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0_直系譜

한산이씨(韓山李氏) 27세 만주국(滿州國) 흥농부(興農部) 미곡검사관 이성구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0. 20. 02:15
반응형

https://youtu.be/DnFZ-fLbg3U

27세 진목(振穆) 이성구

 

한산이씨 27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26대손이자 중시조 한산부원군 문정공 목은 이색 선조님의 목은20대손으로 목은21세인 제 조부님인 만주국(滿州國) 흥농부(興農部) 미곡검사관(米穀檢査官) 이성구(李成求) 어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구 어른은 진도군수와 상주영장을 지낸 이사목 선조님의 직계 7대 장손입니다. 6대조부님은 연산군수 이규첨 어른이며, 5대조부님은 절충장군 이원재 어른이고, 고조부님은 첨정 필재 이원효 어른이며 증조부님은 혜민원주사 이승태 어른이며 조부님은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고 아버님은 農商工部 金鑛局 技手와 平安北道 熙川郡 東面 面長 그리고 忠州 老隱面 文星里 文星金鑛을 운영했던 李喆珪 어른입니다.

 

이성구 어른의 부인은 淳昌趙氏 趙炳燮의 장녀인 趙言禮 어른입니다. 두분 사이에 외동아들로 초대창경궁식물원장을 지낸 방원 이성찬 선생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3명의 손자와 2명의 손녀가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성구 어른은 1908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2년 음력 9월 18일 한성부 종로통 계동 13번지에서 李喆珪 어른과 모친 迎日鄭氏 鄭忠源 어른 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성구 어른이 만1세가 되던때인 1909년 隆熙 3년 9월10일에는 어머님 영일정씨 정충원 어른이 이성구 어른 출산이후 후유증으로 인하여 작고하셨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7세되던 1914년 대정(大正) 3년 4월 2일에는 어머니 迎日鄭氏 鄭忠源 어른이 작고 하신 후에 새로오신 새어머니 密陽朴氏 朴癸卿 어른 사이에서 여동생 李順求 어른이 출생하십니다. 그런데, 11월2일자 朝鮮總督府官報 지방행정란에 뜸금없이 아버님 李喆珪 어른을 아무 연고도 없는 平安北道 熙川郡 東面 면장으로 전보를 시킵니다. 고종의 측근으로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돌머루 한산이씨 마을로 낙향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하여 선진문물을 배워 망할 나라에 대비하라며 사회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 이명직 어른과 아버님 이철규 어른을 일제가 물리적으로 떨어뜨리고 이명직 대감을 제거하려는 준비를 차근차근 준비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할아버지 성우공 이명직 대감은 1908년부터 1915년까지 고향인 돌머루 한산이씨 마을에서 조카인 노작 홍사용, 홍사용의 친구 정백,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 등 백조파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을 가르치며 세상 문물 전파와 세상격변 갈파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사회계몽운동에 떨쳐나섭니다. 하지만 일제는 1914년에 아버님 이철규 어른을 平安北道 熙川郡 東面 면장으로 멀리 멀리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이성구 어른이 만8세되던 1915년 대정4년 9월7일에 할아버지 성우공 이명직 대감은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머물던 일제 헌병들에게 고종 측근 제거 차원에서 독살 당하여 작고하십니다. 그 소식을 접한 아버지 평안북도 동면 면장 이철규 어른은 면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돌머루로 돌아와 이명직 대감의 장례를 치루고 배운 기술인 금광개발사업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준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1915년 조부님 이명직 대감의 부고를 듣고 부친 평안북도 동면 면장 이철규 어른은 면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돌머루로 돌아와 조부님상을 치룬뒤 관직에 복귀하지 않고 이성구 어른이 만9세되던 1916년 大正 5년 9월21일 부친 李喆珪 어른은 충청북도 충주군 老隱面 文城里에 있는 지금의 國望山인 금방산 일대 21만3천150평에 금광업등록을 하여 등록번호 2779호로 문성금광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내용은1916년 9월21일자 朝鮮總督府官報 금광업 등록사항편에 나옵니다. 그해 12월 25일에는 부친과 새어머님 密陽朴氏 朴癸卿 어른 사이에서 후일 오리온과 유한양행에 근무했던 남동생 李容求 어른이 출생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에 분기별로 보고한 조선 금광의 일본반출통계에 의하면 문성금광에서 1917년 총일본 반출량의 24%, 1918년 31%, 1919년 36%로 증가해갔습니다. 