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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韓山李氏) 28세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 초대식물원장(初代植物園長) 이성찬(李盛粲) – 6.25 참전상이국가유공자
한산이씨 28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27대손이자 중시조 한산부원군 문정공 목은 이색 선조님의 목은21대손으로 목은22세인 제 부친인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 초대식물원장(初代植物園長)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찬 선생님은 진도군수와 상주영장을 지내신 이사목 선조님의 직계 8대 장손입니다. 7대조부님은 연산군수 이규첨 어른이며, 6대조부님은 절충장군 이원재 어른이고, 5대조부님은 첨정 필재 이원효 어른이며 고조부님은 혜민원주사 이승태 어른이며 증조부님은 궁내부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이고 조부님은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農商工部 金鑛局 技手)와 평안북도(平安北道) 희천군(熙川郡) 동면(東面) 면장(面長) 그리고 충주(忠州) 노은면(老隱面) 문성리(文星里) 문성금광(文星金鑛)을 운영했던 이철규(李喆珪) 어른이며 부친은 만주국(滿州國) 흥농부(興農部) 미곡검사관(米穀檢査官) 이성구(李成求) 어른입니다.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슬하에 3남 2녀를 남기셨습니다. 장남은 서울의대 출신 안과의사이고, 차남은 광고회사 사장, 3째로 장녀는 의상디자이너, 4째로 3남은 미국공무원이며, 막내로 둘째따님은 영어학원 원장을 지냈습니다. 장손자는 미 국방성에 복무했고, 그 외의 손주들은 의사, 정부계통, 어학계통 등에 종사하고 있고 외손주로는 신학자, 공무원, 만화가, 헤어 스타일리스트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1927년 소화(昭和) 2년 12월 5일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234번지에서 만주(滿洲) 길림현(吉林縣) 전곽기(前郭期)에서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부친 이성구(李成求) 어른과 모친 순창조씨(淳昌趙氏) 조병섭(趙炳燮) 어른의 장녀 조언례(趙言禮) 어른 사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 다음해인 1928년 소화(昭和) 3년에는 부친 이성구(李成求) 어른이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중국 만주(滿洲) 길림현(吉林縣) 전곽기(前郭期)로 어머니인 조언례 어른과 함께 이주를 완료하셨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2세되던 1929년 소화(昭和) 4년 3월 20일과 6월 20일에 부친 이성구(李成求) 어른은 조선과 만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공산당 3차 비서이자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장인 지운 김철수(金綴洙) 선생에게 노자를 제공하고 안전한 은시처를 제공하던 중, 이성구(李成求) 어른의 경제적 후원과 안전한 장소제공으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김철수(金綴洙), 이동휘(李東輝), 윤자영, 오산세, 김일수, 최동욱, 조덕진; 김영만, 김영식, 안상훈, 김규열(金圭烈), 한빈(韓斌), 고광수(高光洙) 등이 모여 코민테른에 제출할 보고문을 채택하여 1930년 2월에 코민테른에 접수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보고문에는 “대중이 혁명적으로 진출하고 있지만 공산당의 지도가 없어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 그치고 있다는 것과 당을 노동자 속에서 건설하라는 '12월테제'가 도리어 파쟁을 노동자 속에 옮겨 놓을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부친 이성구(李成求) 어른은 만주 길림현에서 미곡수집상을 하면서 조선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좌우익을 막론한 모든 독립지사들에게 노자돈을 제공하고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운 김철수(金綴洙)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던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3월 20일과 6월 20일 두차례에 걸쳐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생전에 말씀하시길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선생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원들은 사심없이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조선의 인민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이끌 민족의 지도자이고 경제적 지원에 몸을 어찌둘지 모를 정도로 황송해하고 고마워 한 반면에, 일추크파 고려공산당원이나 서울파, ML파 등등은 오직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독립운동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고 많은 돈을 들여 노자를 주고 풍족하게 먹여주고 안가를 제공하고 근사한 대회를 치뤄주는데도 눈금만큼도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회고 하셨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5세되던 1932년 3월 1일 일제의 괴뢰국가인 푸이의 만주국이 건국되고 대동(大同) 원년을 선언하자 만주 길림에 미곡수집상으로 자리를 잡은 부친 이성구(李成求) 어른은 그 기반을 지키기 위해 만주국 문관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수원고등농림학교 (水原農林專門學校) 부설 실업보습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7세되던 1934년에는 부친 이성구 어른이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 부설 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장 장얀칭과 차장 다카하시 야스노리가 이끄는 만주국 실업부 산하 농림국 미곡검사관으로 길림현에서 근무를 시작하셨습니다. 그해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만주(滿洲) 길림현(吉林縣) 전곽기(前郭期) 매수소학교(昧掱小學敎)에 입학하셨습니다.
