간계로 자유시참사인 흑하사변(黑河事變) 등 파벌 다툼으로 사사 오분 되어 약화되자, 1925년 주종건 등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승인 요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는 이동휘 선생님의 찬성을 받아오라 했습니다. 주종건이 이동휘 선생님에게 찬성을 요청하자 이동휘 선생님은 의논도 안 하고 종파를 하냐며 주종건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이동휘 선생님에게 분파처럼 보여도 다들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니 주종건에게 잘 타이르고 합심하여 일제에 대항토록 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동휘 선생님이 국제당에 '찬성' 전보를 쳐서 조선공산당을 승인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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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곡절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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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공산당을 만들자마자 1926년 초 105명의 조직원이 일경에 검거되고 당권을 잡지 못한 박헌영, ML 계의 패권 다툼 때문에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공산당 1 2차전반기는 안개 속에 휘말렸고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2차후반기와 3차전반기 책임 비서로 당권을 잡고 1927년에 스탈린을 만나 특별공산혁명 자금과 조선공산당의 사후승인을 받고 코민테른의 정세교육을 받으면서 돈에 매수된 일본과 미국의 조정을 받는 밀정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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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이동휘 61세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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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돈에 매수된 조선의 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보면서 사리사욕에 눈먼 조선의 지식인들 때문에 조선의 공산사회화는 불가능하고 그런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용하는 미국이 결국 세계를 장악할 거로 생각했으며 앞으로의 조선의 공산당은 서구구라파식의 하나의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그나마 해결책임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조선공산당의 책임 비서로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1930년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1936년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감옥 속에서 성재 대자유 이동휘 선생님이 6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안재홍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이동휘 선생 추모제를 하려다가 일경의 제지로 무산되었다는 소식도 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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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 중앙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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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중앙위원들인 호남아(好男兒)들 입니다.  앞줄 좌로부터 소설가 현진건의 형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1932) 선생님; 상해파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선생님;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님;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김익용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1922) 선생님; 뒷줄 좌로부터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계봉우(桂奉瑀, 1880년∼1959) 선생님; 함남출신으로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유학파인 이증림(李增林, 1897~?)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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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이동휘 선생을 생각하면 李東輝橫槊賦詩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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