1918년 일본내각은 훈령을 통해 조선인에게 금광업허가를 할때는 그 요건을 강화하고 금맥이 큰곳은 허가를 내주지 말것을 통보합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10세되던 1917년 大正 6년 1월12일자 朝鮮總督府官報에는 일제가 부친 李喆珪 어른에게 신고한 213,150평 금광의 자세한 위치와 사무소 위치, 지질조사서, 등 금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수 있는 서류제출 완료하라는 행정명령을 했음을 알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부분이 1919년 10월 6일 부친 이철규 어른이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일본기마헌병이 부친 이철규 어른을 참살한 이유와도 연관이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일제는 1919년 이후, 금과 관련된 금방산의 지명을 명성황후와 무당 그리고 그 무당의 아들과 관련된 국망산으로 표기하여 조선인의 뇌리에서 금광의 역사를 지우려 노력했지만, 아직도 충북 충주시 노은면이 고향인 분들 중에는 국망산을 금이 많이 나온다하여 “금방산”으로 불렸다는 기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12세되던 1919년 大正 8년 10월6일에 부친 李喆珪 어른은 뜻을 함께하는 동료 젊은 관원 40여분들과 함께 상경하여 고종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진실을 조사하여 밝히라는 부복 상소를 올렸으나 용산에 주둔한 일본기마헌병들이 늑달같이 달려들어 부친 이철규 어른을 비롯한 40여 젊은 관원들을 무참하게 참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철규 어른은 만32세의 젊은 나이로 26살의 부인 朴癸卿 어른과, 12살의 장남 이성구 어른, 6살의 외동따님 李順求 어른, 그리고 4살의 차남 李容求 어른을 남기고 한많은 병탄조선의 역사와 함께 작고하시고 말았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14세되던 1921년 4월 28일 새로 개교한 4년제 수원 台章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여 이성구 어른이 만18세되던 1925년 3월 14일 제38호로 제1회 태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증서가 이성구 어른이 받았던 4년제 수원 태장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증서입니다. 이성구 어른은 태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신후 동갑의 淳昌趙氏 趙炳燮 어른의 장녀 趙言禮 어른과 혼인하셨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19세되던 1926년 昭和 1년 조부 이명직 어른과 부친 李喆珪 어른이 일제에 원통하게 돌아가신 뒤 수원태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 길림현으로 이주를 결심하셨습니다. 지전을 꼬아서 몸에 두르고 만주로 가셨다는 이야기는 어린시절 흥미진진하게 듣던 제 조부 이성구 어른의 단골 이야기였습니다. 그사이 이성구 어른이 만20세되던 1927년 昭和 2년 12월 5일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234번지에서 제 부친인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출생하셨습니다. 만주 길림현에서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조부 이성구 어른은 고향 동탄으로 돌아와 이성구 어른이 만21세되던 1928년 昭和 3년 가족인 부인인 조언례 어른과 외아드님 이성찬 어른을 데리고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만주 길림현으로 이주를 완료 하셨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22세되던 1929년 昭和 4년 3월 20일과 6월 20일에 조선과 만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공산당 3차 비서이자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장인 지운 金綴洙 선생에게 노자를 제공하고 안전한 은시처를 제공하던 중, 이성구 어른의 경제적 후원과 장소제공으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金綴洙·李東輝·윤자영·오산세·김일수·최동욱·조덕진; 김영만·김영식·안상훈·金圭烈·韓斌·高光洙 등이 모여 성공적으로 개회했고 코민테른에 제출할 보고문을 체택하여 1930년 2월에 접수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보고문에는 “대중이 혁명적으로 진출하고 있지만 공산당의 지도가 없어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 그치고 있다는 것과 당을 노동자 속에서 건설하라는 '12월테제'가 도리어 파쟁을 노동자 속에 옮겨 놓을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주 길림현에서 미곡수집상을 하면서 조선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좌우익 독립지사들에게 노자돈을 제공하고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운 金綴洙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3월 20일과 6월 20일 두차례에 걸쳐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생전에 말씀하시길 “상해 고려공산당파인 金綴洙·李東輝 선생은 사심없이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조선의 인민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이끌 민족의 지도자였고 경제적 지원에 몸을 어찌둘지 몰라 황송해하고 고마워 한 반면에, 일추크파니 서울파니, ML파니 하는 분들은 오직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독립운동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고 많은 돈을 들여 노자를 주고 풍족하게 먹여주고 안가를 제공하고 근사한 대회를 치뤄주는데 눈꼼만큼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고 심지어는 마적과 다름없는 이들도 있었다”고 회고 하셨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25세되던 1932년 3월 1일 일제의 괴뢰국가인 푸이의 만주국이 건국되고 大同 원년을 선언하자 만주 길림에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기반을 지키기 위해 만주문관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水原農林專門學校 부설 실업보습학교에 진학하여 만26세 되던 1934년에 졸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만주문관시험에 응시하여 총장 장얀칭과 차장 다카하시 야스노리가 이끄는 만주국 실업부 산하 농림국 미곡검사관으로 길림현에서 근무를 시작하셨습니다.