1932년 3월 1일 경성(京城)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전학시키셨습니다. 사진은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남기신 유품입니다. 맨 왼쪽에 본인이라는 화살표와 아래쪽에 “滿洲(만주) 吉林省(길림성) 前郭期(전곽기) 昧掱(매수)小學敎(소학교) 五學年生(5학년생)때 學挍實習地(학교실습지)에서”라는 설명을 남기셨습니다. 이사진을 보고 강진에 사시던 고 윤정현 시인은 "농업 실습 중 점심을 먹는 거 같군요. 목이 긴 선생님이 반팔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여름 같구요. 머리를 빡빡 깎은 남학생이 일곱, 꽃무늬와 드레스 모양의 옷을 입은 여학생 다섯은 남녀가 유별해서 각기 다른 줄에 마주보고 앉았구요. 남자 일곱 중 둘이 안경을 썼으니까 상당한 번화가였던 듯 하구요. 찬은 보이지 않고, 물주전자만, 선생님 앞에 놓인 그릇이 하나 밖에 안보이니 찬은 한두가지에 불과했을 듯. 책을 걸려놓는 것도 보입니다. 디귿자 모양의 나무가 세개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비닐하우스 같은 곳 아니었을까요?" 라고 분석하셨습니다.
저는 조부모님과 부친 생전에 만주 사람들은 생파를 들고 다니면서 씹어먹더라는 이야기를 하셔서 만주하면 촌구석일꺼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윤정현 시인이 느끼셔던 느낌엔 학생의 안경으로 인한 만주 “번화가”를 연상하였습니다. 윤정현 시인께서 관찰하셨던 점이 이 사진을 또 새롭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소학교 5학년이면 10살이나 되었을까요? 넉넉잡아 만11세인 1938년으로 기록해 두고자 합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13세 되던 1940년 강덕(康德) 7년 1월 경성(京城)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진학하시기 전 만주 길림현 전각기에서 가족사진을 찍으실때 별도로 촬영하신 독사진입니다. 만주 매수소학교(昧掱小學敎) 시절에는 전만주 소학교체전에서 수영과 잠수, 그리고 단거리 종목에서 우승하여 금메달을 따셨다고 합니다. 부친 이성구 어른께서 외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학업을 위해 어린 외아들을 만주 길림에서 경성 중구 정동에 1895년 관립 정동소학교 (貞洞小學校)로 개교한 당시 명문이던 경성(京城)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 (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유학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당시 부친 이성구 어른은 아드님 유학비용으로 그당시 면장 월급에 해당하는 만큼의 돈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1940년 강덕(康德) 7년 1월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경성(京城)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진학하시기 전 만주 길림현 전각기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으신 가족사진입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13세 되던 1940년 소화(昭和) 15년 경성(京城)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진학하십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15세 되던 1942년 소화(昭和) 17년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를 졸업하고 3월에 경성원예학교 (京城園藝學校)에 입학하셨습니다. 참고로 경성원예학교는 현재의 장충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봉래공립고등소학교 시절부터 경성안의 유명한 영어 수학 과외선생님을 붙여서 공부를 시키셨다고 하는데 친구사귀고 노는것에 빠져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성원예학교도 쌀가마 한트럭을 주고 입학하셨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18세 되던 1945년 소화(昭和) 20년 3월 경성원예학교(京城園藝學校)를 졸업하고 이왕직이 관리하는 창경궁 식물원을 책임지는 주임으로 취직하셨습니다. 부친 이성구 어른은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정 1년 8월 18일에 괴뢰 만주국이 붕괴될때까지 약 11년간의 길림현의 만주국 미곡검사관을 마치고 아드님이 계신 경성(京城)으로 돌아오셔서 미곡소매상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창경궁 식물원 유리 온실 뒤편에 있는 화훼배양실을 배경으로 찍으신 사진입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18세 되던 1945년 소화(昭和) 20년 3월 경성원예학교(京城園藝學校)를 졸업하고 이왕직이 관리하는 창경궁 식물원을 책임지는 주임으로 취직하셨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 제24군단의 미군정기(美軍政期)가 시작된 9월 8일부터 파괴된 서구식 유리온실을 복원하는 책임을 맡아 창경궁 식물원을 정상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식물원 유리 온실을 일제시절 독일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했는데 미군정청이 그 유리 온실을 복원하기 위해 그 건축가를 수소문 했지만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지만 18세의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깜쪽같이 복원하시는 바람에 전격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에 임명되어 해방조국의 식물원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창경궁 식물원 유리 온실 내부를 배경으로 찍으신 사진입니다. 1945년 해방후 공주감옥에서 출옥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조국의 장래를 위해 논의하고자 장안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로 서로 이권다툼만 하는데 실망하고 머리도 식힐겸 서울의 명소가 된 창경궁 식물원에 들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식물원 담당자인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원 이성찬 선생이 1929년 3월 6월에 만주 길림현 전각기에서 자신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재건설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수 있게 도와준 은인 미곡검사관 이성구 어른의 아들임을 알고 만52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만18세의 화훼원예가 창경궁 식물원장의 평생을 이어갈 친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진은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 칩거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다가신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1945년 해방이후부터 작고하던 1986년 2월까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에게 보냈던 166통의 서찰 중 첫번째 서찰의 모습입니다. 서찰에 나오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가 신신백화점내 화훼점”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부업으로 친구분인 신구문화사 이종익 박사님과 함께 운영하시던 꽃집의 주소였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 만21세 되던 1948년 8월 15일 미군 제24군단의 미군정기(美軍政期)가 끝나고 이승만 박사의 남한 단독 정부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역시 대한민국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에 임명되어 해방조국의 식물원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유독 화훼 원예를 좋아하시고 한국에도 서구의 어느 식물원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창경궁 식물원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책임지신 창경궁 식물원에 데리고와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북미 독립자금을 횡령하고 조직원을 살해려한 우남 이승만 박사를 백범 김구 선생이 처형하려할때 레닌 군자금을 집행하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그 군자금으로 대납하여 우남 이승만 박사의 목숨을 구해준적이 있어 그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인 방원 이성찬 선생님을 우남 이승만 박사가 귀여워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우남 이승만 박사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무도 모르게 6.25 피난민 1호로 열차 4동을 달고 피난가는 도중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1950년 6·25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7일 저녁 7시 30분 기차 4량을 달고 우남 이승만 박사 부부는 대전을 향해 피난을 강행했습니다. 이때 창경궁 식물원 원장인 방원 이성찬 선생님도 우남 이승만 박사 부부가 아끼고 좋아하는 귀한 식물들과 품종들을 그 피난 기차 끝 4번째칸 뒤편에 싣고 함께 피난길에 따라 나섰습니다. 피난 열차는 대구갔다 다시 대전거처 수원까지 돌아 왔다가 다시 대전으로 가는 갈팡질팡 했다고 합니다. 대전에서 충남도지사관사에서 대전방송국 설비를 이용하여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며 자신은 서울에 있는 양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필수 경호 인원만 남기고 방원 이성찬 선생님등은 각자 알아서 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같은 경성원예학교 출신들이 있는 전주 임업시험장을 향해 기차를 몰고가 전주에 피난 식물원을 꾸렸습니다. 월급도 끈겨서 동창분들이 마련해준 전북농림중학교 원예전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피난 식물원을 지켰습니다. 그때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전주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참고로 방원 이성찬 선생님등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부하들을 각자 알아서 살라고 버려두고 우남 이승만 박사부부는 7월 1일 새벽 3시 승용차를 타고 이리역으로 가서 8시간을 기다려 3등객차 2칸을 단 기관차를 구해 오후 2시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또다시 배를 구할 수 없어 2시간 기다려서 5백톤급의 작은 소해정 제514함을 구해서 타고 19시간의 우여곡절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32시간동안 국정공백으로 미군조차 우남 이승만 박사의 행적을 파악할수 없었습니다.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우남 이승만 박사의 행적은 갈팡질팡이었고 부산에서는 일본에 망명을 타진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우남 이승만 박사가 아끼는 꽃들을 열차에 싫고 이승만 박사 부부와 함께 피난하여 전주에서 전북농림중학교 원예전임강사를 하며 임업시험장에 피난 식물원을 꾸리고 있었고 부친 이성구 어른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하였을때 인민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만주에서 부친 이성구 어른의 신세를 진 사람들이라 아무 불편없이 생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이성구 어른께서는 주변에 절대 나서지말고 조용히 있는듯 없는듯 지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합니다. 하지만 처제의 남편분 중 한명이 이성구 어른을 인민군이 함부로 하지 않는 그 기세를 믿고 용산구 인민위원장을 했다고 합니다. 서울이 수복된후 처제의 남편분은 서북청년단의 보복을 피해 상도동 계곡에 숨어 살았고 이성구 어른이 살게 했던 가옥들은 서북청년단에 뺏기고 말아 경제적으로 힘드셨다고 합니다.