 

옆사진은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만주 길림에서 경성 봉래공립고등소학교로 유학가기 직전에 길림현 전곽기 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1940년 외아들 芳園 李盛粲 선생을 京城의 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전학시키셨습니다. 1942년 외아들 芳園 李盛粲 선생이 京城의 京城園藝學校에 입학하셨습니다. 1945년 외아들 芳園 李盛粲 선생이 京城의 京城園藝學校를 졸업하시고 이왕직이 운영하는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취직하셨습니다. 1937년 만주국 실업부가 산업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0년 대신 황푸준과 차장 시마자키 요이치가 이끄는 흥농부로 바뀌어 1945년 8월 18일 만주국이 붕괴될때까지 약 11년간을 길림현의 만주국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하며 조선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독립지사들의 노자돈과 안정한 거처를 제공하셨습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38세되던 1945년 8월 이후 일제가 패전국이 되고 만주국이 붕괴된 후 서울 종로구 계동 13번지로 돌아와 창경궁 식물원장을 하는 외아들 芳園 李盛粲 선생과 함께 살며 쌀도가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진은 이성구 어른이 만주에서 돌아와 종로통에서 쌀도가를 시작하실때 남기신 사진입니다.

 

이성구 어른이 만43세되던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창경궁 식물원장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은 이승만 박사가 아끼는 꽃들을 열차에 실고 이승만 박사와 함께 피난하여 전주 임업시험장에 피난 식물원을 꾸리고 있었고 이성구 어른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하였을때 인민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만주에서 이성구 어른의 신세를 진 사람들이라 아무 불편없이 생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주변에 절대 나서지말고 조용히 있는듯 없는듯 지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합니다. 하지만 처남중 한명이 이성구 어른을 인민군이 함부로 하지 않는 그 기세를 믿고 용산구 인민위원장을 했다고 합니다. 서울이 수복된 후 처남분은 서북청년단의 보복을 피해 상도동 계곡에 숨어 살았고 이성구 어른이 살게 했던 가옥들은 서북청년단에 뺏기고 말아 경제적으로 힘드셨다고 합니다.

 

1951년 11월 피난지 전주에서 전주농림중학교 원예전임강사로 있던 외동아들 방원 이성찬은 용산 인민위원장을 하고 상도동 계곡으로 숨어든 이모부로 인한 사상적 의심을 일거에 불식시키기 위해 6사단에 자진 입대하여 11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전개된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949고지 전투에 6사단 7연대로 투입되어,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은 임남면 동남쪽으로부터 8사단 21연대와 6사단 19연대, 7연대 및 2연대 등 4개 연대 병진으로 17일 05: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지대내 적인 중공군 202사단 605연대, 204사단 612연대, 35사단 104연대를 격파하고 공격 2일째인 18일 예하 전 연대가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었습니다.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배속된 6사단 7연대는 그레이선인 1220고지-석화동-903고지-949고지-용호리-교암산을 연하는 선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고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은 이 전투에서 퇴각하던 중공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전신에 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되었습니다.

마침 덴마크 상선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참전한 바로 그 유명한 병원 유틀란디아(Jutlandia)호에서 서울 메디칼 선터를 설립해준 뛰어난 의술로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 폐에서 파편을 빼내고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어 1년 4개월에 걸친 재활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옆 사진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에서 같이 재활의 시간을 가지며 지내던 환우들과 함께 1952년 3월에 찍은 사진으로 뒤편 맨 오른쪽에 있는 분이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입니다. 같은 환우 중에는 후일 원주교구 주교로 선종하신 군종병 지학순 주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은 퇴원하며 상등병으로 명예제대 하였습니다. 퇴원하자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은 피난 식물원이 있던 전주로 가서 1953년 4월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근무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구 어른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있으면서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으로 가기전 1954년 5월 학생들의 국화전시회를 성대하게 개최했습니다. 사진은 1954년 5월 국화전시회가 열리던 전주 중앙국민학교의 모습입니다. 1954년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의 중매로 길림에서 독립군을 돕던 이성구 어른의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과 조선에서 독립군을 돕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내맛골의 보굉 이봉욱 선생의 장손녀 윤선 이춘연 여사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1954년 5월에는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을 맡아 우장춘 박사를 도와 촉탁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때 이성구 어른은 함게 청량리에서 사셨습니다.