1951년 11월 피난지 전주에서 전주농림중학교 원예전임강사로 있던 방원 이성찬 선생은 용산 인민위원장을 하고 상도동 계곡으로 숨어든 이모부로 인한 사상적 의심을 일거에 불식시키기 위해 6사단에 자진 입대하여 11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전개된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949고지 전투에 6사단 7연대로 투입되었습니다.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은 임남면 동남쪽으로부터 8사단 21연대와 6사단 19연대, 7연대 및 2연대 등 4개 연대가 병진으로 17일 05: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지대내 적인 중공군 202사단 605연대, 204사단 612연대, 35사단 104연대를 격파했고 방원 이성찬 선생이 배속된 6사단 7연대는 그레이선인 1220고지-석화동-903고지-949고지-용호리-교암산을 연하는 선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고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는데 결정적 역활을 했으며, 공격 2일째인 18일에는 예하 전 연대가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었습니다. 하지만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이 전투에서 퇴각하던 중공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전신에 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되었습니다.
마침 덴마크 상선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참전한 바로 그 유명한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에서 서울 메디칼 선터를 설립해준 덴마크의 뛰어난 의술로 방원 이성찬 선생님 폐에서 파편을 빼내고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어 1년 4개월에 걸친 재생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옆 사진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에서 같이 재생의 시간을 가지며 지내던 환우들과 함께 1952년 3월 2일에 찍은 사진으로 뒤편 맨 오른쪽에 있는 분이 방원 이성찬 선생님입니다. 같은 환우 중에는 후일 원주교구 주교로 선종하신 군종병 지학순 주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방원 이성찬 선생은 퇴원하며 상등병으로 명예제대 하였습니다. 퇴원하자 전주로 가서 1953년 4월 방원 이성찬 선생은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근무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이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있으면서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으로 가기전 1954년 5월 학생들의 국화전시회를 성대하게 개최했습니다. 사진은 1954년 5월 국화전시회가 열리던 전주 중앙국민학교의 모습입니다. 1954년 5월에는 방원 이성찬 선생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을 맡아 우장춘 박사를 도와 촉탁으로 근무했습니다.
사진은 1954년 3월 12일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촉탁으로 가기전 부산 국립원예기술원 원장관사에서 원장인 우장춘 박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좌로부터 방원 이성찬 선생님, 국립원예기술원 화훼과장 고병민 선생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 원예가 최영전 선생님이 좌정한 우장춘 박사님을 둘러서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참고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다닐때부터 동경대 농학과 학생이던 우장춘 박사를 민족의식화 시켜 성을 지키고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봉사하도록 이끈 운동권의 조상이었습니다. 1954년 5월에는 방원 이성찬 선생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촉탁으로 원장인 우장춘 박사님이 서울에 오실때마다 통역을 해드렸고 육종연구를 도와 근무했습니다.
사진은 1954년 5월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촉탁으로 온실에서 화훼들의 전지작업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1954년 5월에는 방원 이성찬 선생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촉탁으로 원장인 우장춘 박사님이 서울에 오실때마다 통역을 해드렸고 육종연구를 도와 근무했습니다.
사진은 근무하던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온실안에서 1955년 10월 29일에 출생한 장남을 안고 찍은 사진입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28세 되던 1955년 10월 29일에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 촉탁으로 근무하며 청량리에서 3남 2녀중 장남으로 후일 안과의사로 한국 최초로 안구 제거 없이 안구암수술을 집도한 안구암의 권위자 이태원 박사가 출생합니다.
사진은 꽃과 화훼를 좋아하던 우남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1957년 4월 경무대 안에 온실을 만들어 방원 이성찬 선생님을 국립원예기술원 청량리분원에서 경무대 온실장으로 데리고 갈때 찍은 사진입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30세되던 1957년 4월에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사는 경무대 온실장으로 가게됩니다.