1955년 10월 29일 청량리에서 장손자가 출생합니다. 1957년 4월에는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국립원예기술원 청량리분원에서 이승만 박사가 있는 경무대 온실장으로 옮겨 근무합니다. 1957년 10월 7일에는 3남 2녀중 둘째 손자가 출생합니다. 1957년 11월에는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과 한국일보 사장 백상 장기영 사장이 합작하여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현대식 원예식물원 설립하여 그곳에서 함께 지내십니다. 사진은 이성구 어른이 한남동 원예식물원에서 꽃을 돌보시는 모습입니다. 1959년 5월 10일에는 3남 2녀중 장손녀가 출생합니다. 1961년 6월 11일에는 3남 2녀중 4째이자 3번째 손자가 출생합니다. 이해에는 장손자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이성구 어른은 용산구 청파동3가 107-36번지로 이사하게 됩니다.

 

사진은 이성구 어른이 용산구 청파동 3가 107의 36번지 집앞에서 아끼시는 지와와와 함께 하신 사진입니다.

• 이성구 어른은 만55세되던 1962년 부터 1981년 만74세로 작고하실때까지 청파동 파출소 옆에서 부동산 중계업에 종사하셨습니다.

• 1967년 10월 27일에는 3남 2녀중 막내손녀가 외아들 방원 이성찬 선생이 운영하던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방산식물원에서 출생합니다.

• 1968년에는 장손자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 1970년에는 둘째손자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 1971년에는 장손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 1972년에는 장손녀를 외아들 방원 이성찬이 운영하는 방산 식물원으로 보내고, 효장국민학교에서 소사북국민학교로 전학을 시킵니다.

• 1973년에는 둘째손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 1974년에는 장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 1975년 8월 9일에는 부인인 순창조씨(淳昌趙氏) 조병섭(趙炳燮) 따님 조언례(趙言禮) 어른이 작고하셔서 화장으로 모셨습니다. 그해 3째손자가 부천중학교에서 선린중학교로 전학을 옵니다.

• 1976년에는 둘째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 1977년에는 둘째손자가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 1979년에는 장손녀가 여고를 졸업합니다.

• 1980년 장손자가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하고; 3째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후 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에 검거되어 5개월간 불법감금과 고문을 당하고 풀려납니다.

• 1981년 11월 23일 이성구 어른은 만74세의 나이로 작고하여 화장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면 한산이씨 인재공파 세보에 나오는 이성구 어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자(子) 성구(成求) 자(字) 진목(振穆) 무신(戊申) 1908년 9월 18일생(一九0八年九月十八日生) 신유(辛酉) 1981년11월23일졸(一九八一年十一月二十三日卒) 화장(火葬) 배(配) 순창조씨(淳昌趙氏) 병섭여(炳燮女) 언례(言禮) 무신(戊申) 1908년2월7일생(一九0八年二月七日生) 을묘(乙卯) 1975년8월9일졸(一九七五年八月九日卒)”입니다.

 

참고로 흐름도에서 보이 듯 한산 27세 이성구 어른의 여동생은 이순구 어른이고; 오리온과 유한양행에 근무했던 남동생은 이용구 어른입니다. 한산28세로는 창경궁 초대 식물원장을 했던 외아들 이성찬; 금촌역장을 했던 조카 이현찬; 인천저축은행장을 지냈던 조카 이영찬 어른이 계십니다. 한산29세로는 손주 이태원; 이양원; 이상원; 이정현; 종손들은 이세원; 이동원; 이자원; 이제원 등이 있습니다. 한산30세로는 증손 이은수; 이경수; 이주현, 외증손으로는 조승현; 이진석; 조명은; 이소정이 있습니다.

 

다음 30편 한산이씨 28세 목은22세 창경궁 식물원장 이성찬 선조님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