사진은 1957년 10월 7일 태어난 3남 2녀중 차남을 안고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의 현대식 원예식물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30세 되던 1957년 10월 7일에 차남을 생산했습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4월부터 경무대 온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경무대에 출근하고 퇴근할때마다 검문검색에 지치고 또 우남 이승만 박사부부가 온실에 들러 꽃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김창용이하 경호실 직원들이 이승만 박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며 하루종일 진술서를 쓰게 하는 모습을 보며 우남 이승만 정권이 조만간 비참하게 몰락할것을 느끼고 그해 11월에 마침 한국일보의 백상 장기영 사장님이 자신과 함께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설립하자고 제의를 해와서 전격적으로 수락하고 1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한국일보 보급소와 원예식물원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1957년 11월에 한국일보 사장 백상 장기영 사장님과 의기투합하여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현대식 원예식물원 설립하여 서울의 명소로 만들어 가던때에 식물원 마당에서 큰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입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32세되던 1959년 5월 10일에는 3남 2녀중 후일 의상디자이너로 활동했던 장녀가 출생합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34세되던 1961년 6월 11일에는 후일 5.18민주화유공자로 미국유학하여 공학박사로 미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검사관을 지내는 3남 2녀중 4째이자 3남이 출생합니다. 이해에는 장남이 효창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조부 이성구 어른이 용산구 청파동3가 107-36번지로 장남 차남 장녀와 함께 이사하게 되어 조부모 밑에서 크는 자식들과 방원 선생 밑에서 크는 자식들이 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로 꽃클럽을 주도적으로 운영하여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35세되던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國際親善)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행사를 알리는 행사 포스터입니다. 이 행사에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이사진은 1962년 3월 7일 꽃씨 날리기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꽃클럽 회원들이 서울시청에 모여서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한복을 입으신 무용가 김백봉 선생님 뒤 사진 왼쪽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보입니다.
1964년 5월 한국일보 백상 장기영 사장이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하자 동업하던 한남동 식물원을 한국일보 직원으로 운영하던지 동업을 그만두던지 해야할 처지라 방원 선생님의 모친인 조언례 어른이 6.25때 죽다 살아났으니 남의 밑에서 일꾼으로 일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강권하여 그 이후부터는 여행과 화가들과 교류 이런저런 행사에 놀러 다니며 부천군 소사읍에 근교농업을 위한 원예식물원 운영을 모색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불광동 보건원 관사에서 3남 2녀중 4째이자 3남과 살기 시작했습니다. 조부님과 살게된 장남은 청파동 효창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차남은 1964년에 효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장녀는 전북 임실 외가에 맞겨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조부님과 함께 살게된 장녀도 1966년에 효창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만39세의 나이인 1966년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에 근교농업확산을 위하여 방산식물원 조성에 돌입합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은 만40세의 나이인 1967년부터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에 본격적으로 방산식물원을 운영하셨습니다. 10월 27일에는 그곳 방산식물원에서 후일 미국유학 후에 영어학원 원장을 하는 막내딸이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2달에 한번씩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서 서찰을 보내어 상경 일정을 알리고 올라오시는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개인 비서 겸 후원자로 서울 각처로 모시고 다니면서 동양화가들과 교류도 하시고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서화 보급에 정열을 불태우셨습니다. 그리고 근교농업으로 원예 화훼 기술을 근처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41세 되던 1968년에는 방산식물원에 함께 사는 3남이 소사북국민학교를 입학하고 서울 청파동 조부 이성구 어른과 함께사는 장남이 효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43세 되던 1970년에는 서울 청파동 조부 이성구 어른과 함께사는 차남이 효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44세 되던 1971년에는 서울 청파동 조부 이성구 어른과 함께사는 장남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딸은 교육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한 조모 조언례 어른의 생각으로 서울 청파동 조부 이성구 어른과 함께살던 장녀를 부친이 있는 방산식물원으로 보내면서 효창국민학교에서 소사북국민학교로 전학을 옵니다. 1972년에는 장녀가 소사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소명여자중학교에 진학합니다. 1973년에는 서울 차남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1974년에는 소사 3남이 소사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천중학교에 입학합니다. 그해 서울에서는 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막내 이정현이 소사북국민학교에 입학합니다. 1975년에는 조모 조언례 어른의 강권으로 장녀는 소명여중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8월 9일에 방원 이성찬 선생님의 모친이자 장녀의 조모인 조언례 어른이 작고하여 화장으로 모시게 되어 장녀는 고교진학 가능해져서 서울 영등포여고에 1년 늦게 진학합니다.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 (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199-2) 바로 이곳이 방산식물원 또는 방원식물원으로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초까지 한국의 근교원예농업의 기술을 전파하고 확산하던 곳이었고 이곳에서 3남은 소사북국민학교를 다녔고 부천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다녔습니다.
이사진은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 (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199-2) 방산식물원 또는 방원식물원의 북쪽 경계의 모습으로 멀리 원미산이 보입니다.
이사진은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 (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199-2) 방산식물원 또는 방원식물원의 서쪽 경계의 모습으로 미루나무 숲 뒤쪽으로 소사북국민학교 지금의 부천북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사진은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 (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199-2) 방산식물원 또는 방원식물원의 동쪽 경계의 모습으로 성가수녀원 양노원 과수원으로 현재의 성가병원자리 뒤쪽 저멀리로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가 보입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의 모친 조언례 어른이 작고하신뒤, 1976년에는 차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장녀는 서울 영등포여고에 1년 늦게 진학하게 됩니다. 또 3남이 부천중학교에서 선린중학교로 전학을 오게됩니다. 그리고 막내 이정현은 소사북국민학교에서 서울 청파국민학교로 전학을 옵니다. 1977년에는 차남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3남이 선린중을 졸업하고 장훈고에 입학합니다. 1978년에는 3남이 장훈고에서 영동고로 전학을 갑니다. 1980년에는 장남이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 인턴이 되고, 3남이 영동고를 졸업하고 농대에 입학하고, 장녀는 한양여전을 입학합니다. 5월 3남이 5.17 신군부에 예비검속으로 불법구금되어 5개월만에 풀려납니다. 막내 이정현은 청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신광여자중학교에 입학합니다. 1981년에는 차남이 대학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합니다. 그해 11월 23일에는 방원 선생의 부친 이성구 선생님이 작고하십니다. 1982년에는 장녀 이양원이 한양여자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의상디자이너로 명동 김소영 의상실에 취업합니다.
1983년에는 막내 이정현이 신광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1984년에는 장남이 전문의를 받고 군의관에 입대합니다. 또 3남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서 녹화사업을 받습니다. 1985년에는 차남이 장교에서 전역하여 회사에 취업합니다. 1986년에는 막내 이정현이 성심여고를 졸업하고 덕성여대에 입학합니다. 3남은 전역후 대구에서 LGO유학원을 운영하며 전세계 유학지침서인 ‘전세계로 향한 한국의 유학혁명’을 집필 발간합니다. 1987년에는 장남이 종합병원 과장에 취임합니다. 3남은 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직합니다. 1988년에는 3남이 88올림픽과 88 파라림픽의 풀기자단 활동을 한후 미국 버지니아공대로 유학을 떠납니다.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 만91세되던 2018년 4월 17일 작고하셔서 6.25 참전 상의 국가유공자로 동작동 국입묘지에 영면하셨습니다.
그러면 한산이씨 인재공파 세보에 나오는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 초대식물원장(初代植物園長) 이성찬(李盛粲) 어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자(子) 성찬(盛粲) 자(字) 군실방원(君實芳園) 구보성찬(舊譜聖粲)정묘(丁卯) 1927년 12월 5일생(一九二七年十二月五日生) 새로 첨부될 부분은 무술(戊戌) 2018년4월17일졸(二0一八年四月十七日卒) 동작동국립묘지”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현정여(鉉廷女) 춘연(春淵) 임신(任申) 1932 년 10월 15일생 (一九三二年十月十五日生)”입니다.
참고로 흐름도에서 보이 듯 한산 28세 방원 이성찬 어른의 사촌동생은 금촌역장을 역임했던 이현찬; 인천저축은행장을 지냈던 이영찬 어른이십니다. 한산29세로는 의학박사 장남; 차남; 의상디자이너 장녀; 공학박사 미공무원 3남; 영어학원 원장을 역임한 차녀이정현; 당질들은 재미교포 이세원; 이동원; 이자원; 이제원 등이 있습니다. 한산30세로는 미국방성에 복무했던 장손 이은수; 손주들로는 의사, 정부계통, 어학계통에 근무하고, 외손주로는 신학박사 과정에 있는 조승현; 경찰공무원인 이진석; 만화가 조명은;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소정이 있습니다.
30편에 이르는 제 가문의 직계 선조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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